<정년이>: 한국형 페미니즘과 폐쇄적 여성우위, 그리고 동덕여대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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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웹툰 기반 시리즈 <정년이> (1)

<정년이>는 웹툰 원작의 tvN 12부작 드라마로 1950년대 한국전쟁 후 유행했던 여성들만의 창극인 ‘국극’ 배우에 도전하는 ‘타고난 천재 소리꾼’ 정년이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윤정년(김태리)을 비롯해 허영서(신예은), 강소복(라미란), 문옥경(정은채), 서혜랑(김윤혜), 홍주란(우다비), 박초록(오마이걸 승희), 서복실(정라엘), 진연홍(조아영), 백도앵(이세영), 고대일(류승수), 서용례(문소리), 한기주(장혜진), 박종국(김태훈) 등이주요 배역을 맡았습니다. -편집자 주

여성 주도 활동 아무 문제 없지만
남성 역할 배제가 목적인 게 문제
1950년대 여성 국극 형식, 한국형
페미니즘 이념 정당화 명분 제공
작가 간과한 사실, 여성 예술인들
자립 기반 남성 관객 호응과 소비

▲1950년대 유행했던 여성 국극을 둘러싼 여성 예술인들의 성장과 애환을 그린 드라마, &lt;정년이&gt;. ⓒtvN
▲1950년대 유행했던 여성 국극을 둘러싼 여성 예술인들의 성장과 애환을 그린 드라마, <정년이>. ⓒtvN

페미니즘 발흥: 페미니즘, 선진국 진입의 증표

<정년이>는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삼는, 최근 우리 문화계에서 각광받는 페미니즘을 반영한 드라마다. 시대 배경은 한국전쟁 휴전 직후 서울, 여성국극단의 예술혼과 인정투쟁을 주된 서사로 삼는다.

여성국극이란 1940년대 여성 소리꾼들이 모여 시작한 일종의 연극으로 판소리, 춤, 연기를 종합한 한국식 뮤지컬이었다. 이 독특한 연극 양식은 195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영화와 텔레비전 시대가 도래하며 예술계에서 자취를 감췄다.

<정년이>는 천재적인 음악과 연기 재능을 갖춘 소녀 윤정년(김태리 분)이 가족을 떠나 서울에서 국극 주연배우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중심서사로 삼고 있다.

이 작품은 전형적 성장서사 드라마로 주인공 윤정년이 고아나 다름없는 처지, 전쟁으로 황폐해진 나라, 그리고 열악한 예술활동 환경 속에서 주위 동료들과 경쟁하는 동시에 협력하며 자기 꿈을 개척해 나가는 감동적인 서사를 선보인다.

원작 웹툰의 스토리를 담당한 서이레 작가는 <정년이>와 관련된 인터뷰에서, 이 작품의 집필 의도가 여성 중심적 인간 이해의 선포와 변증에 있다는 것을 누차 강조했다. 작품 전체가 한국 페미니즘에 대한 헌사라고 볼 수 있다.

한국 페미니즘은 1990년대 시작된 3세대 페미니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전까지 한국 사회는 사상적으로나 구조적으로 페미니즘을 받아들이고 사유할 만한 사회적 토양을 갖추지 못했다.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 사회에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 개발독재 산업화 시대의 빠른 사회변화, 유교적 전통이 강하게 살아있는 가족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여성 중심적 인간 이해가 자리잡을 만한 여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페미니즘은 선진화된 국가에서 발흥한다. 여성들이 충분한 경제적 자립을 갖출 수 있을 만큼 3차 서비스 산업이 발전된 사회에서 페미니즘이 활발하게 논의된다. 문제는 3차 서비스 산업만 가지고 나라를 운영하고 국민들을 먹여살릴 만한 국가가 전 세계적으로 그렇게 많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기축통화를 가지고 전 세계 금융 동향을 좌우하거나 특별한 브랜드 파워나 문화적 역량을 가진 3차 산업 생산자를 다수 확보하고 있는 과거 제국주의 열강들, 오늘날 서방 및 자본주의 선진국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남성들이 경제적 부가가치 창출의 중심이 되는 1차 산업(농업, 어업, 축산업 등) 및 2차 산업(공업, 광업, 건설업 등)을 핵심 산업기반으로 삼고 있는 나라에서는 여성 인권 신장이 쉽게 이뤄질 수 없다. 애초 여성들에게 다른 권리를 주더라도 자주적인 경제력이 없으면 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근자에 우리 사회에서 페미니즘이 사회 전반의 주목을 받는 이슈가 되고 문화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세태는 그만큼 한국이 선진국에 근접한 산업 구조와 기반을 구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경제적 역량이 과연 앞으로도 유지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여기서 대한민국이 더 고차원적 3차 산업 기반(혹은 4차 산업 기반) 경제구조를 갖추려면, 서방 선진국들에 버금가는 자본 동원력, 인구, 그리고 브랜드 파워를 확보해야 하는데, 이는 인구 겨우 5천만 명에 그리 가치 있는 자원도 없고 영토마저 협소한 국가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근자에 우리 사회에서 페미니즘이 사회 전반의 주목을 받는 이슈가 되고 문화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세태는 그만큼 한국이 선진국에 근접한 산업 구조와 기반을 구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tvN
▲근자에 우리 사회에서 페미니즘이 사회 전반의 주목을 받는 이슈가 되고 문화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세태는 그만큼 한국이 선진국에 근접한 산업 구조와 기반을 구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tvN

페미니즘 급진화: 한국의 통속적 페미니즘, 3세대 페미니즘 급진화의 표본

그래서 한국의 페미니즘은, 향후 국가 발전 동향을 생각해볼 때,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외한 모든 인간의 사상체계가 그러하듯, 페미니즘 역시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사회의 실존적 정황 변화에 따라 언제든 보완, 수정, 혹은 폐기될 수 있다.

3세대 페미니즘은 고질적 문제를 안고 있다. 바로 남성과 여성을 분리해 여성의 독립성과 우월성을 쟁취하려는 열망을 인간 이해의 기본 전제로 삼기 때문이다.

1세대 페미니즘은 가부장제에 저항해 여성의 인격적 정체성을 확립하려 했다. 2세대 페미니즘은 여성성에 대한 심화된 고찰을 바탕으로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 권력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파괴된 관계, 폭력적 관계를 치유하려는 공동의 해방을 목표로 삼았다.

3세대 페미니즘은 기존의 페미니즘을 더 급진적인 방향으로 몰고 갔다. 1·2세대 페미니즘이 여성 인권 신장과 여성성 재평가에 어느 정도 성과를 보였기 때문에, 페미니즘이 살아남으려면 여성들에게 그보다 더한 성과를 낸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래서 이 때부터 페미니즘은 오로지 그 사상의 자체 존속을 위해, 그 사상으로 연명하는 학자들과 사회활동가들의 필요에 의해 급진화·과격화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이에 남성을 공생공존의 파트너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투쟁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페미니즘이 대중에게 널리 퍼지게 되었다. 깊이 있는 철학적 숙고가 배제된, 오로지 과도한 피해의식만 남은 ‘통속적’ 페미니즘이 득세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미국의 3세대 페미니즘 운동(the Third Wave Feminism). 기존 1-2세대 페미니즘 운동보다 훨씬 급진화된 페미니즘으로 전통적 사회질서, 가족구조, 성역할에 대해 매우 적대적 태도를 보인다. 그 사상적 정당성과 관련해서 수많은 논란을 낳았다. ⓒ픽사베이
▲미국의 3세대 페미니즘 운동(the Third Wave Feminism). 기존 1-2세대 페미니즘 운동보다 훨씬 급진화된 페미니즘으로 전통적 사회질서, 가족구조, 성역할에 대해 매우 적대적 태도를 보인다. 그 사상적 정당성과 관련해서 수많은 논란을 낳았다. ⓒ픽사베이

한국의 페미니즘 역시 충분한 학문적 숙고와 고찰이 결여된, 오로지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아 자체적 생명력을 유지하는 데만 몰두하는 방향으로 굳어지고 있는 듯하다. 이를 위해서는 그 어디로부터도 위협받지 않는 페미니즘만의 자체적 영역을 확보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의 반대편에 있는 자들, 남성을 완전히 배제한 사회적 영역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최근 동덕여대 사태에서 확인되는 페미니즘의 병리적 자화상이다. 그리고 드라마 <정년이>에 반영된 페미니즘 역시 자기 영역의 확보에 집착하는 페미니즘이라는 사실이 작품 전체의 캐릭터 설정과 서사를 통해서 확인된다. 이 작품에서 여성들의 삶의 세계 전체를 집약적으로 비유하는 ‘매란 국극단’은 말 그대로 여성이 주체를 넘어 지배자로 등극한 조직이다.

여성이 책임자나 주도자 위치에 있다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해당 직무에 뛰어난 인물이면, 그 능력을 존중해서 책임자를 맡기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매란 국극단’의 애초 존재 목적 자체가 남성 역할을 배제하는 데 있다는 점이다.

작중 매란 국극단에서 남성의 역할은 사업부장과 고수, 극작가 등 주변적 역할 외에 찾아보기 어렵다. 게다가 회계부장인 고 부장(류승수 분)은 매란 국극단의 예술혼과 경제적 가치를 술수를 통해 갈취하려는 교활한 배신자다. 이 작품 안에서 남성은 그야말로 여성의 주체적인 삶에 무가치하거나 오히려 훼방을 놓는 존재로만 묘사되고 있다.

여성 국극이라는 예술 형식은 이 여성과 남성의 엄밀한 분리, 여성의 지배적 위치 장악이라는 한국형 페미니즘의 이념을 정당화하는 최적의 명분을 제공한다. 그런데 서이레 작가가 하나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1950년대 당시 여성 국극이 여성 예술인들에게 꿈과 희망, 경제적 자립의 기회를 줄 수 있었던 기반은 바로 남성 관객들의 호응과 소비 의향이었다는 점이다. <계속>

▲드라마 &lt;정년이&gt;에서 여성 국극이라는 예술형식은 여성과 남성의 엄밀한 분리, 여성의 지배적 위치 장악이라는 한국형 페미니즘의 이념을 정당화하는 최적의 명분을 제공한다. ⓒtvN
▲드라마 <정년이>에서 여성 국극이라는 예술형식은 여성과 남성의 엄밀한 분리, 여성의 지배적 위치 장악이라는 한국형 페미니즘의 이념을 정당화하는 최적의 명분을 제공한다. ⓒtvN

박욱주 박사

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객원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 좁은문은혜교회에서 목회자로 섬기면서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 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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