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 세기를 넘어 세대를 잇다’ 주제로 탄생 150주년 기념행사
자유·민주·공화, 우남의 빛나는 가치
청년 시절의 분투, 지도력 밑거름 돼
건국정신 이어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이승만 대통령 탄생 150주년 기념행사가 3월 25일 오후 2시 장충동에 위치한 크레스트72 글라스홀에서 ‘우남 이승만, 세기를 넘어 세대를 잇다’라는 주제로 개최됐다.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 김황식 전 국무총리는 환영사에서 “올해는 이승만 대통령 탄생 150주년 맞는 역사적인 해이다. 150년 전 극심한 격랑의 시대에 태어난 우남 이승만은 젊은 날을 바쳐 안으로는 구국운동, 밖으로는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청년 이승만의 나라를 위한 치열한 분투는 훗날 대한민국을 세우고 이끌어가는 탁월한 지도력의 밑거름이 됐다. 우남의 정신과 그가 남긴 업적은 우리의 귀중한 역사적 자산이 됐다.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이 확립한 자유, 민주, 공화의 빛나는 가치를 보유하고 있다. 단언컨대, 이승만 대통령이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불굴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창업가인 이승민 대통령을 바르게 기념하는 것이야말로 대한민국의 뿌리를 되찾고 국가의 정체성을 굳건히 확립하는 길이라 믿는다”면서 “우남 탄생 150주년이자 서거 60주년, 광복 80주년인 올해는 수없는 위기를 극복하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룩한 우리 민족의 저력과 자긍심을 바탕으로, 이승만대통령기념관 건립을 향해 힘차게 정진하는 도약과 희망의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전했다.
한국자유총연맹 강석호 총재는 “요즘 시국이 너무나 안타깝고 어려운 일들이 많다. 어제 한덕수 총리가 정상적으로 복귀했는데, 윤석열 대통령도 하루속히 복귀해서 대한민국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이승만 대통령과 장제스 총통이 함께 논의해 설립한 한국자유총연맹은 아시아반공연맹으로 출발해 오늘에 이르게 됐다. 이승만 대통령 탄생 150주년을 맡아 여러 행사들을 진행할 계획이다. 앞으로도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정신을 이어받아 이 땅에 다시는 종북좌파가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안보와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매진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조선의 쇠퇴와 청년 이승만
‘조선의 쇠퇴와 청년 이승만’을 주제로 발표한 이승만학당 이영훈 교장은 “1910년 8월 29일, 고종 황제는 그의 대한국을 일본에 병합하는 내용의 조칙을 공포했다. 통감부는 군중의 소요에 대비해 일본군을 서울 요소에 배치하는 등 긴장 상태에 들어갔으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한국 또는 조선왕조의 국가적 통합력은 완전히 해제됐으나, 사람들은 왕조의 멸망을 자신의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1904년 한성감옥에서 쓴 「독립정신」에서 ‘제 집과 토지와 재산이 있으나 제 것인지 믿을 수 없고 심지어 제 처자와 가족도 제 것인지 알 수 없어 제 목숨이 과연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로 묘사했다. 마치 홉스가 그의 ‘리바이어던’에서 묘사한 국가 이전의 야만 상태 그대로였다”고 했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그 해답을 ‘천 년 이상에 걸친 전제정치의 해독’에서 찾았다. 그는 전제정치는 ‘한두 사람이 백만 명 위에 걸터앉아 그들을 노예로 부리는 꼴’이며 백성의 마음을 결박해 깊은 병에 들게 한다고 했다. 대한국의 현실 가운데 이승만이 특히 통분해 마지않은 것은 노예제의 존속이었다”고 했다.
그는 “20세기 한국인들은 그들의 전통 국가가 해체된 폐허에서 새로운 문명 원리의 국가와 사회를 건립해야 할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승만은 서양에서 발원한 근대문명의 길을 선택했으며, 그 길로 동포를 인도했다. 근대문명의 핵심 요소는 개인, 통상, 기독교 세 가지였다. 이승만은 이 세 가지 요소의 내용과 상호 관계를 체계적으로 이해한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그 점에서 그는 혁명가요, 정치가이기 이전에 사상가이며 종교가였다. 이승만이 없었다면 1948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바탕을 둔 근대 국민국가 수립은 어려웠으며, 설령 세워졌더라도 단명했을 터이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은 쇠퇴한 나머지 허물어진 전통 문명을 새로운 원리로 대체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이어 “그의 역사의식, 특히 일본에 대한 강렬한 적대감은 그가 일제 치하에서 살아온 적이 없기 때문에 오롯이 조선의 원형 그대로 그의 내면을 관철했다. 그것이 없었다면 50년에 걸친 그의 혁명가 인생은 지속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그의 근엄하고 경건한 일상생활의 자세는 그가 어릴 때부터 조선의 유자로서 추구한 그것과 상통했다. 그러한 인품과 지성은 속류의 독립운동가나 정치가와 평교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는 불가피하게 그의 독립운동과 정치를 권위주의적 방향으로 이끌었고 불가피하게 그의 정치를 계몽적인 철인정치로 이끌었다. 그것은 당대 한국사를 진보의 방향으로 이끈 거의 유일한 정치적 자산이었으나, 동시에 끊임없는 저항의 표적이기도 했다. 전통 문명을 대체하거나 발전적으로 계승할 새로운 원리의 문명이 무엇인지 둘러싸고 한국의 지성이 아직도 갈등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죽은 지 근 60년이 됐지만 아직도 이러한 대립이 계속되고 있다”고 했다.

청일전쟁과 청년 이승만
‘청일전쟁과 청년 이승만’이라는 주제로 발제한 김명섭 교수(연세대 정치외교학)는 “조청일전쟁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조선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청일전쟁(1894~95)은 1637년 병자호란 이후 존재했던 동북아시아 질서를 바꿔 놓았다. 조선에서 청제국의 세력을 밀어낸 일본의 압박 속에 추진된 갑오경장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청년 이승만은 유교 경전 대신 배재학당에서 신학문과 민주주의를 접하며 중화주의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고종의 단발령 이후 청년 이승만이 상투를 자른 것은 중화적 세계관과의 단절을 신체적으로 상징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이 공인한 조선 독립 조항에 기반해서 1897년 선포된 대한제국은, 독립국이 증대되고 있던 세계사적 흐름을 반영하고 있었다. 청나라의 패전으로 정치개혁 없는 근대 문명의 수용의 한계가 입증되면서, 보다 근본적인 정치개혁이 추진됐다. 이러한 개혁운동에 참여했던 청년 이승만은 박영효 정변 사건에 연루돼 1899년 한성감옥에 수감됐다. 이때 그는 개인적 죽음과 국가적 쇠망이라는 이중적 절망 상태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는 유교적 관점과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았으나, 일찍이 서유럽 국가들과 미국의 독립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던 개인의 자유에 기초한 독립사상을 발전시켰다”고 했다.
이어 “대한제국의 한성감옥에서 수감돼 있던 청년 이승만은 민주정치를 통한 독립을 최선으로, 고종 황제와 국민이 독립을 위해 협력하는 헌법정치를 현실적 차선으로 봤다. 청일전쟁을 겪으며 탈중화 독립정신을 키웠던 청년 이승만은 감옥 안에서 청일전쟁을 연구하며 독립사상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는 청일전쟁 결과로 ‘주어진 독립’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지 못한 수치스러운 독립으로 인식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청일전쟁 이후 조선/대한민국의 개화독립파 지도층 인사들이 더욱 빠져 들었던 ‘친일의 덫’을 회피할 수 있었다. 청년 이승만이 오늘날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는 말씀일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발제에 대한 논찬은 김영림 일본 추오대학교 문학박사, 주대환 민주화운동동지회 의장, 복거일 소설가가 전했다.

‘21세기 대한민국 청년들이 생각하는 19세기 청년 이승만’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2부 행사에서는 김정민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 학예연구팀장의 사회로 1776연구소 조평세 대표, 바른청년연합 손영광 대표, 빌드업코리아 김민아 대표, 사자그라운드 대표 책읽는사자 등이 참석해 토론했다.
이후에는 박상윤 교사(대한민국교원조합 사무총장), 이현우(평양외국어대 졸업, 연세대 대학원생), 김형균 학생(고2), 박애린 학생(고3)이 ‘미래세대 교육에 있어 청년 이승만 교육의 현황 분석과 향후 방향 모색’을 주제로 토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