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찬북뉴스 칼럼] 안식일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신 예수님
안식일에 관한 최초의 규례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제정하셨다. 그 역사는 무려 태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6일 동안의 창조 사역을 마치신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 안식하시면서, 그날을 복되고 거룩하게 하셨다(창 2:1-3).
하나님은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불러내어 약속의 땅으로 구원하시면서 다시금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을 요구하셨다(출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에 바르게 순종하는 것은 단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창조 사역과 은혜로운 구원 사역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합당한 삶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이 안식일 규례를 잘못 사용하는 것을 지켜보셨다(눅 6:5). 그분은 안식일 규례를 친히 제정하신 하나님으로서, 또한 자기 백성을 죄의 노예에서 해방하여 구원하시는 참된 안식을 가져다주시는 분으로서, 안식일을 변질시킨 사람들을 책망하고 바른길로 돌이키도록 가르치셨다.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 교사 등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는 스승과 인도하는 리더 역할을 했던 종교 지도자들은 안식일 규정으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그에 합당한 반응으로 이웃을 대하기는커녕, 안식일 규정과 그에 대한 장로들의 해석 및 전통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차라리 막고, 질병이나 귀신 등에서 놓임받는 은혜로운 일이 벌어지지 않게 방해하는 것을 도리어 더 원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된 열심과 그에 따른 폐해를 지적하시기 위해 일부러 ‘그들이 생각하는 안식일 율법 해석’을 어기셨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예수님과 제자들의 죄(?)를 고발하며 달려드는 이들에게, 안식일 율법을 제대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고 또한 설명하셨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제정하고 계시하신 안식일 율법을 있는 그대로(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그 안에 담긴 원칙을 바르게 적용할 것을 요구하셨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율법을 무시하거나 간과하셨다고 본다.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은 안식일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 했던 이들로 보고, 예수님은 율법을 초월해 사랑을 실천한 분이라고 평가한다.
말이 좋아 ‘초월한 것’이지, 사실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여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셨다는 말이다.
이런 관점을 가진 자들은 동성애나 낙태를 성경의 계명을 근거로 죄라고 규정하고, 그래서 반대하는 이들을 향해 “예수님이 안식일에 율법의 요구와 이웃 사랑 중 무엇을 선택하셨는지 생각해 보라”며 책망한다. 자신들은 문자적 율법 해석에 갇힌 바리새인이 아니라, 율법의 문자적 해석을 초월해(?) 사랑을 실천하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선언한다.
두 가지 질문에 먼저 답해보자.
1. 바리새인은 정말 율법의 문자적 해석에 갇혔는가?
2. 예수님은 율법의 문자적 해석을 초월 또는 거부하셨는가?
1. 먼저 ‘안식일 율법의 문자적 해석’이라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안식일 율법을 처음 제정하실 때 의도하신 의미와 정신을 발견하고 그에 맞게 삶에 적용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바리새인을 비롯한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은 안식일 율법의 문자적 해석이 아니라 장로의 유전과 전통을 좇았다(마 15:2). 하나님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을 요구하셨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공급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 손으로 일하여 더 많이 얻으려고 애쓰는 탐욕스러운 인간의 우상숭배를 막으려 하신 것이다.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이유는 만물을 먹이고 입히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예배하는 일에 집중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단지 ‘일하지 말 것’에만 집착했다. 무엇이 일인지 일이 아닌지를 구별하는 데 열심을 낸 것이다. 그들이 규정한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자는 하나님의 구원에서 멀어진 자로 심판하고, 그들의 규정을 따르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구원을 맛볼 수 있다고 오도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은 율법의 문자적 해석에 갇힌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자적 해석에서 멀어진 것이다. 그들의 율법주의적 성향은 하나님이 원래 사람을 위해 제정하신 안식일 율법을 사람을 억압하는 법으로 뒤바꿔 놓았다.
사람을 쉬게 하려는 법을 쉬지 못하게 하는 법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부단히 노력해야 하나님의 호의를 겨우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불신의 법으로, 구원자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하기 위한 법을 그분의 구원을 얻어내기 위해 완벽한 요구조건을 자기 힘으로 만족시켜야 하는 법으로 변질시켰다.
2. 그러면 예수님은 율법의 문자적 해석을 초월(?)하셨을까? 앞서 말한 것처럼 ‘초월’은 여기서 하나님이 제정하신 안식일 율법의 본래 의미와 의도를 벗어났음을 뜻한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율법에 관해 가지고 계셨던 생각은 매우 명확하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눅 16: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예수님은 율법의 본래 의미를 부정한 적이 없으시다. 일점일획도 무의미하거나 효력이 없는 것으로 보지 않으신다. 온 천지가 단숨에 사라지는 것보다, 율법의 한 획이 성취되지 않고 힘없이 땅에 떨어지는 것이 더 어렵다고 보신다. 하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말씀이신 예수님 또한 아버지 입에서 나온 그 말씀을 완전하게 이루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헤르만 바빙크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그 자체의 말씀보다, 율법에 대한 부정확한 해석과 적용을 지적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것들, 즉 제자들이 옛적부터 서기관들과 선조들로부터 전해 들은 것들과 절대 모순되지 않으셨다(존 볼트 <헤르만 바빙크의 성도다운 성도>, 도서출판 다함, 2023, 206쪽)”.
누가복음 13장과 14장에 각각 사례가 나온다.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열여덟 해 동안 귀신 들려 앓고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고치신 일과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초청받아 함께 드실 때, 수종병 든 한 사람을 고치신 일이다.
회당장은 화를 냈다: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눅 13:14).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도 예수님의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눅 14:3).
그들은 안식일에 자기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고, 자식이나 가축이 우물에 빠지면 곧 끌어낼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장로의 유전과 전통에 따라 세운 안식일 율법의 잘못된 해석에 매여, 하나님이 주신 안식일 율법의 본래 의미와 의도를 왜곡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을 지적하시면서, 안식일에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고 그 은혜를 이웃과 나누는 것은 안식일 율법의 문자적 해석에 부합한다는 것을 친히 보여주셨다.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안식일의 참 의미, 아버지가 제정하신 그 의도와 의미를 문자 그대로 회복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기록된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초월하셨다는 말은 사실 그분을 모독하는 말이다. 왜 그런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으로서 성자께서 성부의 뜻을 다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신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중요하게 여기신 것을 아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하셨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성부께서 성령으로 계시하신 말씀의 본래 의미와 의도에 성자가 동의하지 않으신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결단코 아버지 하나님이 의도하신 말씀의 의미를 거부하거나 벗어나지 않으셨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아들로서 죽기까지 그 계명에 순종하셨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자기 백성을 돌보고 치유하고 사랑하신 것은 아버지의 계명을 어기면서까지 더 위대한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함이 아니라,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에 순종하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둘째 되는 계명인 이웃 사랑을 실천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배타적이지 않다. 하지만 우선순위는 있다. 우리가 생각하고 제한하고 규정하는 이웃 사랑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이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이 계시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기쁘시게 하는 방식대로, 다시 말해 기록된 말씀의 문자적 의미와 의도를 존중하고 그에 합당한 순종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이웃을 사랑한다.
예수님은 기록된 아버지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셨고, 또한 문자적으로 순종하셨다.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에 기록된 그대로 놀라운 아버지의 구원 사역을 완전히 이루셨다.
우리가 동성애나 낙태 등 모든 이슈에 관해 생각할 때 기록된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해 하나님 아버지의 의도를 바르게 발견하고 그 말씀 그대로 적용하려 애쓰는 것은, 그래서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길이다.
문자적이라는 말이 사랑 없는 율법주의, 형식주의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하신 이 말씀을 생각해 보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 26:53-54).
성경의 문자적 해석과 적용을 위해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으신 예수님의 마음은 전혀 형식적이거나 율법적이지 않았다. 죽기까지 아버지 뜻에 순종하여 아버지를 사랑하려는 마음,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내어주신 최고의 이웃 사랑의 마음이 오롯이 묻어난다.
우리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마음에도 그리스도의 그 마음이 묻어나기를 바란다. 때론 방법은 옳아도 태도는 틀릴 때가 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기 위한 태도를 가지고 성경을 문자적으로 바르게 해석하고 살아내자. 그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삶이다.
조정의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인
유평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