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본철 교수의 성령론 199
성경은 시대를 초월하여 역사하는 하나님의 예언이요 계시의 말씀이다. 그런데 이런 결코 변함 없는 예언으로서의 성경과 구분하여 성령의 나타남으로서의 예언에 대해 성경은 소개하고 있다. 성경에 보면 예언은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할 때나 복음을 전할 때 또는 신앙상담 중에 나타날 때가 많다. 사도행전에서 다음과 같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성령을 받아 예언을 말함;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
아가보의 예언;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행 11:28)
박수 엘루마가 바울의 예언으로 눈이 멂;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행 13:9-11)
성령 받아 예언함;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행 19:6)
빌립의 네 딸이 예언함;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행 21:9-11)
배안에서 바울이 예언함;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행 27:10)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행 27:22-26)
요즘 보면 예언을 강조하는 집회가 매우 많다. 어떤 이들은 예언의 은사가 교회 내에 반드시 회복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명심할 것은 오늘날의 기독교 상황은 성경의 정경화(正經化) 작업이 완성되었다는 점에서 초대교회 때와는 다르다는 점을 전제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말은 곧 성령의 은사로서의 예언이 결코 완성된 예언으로서의 성경의 내용을 벗어나거나 왜곡시킬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성경의 저자가 성령이신데, 같은 성령께서 성경의 정신에서 어긋나는 다른 예언의 내용을 주실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을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예언에 대한 사도 바울의 권면은 성경 또는 성경의 권위와 버금가는 예언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주고 덕을 끼치는 성령의 나타남으로서의 예언에 대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14:1)
그리고 이러한 성령의 나타남으로서의 예언은 다음과 같은 목적 속에서만 행해질 수 있다.
첫째, 성령의 능력과 관련이 있다. 성경적인 예언은 언제나 성령의 인도와 능력 안에서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술적인 예언, 무당적인 예언들은 성경의 예언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둘째, 복음 증거의 목적에 닿아 있다. 예언이 성령의 나타남(the manifestation of the Holy Spirit)으로서 행해질 때 복음이 권세 있게 전달되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개개인의 사리사욕이나 명예를 위해 말하는 예언 현상은 복음 증거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므로 거짓 예언이다.
셋째,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참다운 예언은 언제나 교회를 세우고 위로하며 사랑 안에서 튼튼하게 하는 목적을 지닌다. 그러므로 예언 때문에 교회에 파당이 생기고 교회가 분열되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교회의 유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거짓 예언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방언 그리고 방언 통역과 관련해 볼 때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사모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예언은 다른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기 때문에 방언이 자기와 하나님께만 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14:3-4)
바울의 강조점은 예언이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는 중요한 성령의 나타남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성령으로 감동된 예언이 교회 앞에 적절하게 표현될 때 온 교회는 크게 힘을 얻는다.
이처럼 성령의 나타남으로서의 예언은 언제나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설교자는 특별히 성령으로 감동된 예언을 받아 회중 앞에 전달할 수 있도록 늘 깨어 준비해야 한다. 설교자가 전하는 설교의 말씀은 교회를 위해 설교자에게 주신 성령의 감동을 전하는 것이다. 회중들은 그 설교를 들을 때 성령으로 감동된 예언의 말씀을 전해 들을 수 있게 된다. 교회에 임명된 설교자를 통해 예언의 메시지를 회중에서 충분히 전달하실 수 있다면, 성령께서는 더 이상의 교회 전체를 향한 예언의 말씀을 교인들에게 주실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14:39)
성경은 1절에서 언급한 예언을 사모하라는 말씀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그 중요한 핵심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위해 주어지는 예언이 있을 때 지도자는 겸비하고 청결한 심령으로 이를 받아 교회의 질서를 따라 회중 앞에 전달하라결국 방언이나 방언 통역이나 예언 이 모두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방향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점이 14장 전체에 흐르고 있는 대전제이다.
배본철 성령의삶 코스 대표(성결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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