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삼서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본문 말씀은 ‘사랑하는 자여~’ 이렇게 시작합니다. 성 요한 사도가 그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는 권면이자 덕담 같은 말씀입니다.
요삼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유명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더 쉽게 풀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이여~ 내가 여러분들을 위해 간구하고 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잘된 것 같이, 여러분의 모든 일이 잘되고 여러분이 건강하기를 나는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 요한 사도가 그가 사랑하는 자들에게 두 가지 기도제목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늘 열심히 기도합니다. ①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들이 잘 되기를 기도하는 것, ②여러분이 늘 건강하기를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일과 건강 두 가지입니다.
요한 사도가 두 가지 기도를 하는데, 전제가 있습니다. ‘영혼이 잘 됨 같이’ 입니다. 즉 ‘여러분의 영혼은 이미 잘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미 여러분은 영혼의 문제를 아주 명확하게 제대로 해결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처럼, 여러분의 일도 잘되고 여러분도 건강하기를 내가 기도합니다’ 라는 말입니다.
이 권면, 이 덕담 속에는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을 보면, ‘영혼이 잘되는 것이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에 따라서 다른 것들도 다 잘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인간의 구조에 대해 말했습니다. 인간은 겉사람이 있고 속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또 장막 이론도 나옵니다. 장막이 뭔가요? 광야의 백성들이 체류할때 쳤던 텐트(Tent)입니다. 그 장막을 세우고 허는 것을 반복하며 가나안을 향해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손으로 세우는 장막이 있지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장막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비유인데, 인간은 육신이 있고 영혼이 있다는 말입니다. 점심 때 배고프면 밥을 먹고 싶듯, 우리 영혼은 진리에 대한 굶주림 혹은 갈급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육과 영, 이 둘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무엇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요. 둘 다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인데, 영을 위해 육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육신을 가지고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서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육신은 무너지고 사라지지만, 영은 그 자란 것을 가지고 하늘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 제일 중요한 것은 ‘영혼’입니다. 이 땅의 삶은 잠깐입니다. 순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순간을 통해 영원한 삶을 준비하고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 말씀을 진지하게 공부하고 주야로 묵상하며 그 말씀이 가르치는 바대로, 성경적 가치관, 세계관, 역사관을 가지고 잘 살아야합니다.
지금 본문에서 요한 사도는 그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또 오늘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에게 “너희의 영혼은 이미 잘 되어 있지 않느냐? 이미 말씀위에 굳게 서 있고 이미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분명하게 아는 사람들이 아니냐?”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두 가지입니다. 일이 잘되고 건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않는 자들을 전도할 때, 그들에게 우선적으로 전해야할 메세지는 ‘영혼이 잘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혼이 잘 되어야 다른 것도 다 잘 된다는 것’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가장 기본입니다. 그렇다면 영혼이 잘 된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그것을 뭐라고 얘기하고 있을까요. 그것을 가장 잘 설명한 책이 로마서입니다. 그 중에 오늘 이 한 구절만 깊이 보겠습니다.
로마서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누구랑 원수되었을까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나요. 창3장에는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 하나님 형상된 인간이 어떻게 범죄하게 되었는지 소상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원죄 사건’은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말할 수 없는 고통이요 슬픔입니다.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온 우주와 만물을 지으시고 그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아담에게 주셨습니다. 즉, 모든 것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 아담이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범죄하였습니다. 그에 대해 하나님이 느끼셨을 배신감과 어처구니 없는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도 가죽옷을 해 입히셔서 그들의 수치와 두려움 불안함을 덮어주시는 놀라운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그 죄로 말미암아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수가 된 것입니다. 이 ‘원수’라는 말을 로마서 1장 18절에서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게 되었다 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죄가 너무도 충격적이어서 화도 나고 너무 슬프고 원통한, 이런 복합적 감정이 ‘하나님의 진노’에요. 이런 바울의 이해란 매우 깊은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근원적인 관계 속에 인간이 이런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주제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다가오겠습니까.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즐기면서 살자.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자”라며 욕망만을 좇아 사는 이들에게 신앙이나 영혼의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게 다가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내면의 갈망은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 내면의 목소리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모든 인간 안에 걸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잘되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도 기쁘지 않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 표현으로는, ‘들어와도 저주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을 보면 우리 인간 내면의 목소리, 그 깊은 갈망과 소원에 대한 시들로 가득합니다. 이보다 더 아름답고 깊은 시들은 세상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시들중 대표적인 시가 42편입니다.
시편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이 시를 보면 낙심하고 불안해하는 영혼에 대한 위로와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낙심하지 말아라. 불안해 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있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로마서에서의 사도 바울은 사랑의 하나님에 대해 먼저 초점을 두면 안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무조건 괜찮다’, ‘무조건 잘될 것이다’, ‘무조건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신다’라는 근거없는 낙관론 내지 까닭없는 긍정을 가지고 인간을 이해하면 위험하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간’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인간은 ‘죄의 덩어리’라는 것입니다. ‘심판 받아 마땅한 하나님앞에 끔찍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서 5장에는 ‘원수’라고 표현 한 것입니다. 관계가 서로 등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이런 관계에 놓여 있으면, 인간 영혼은 불안하고 괴로우며 무엇을 해도 기쁘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산해진미가 눈앞에 있어도 맛있지 않고,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며, 무엇을 해도 문제가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그 삶이 늘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먼저’ 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회복할 수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회복된 것입니까. 다시 로마서 5장 10절을 보십시오.
로마서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의 원수 된 관계의 회복은,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은 등지고 있는 관계가 마주보는 관계로 바뀐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라는 말씀처럼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항상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때 동물을 죽여서 제단에 바쳤습니다. 그때 바쳐지는 동물(제물)을 ‘화목제물’이라고 합니다. 왜 이런 ‘화목제물’이 필요했을까요.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죄 없는 동물, 흠 없는 동물을 드림으로, 그것의 희생을 통해 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법적 의미가 있습니다. 죄와 의에 관한 것입니다. 죄에 대한 대가를 치루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은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아들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해석해주고 있습니다. 그 죽으심이란 단순한 죽음이 아니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 원수된 관계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 우리의 많은 죄의 값을 대신 치르도록 바쳐진, ‘화목제물’로서의 죽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피흘리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담대히 그분께 나아갈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5:10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이 말씀이 다른 성경 번역에는, ‘그렇게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우리가 그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더욱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의 생명을 바쳐 그의 피흘림으로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는데, 하물며 그렇게 화목하게 된 우리를 그리스도의 다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이 다 살려내시지 않겠습니까. 다 구원하시지 않겠습니까(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광의적 의미에서의 구원입니다)?’ ‘우리를 영화로운 자리까지 인도하시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런 말씀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 피흘려 죽으신 그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 영혼의 불안과 괴로움이 다 거두어 지고 진정한 평안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영혼이 잘 된 것’입니다. 믿음으로 이미 완료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늘 점검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대로 되어 있으면, 범사가 잘 됩니다. 모든 일이 술술 풀려집니다. 이것은 옷을 입을 때 첫 단추를 잘 끼우는 것과 같습니다. 첫 단추 하나를 잘 끼우면 그에 따라 모든 단추들도 잘 끼워지게 됩니다. 또 이것을 인체로 생각해 본다면, 척추가 튼튼한 사람과 같습니다. 척추가 튼튼히 서 있는 사람은, 몸의 다른 뼈들도 잘 맞춰져 있고 그에 따라서 몸이 건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 또 우리 신앙에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에는 ‘믿음’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라고 번역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에 따라 범사(모든 일들)가 잘 되고, 그 다음 강건할 수 있습니다.
‘강건(剛健)’이란 단어는 ‘good health’입다. 건강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것이 성 요한 사도가 오늘 우리 믿는 자들에게 주는 귀한 권면이요 덕담입니다. 이 말씀을 따라 마음의 평안을 누리고 범사가 잘 되고 몸도 건강해지는, 하나님의 큰 복을 다 누릴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장시환 목사(서울 길음동 새안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