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체제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대표적 상징물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를 상징하는 것은 도심 중앙에 높이 서있는 성 소피아 기념비(The Monument of Saint Sofia)다. 소피아상은 불가리아가 1990년에 민주화가 되면서 레닌 동상을 철거하고 그 대체물로 2000년에 세운 청동상이다. 오른손에는 승리(영광)를 상징하는 월계관을, 왼손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부엉이를 들고 12m 기둥 위에 서 있는 불가리아의 수호상으로, 로마신화의 ‘지혜의 신’인 소피아 여신을 연상케 한다. 동시에 초기 동로마시대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딸인 소피아 공주도 가리키는 조형물이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재위기간 AD 527-565)는 지혜의 신인 소피아를 너무나 좋아해서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에 대성당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소피아라고 지었다. 그의 딸에게도 그 이름을 붙여 주었다. 역사적으로 이 도시의 이름이 소피아가 된 것은 공주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공주가 중병에 걸려 황제는 당시에도 온천으로 유명한 이 지역으로 공주를 보냈고, 병이 낫게 되서 이것을 기념해서 소피아 기념교회를 세웠다는 풍문이다. 이후 사람들이 이 지역에 몰려들었고, 자연스럽게 이 도시 이름이 소피아로 불렸다고 한다. 소피아 도심에만 온천수 나오는 곳이 10여 군데가 넘는다고 한다. 필자는 거의 이 온천수로 식수를 해결했다.

불가리아 사람들은 소피아상을 지혜의 여신보다는 미국의 자유여신상처럼 ‘자유’의 대표적 상징물로 받아들인다. 숭배의 대상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레닌을 대체한 상징물인 만큼 레닌 광장에 세워졌고, 광장 이름도 네델리아로 바꿔 불렀다.

공산당 지도자 조치 양상 및 그 시사점
불가리아는 다른 동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유혈혁명(사태)에 의해 민주화가 되지 않았다. 피를 보지 않고 유연하게 체제 전환을 맞이했다. 당시 공산당 서기장(제1비서)이었던 토도르 지프코프(1911-1998)는 1954년부터 35년 동안 군림했던 권좌에서 내려왔다. 그는 권력을 얻고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숙청하고 잔인하게 처형했던, 독재성이 강한 인물이었다. 또한 친인척들을 공직에 임명하는 등의 정치적 부패도 일삼았던 지도자였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 수 차례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형 선고를 받았지만, 건강 악화로 가택연금으로 전환되었고, 해제된 이후에는 별다른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불가리아 사회당에서는 그를 고문으로 추대하였고, 그가 사망(1998년)하자 비록 국장으로 치르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인파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한편 제1대 서기장 게오르기 디미트로프(1882-1949)의 경우는 많이 다르다. 그는 1902년 불가리아 사회민주당(1919년 불가리아 공산당으로 변경)에 가입하면서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조국전선을 조직, 1946년 왕정체제를 무너뜨리고 불가리아를 인민공화국으로 만든 인물이다.
그가 1949년 사망한 후, 그의 시신은 방부처리가 되어 묘(기념관)에 안치되었다. 민주화가 된 1990년에 그의 시신은 화장 처리되었고, 1999년 그의 묘는 완전히 파괴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현재는 공원의 잔디밭으로 조성되어 있다. 한때는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의 아버지’라고 불렸던 그에 대한 처벌의 수위는 상당히 높았던 것이다.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여, 불가리아 국민들 뇌리 속에 완전히 지워져 버린 인물이 되어 버렸다. 민주화 이후 그의 시신은 바로 처리된 반면 그의 묘는 9년 동안 보존된 것을 보면, 내부적으로 많은 논쟁이 있었던 것 같다. 당시 소피아 시민의 3분의 2가 박물관으로 재활용하자는 의견이었다고 한다.

과연 향후 북한 정권이 붕괴되었을 때 독재자 김일성에게도 이러한 조치를 강력히 취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몇몇 북한 연구자는 관광 상품으로서의 활용도가 높다고 보고 있는데, 경제적 실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본다. 불가리아 정부는 사상과 체제적 측면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고 해결한 것이다.
문제는 이미 죽은 자(디미트로프)에게는 매우 혹독했던 반면, 살아 있는 자(지프코프)에게는 상당히 유연했다는 점이다. 그 악독성과 독재성을 보면 후자가 전자를 훨씬 능가했는데 말이다. 앞서 기술한바 대로, 지프코프가 사망하고 그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애도의 물결로 넘쳐났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국가 경제 형편이 향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심각한 빈부 격차로 인해, 절대다수가 과거보다도 먹고사는 문제가 더 어려워졌다는 데 있다. 불가리아 민주정부(내각책임제)는 민생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오늘날도 불가리아는 1인당 국민소득(22,400달러)이 EU 회원국 중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그래서 여전히 유로가 아닌 불가리아화(레프)를 사용하고 있다. 육지로 여러 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지만, 입국 통과 절차를 매우 까다롭게 받고있는 편이다. EU 회원국으로서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 주는 하나의 단면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모든 나라의 국가 건전성 평가는 바로 경제력에 의해 좌우되며, 그 절대적 평가는 바로 민생 해결 여부다.

이처럼 불가리아의 경제적 낙후성은 국민들로 하여금 과거 사회주의 체제 당시의 향수를 불러오게 한다. 장년층·노년층일수록 더 간절해진다. 이들의 과거 회상을 듣고 자라는 젊은 세대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경계심(경각심)을 점점 낮추게 된다. 먹고사는 데 문제만 없으면 된다는 기류가 점점 높아진다. 이 지점에서 분명히 얻어야 할 교훈이 있다. 체제의 우월성은 사상 자체보다는 그만큼 경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필자도 통일의 당위성에 더 많은 무게중심을 뒀었는데, 통일 이후의 경제 상황 및 그 변화 양상 점검의 필요성을 느꼈다. 통일 대비 단계에서 경제 문제를 상수로 둬야 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불가리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
공산당 건물의 용도변경 및 인적청산 추이
사회주의 체제 시기, 대표적인 건물은 공산당 본관이다. 현재 이 건물은 소피아 중심에 있으며 의회(National Assembly)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아주 자연스럽게 용도변경이 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건물 가까이 가 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 공산당 건물 당시 정면 외벽에 붙여 놨던 커다란 공산당 마크가 여전히 있다. 충격적 사실 아닌가. 아니 왜 저 마크를 철거하지 않았을까. 하나의 향수 차원인지 아니면 관광상품 차원인지 너무나 궁금했다. 확인해 보니 둘 다 아니었다. 바로 공산당 붕괴의 역사적 흔적이었다.

건물 더 가까이 가보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금방 이해가 된다. 공산당 마크가 다른 외벽과는 확연히 차이 날 정도로 시커멓게 그을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민주화 이후 공산당 건물 외벽을 다 태웠다고 한다. 무너뜨리지는 않았지만, 건물도 응징을 당한 것이다. 공산당 독재의 상징물이기에 불가리아인들은 그냥 놔둘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건물에 불을 지른 것이다. 리모델링을 하면서 다른 부분은 말끔히 수리했지만, 공산당 마크는 그을린 채 그대로 걸어 놨다. 공산주의가 붕괴되었다는 상징성으로 말이다.

과거 공산당을 상징했던 대형 붉은 별을 비롯한 여러 조형물들은 도심에서 벗어난 외곽에 세워진 사회주의 예술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레닌동상도 하나 옮겨 놓았다. 우리에게는 향후 북한 체제 전환 시 어떤 조치들을 취해야 될지 많은 시사점을 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한편 민주화 이후 인적 청산은 제대로 안 이뤄졌다고 한다. 지코프코 서기장의 사례에서 확인한 대로, 다른 공산당 고위 간부들도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무거운 법적 책임은 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에 여러 요직에 공산당 간부들의 자녀들이 대거 기용되기도 했다.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공산당 간부들은 그들의 자녀들을 해외 유학을 보냈다. 동유럽뿐만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서방에도 보내서 자유세계를 미리 체험하게 한 것이다.
1990년, 민주정부 출범으로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이식시켜야 하는 중대과업을 떠안은 불가리아 정부로서는, 이미 자유세계를 경험한 공산당 간부의 자녀들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들은 민주국가 건설을 위해서 현실적으로 필요한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민주화 이후에도 공산당 자녀들로 권력층은 형성되었다. 현재도 80% 넘는 비율을 차지하다고 한다. 현 불가리아 대통령인 루멘 라데프(1963년 출생)도 군사대학(1987)을 거쳐 미국 공군대학(1992)을 졸업한 인물로 공산당 간부의 자녀다. 의원내각제인 불가리아에서 실세인 총리, 디미타르 글라브체프(1962년 출생)도 마찬가지다. 마르크스 고등 연구소를 졸업(1987)하고 전문회계사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미리 보는 북한의 내일
불가리아는 민주화 과정 속에서 인적 청산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평가된다. 사회주의 체제 시기 공산당 간부 및 기득권층들은 민주정부 하에서 일정 부분 법적 책임을 졌지만, 그들의 자녀들에게로 계속해서 권력은 대물림되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양상은 북한과는 거리감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남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향후 북한의 체제가 전환되어 민주국가를 건설할 때, 그 주된 역할은 남한의 몫이다. 필요한 인력(인재)수급은 남한으로부터 충분히 조달될 것이다.
또한 우리 곁에는 이미 북한의 독재사회를 경험하고 자유세계도 맛본, ‘먼저 온 통일’인 북한이탈주민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통일 준비 차원에서도 매우 필요하지만, 통일 이후 북한을 건설해나갈 때도 반드시 주역이 되어야 할 존재들이다. 하나님은 알게 모르게 ‘통일’을 준비해나가고 계신다.
소피아 땅밟기 기도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북녘 땅을 위해 간절하게 기도를 올리게 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