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호 박사의 ‘이중창’ 139] 영원한 배신자, 한동훈
정치적 기회주의의 상징이 된 그의 선택을 우리는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끝이 아니다.”
한동훈 전 대표가 윤석열 대통령 파면 결정 이후 처음으로 내놓은 메시지다. 겉으로는 지지자들을 위로하고 보수 진영의 통합을 강조하는 듯 보였지만, 그 속에 뚜렷한 자기 성찰이나 정치적 책임의 언어는 없었다. 오히려 ‘공동체’라는 말 뒤에 숨어, 정치적 책임을 외면하고 자신의 생존을 꾀하려는 보호막에 불과했다. 성찰은 없었고, 계산만 남았다.
그러나 국민은 그가 무엇을 말했는지를 기억하지 않는다. 국민은 그가 무엇을 먼저 했는지를 기억한다.
탄핵이라는 국가적 격변 앞에서 가장 먼저 윤석열 대통령과의 거리를 표시한 정치인, 한때 윤 대통령의 그림자처럼 동행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단지 기회를 잡은 정치인이 아니다. 자신을 키워준 대통령에게 가장 먼저 칼을 겨누고, 그 위기를 자신의 야망의 디딤돌로 바꾼 배신자다.
‘윤석열 키즈’의 정치적 종말
한동훈은 명백히 윤석열이라는 정치적 브랜드의 산물이었다. 검찰 시절부터 ‘윤라인’의 상징이었고, 법무부 장관으로 입각하면서 대중적 인지도와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법치의 수호자’, ‘합리적 보수의 얼굴’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한 것도 윤석열 정부의 지지 기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가 보인 배신은 단순한 관계 종료가 아니었다. 그것은 정치 생명의 뿌리를 자의로 잘라내고, 그 자리를 ‘자기 대권’이라는 나무로 심으려는 의도적 행동이었다. 문제는, 그 뿌리가 그를 살아 있게 했다는 점이다.
한국 정치에서 ‘정치적 배신’은 흔하다. 하지만 동지와 사상, 공동체 가치를 근간으로 탄생한 정치인이, 정권의 위기 앞에서 가장 먼저 외면한 사례는 드물다. 그는 사실상 보수 진영 내부에서 벌어진 정치적 반란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그의 언어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한동훈은 파면 결정 직후, “국민과 함께하겠다”, “고통을 나누자”, “비난하지 말고 함께 가자”고 말했다. 메시지는 평온하고 포용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이 말의 정치적 본질은 무엇인가?
먼저, 그가 말하는 ‘국민’은 누구인가? 윤석열 대통령을 선택한 보수 국민인가, 아니면 대선 당시 그를 반대했던 진영인가? 그가 “국민과 함께하겠다”고 말할 때, 그의 행동은 이미 보수 유권자와의 결별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고통을 나누자’는 말은 무책임하다. 탄핵 국면에서 사실상 가장 먼저 선동에 앞장섰던 그가, 뒤늦게 함께 고통을 나누자고 말하는 것은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는 기만적 수사에 불과하다. 마치 집에 불을 지르고, 불구경하는 이웃에게 “같이 울자”고 말하는 격이다.
정치는 언어의 게임이 아니라, 정체성과 선택의 총합이다. 그의 언어는 그 자신이 선택한 행동으로 인해 이미 무력화되었다. 말은 남지만, 말에 담긴 진정성은 그의 정치적 일탈이 삼켜버렸다.
보수의 내파: 배신은 내부에서 시작됐다
지금의 보수 진영은 깊은 혼란 속에 있다. 그 혼란은 외부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내부에서 시작됐고,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다. 윤석열 정부에 대한 평가와 비판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 파면이라는 국면에서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선 이가 내부 동지였다는 사실은 정치적 비극이자 조직의 도덕적 파산이다.
정치 조직은 ‘경쟁’보다 ‘의리’로 운영된다. 특히 여권은 정권의 연속성과 공동체적 결속을 통해 정당성을 유지하는 구조다. 그런데 이 신뢰의 핵심축에서 이탈한 이가 향후 대권주자로 부상한다면, 그것은 단지 인물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보수 진영의 정체성 붕괴를 의미한다.
보수는 원래 공동체의 책임, 신뢰, 질서를 중시하는 정치 철학이다. 그런 점에서 한동훈의 등장은 더 이상 보수의 미래가 아닌, 보수의 해체를 보여주는 상징일지도 모른다.
분열은 자멸이다
한동훈이 보여주는 정치적 행보는 단순한 노선 변경이 아니라, 보수 진영 내부에서 의도적으로 균열을 조장한 분열자의 역할에 가깝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 탄핵이라는 중대 국면에서 그는 자신의 측근 의원 8명이 찬성표를 행사하도록 유도한 셈이다.
이는 단순한 반윤 행위가 아니라, 친윤 세력의 몰락을 정치적으로 설계한 행위이며, 결국 이재명 당선을 위한 길을 닦아주는 정치적 계산이 있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가 윤석열을 넘어서기 위한 전략이 보수의 자해와 좌파 세력의 반사이익을 노린 것이라면, 이는 ‘배신’이라는 단어로도 부족한 정치적 배반의 정점이다. 한동훈의 존재는 이제 ‘보수의 얼굴’이 아니라, 이재명 체제 등장을 돕는 내부 조력자로서 국민 앞에 서게 되었다.
6월 3일, 정치의 방향을 묻는 날이 될 것이다
오는 6월 3일은 단지 대통령을 뽑는 날이 아니다. 어떤 정치와 어떤 가치, 어떤 인물을 믿고 다시 대한민국을 맡길 것인지에 대한 국민의 철저한 평가의 날이다.
한동훈이 출마할 수는 있다. 그러나 출마가 곧 정치적 정당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국민은 정치인을 용서할 수 있다. 실수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배신’을 잊지는 않는다. 그것도 나라가 가장 흔들릴 때, 그 틈을 기회로 삼은 정치인을 국민은 반드시 기억한다.
정치적 기회주의 시대를 넘어설 수 있는가
한동훈은 지금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한 질문에 직면해 있다.
“정치는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동지와 신뢰를 버린 정치가 과연 국민을 위할 수 있는가?”
“배신을 발판 삼은 정치인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가?”
정치는 순간의 언변이나 이미지가 아니다. 정치는 축적된 신뢰의 결과다. 한동훈은 말 잘하는 정치인일 수는 있다. 그러나 말은 정치인의 수단이지, 정치 그 자체가 아니다.
진짜 정치인은 위기 앞에서 동지를 지키고, 신념을 지킨다. 한동훈은 위기 앞에서 기회를 계산했다. 국민보다 자신의 앞날을 우선순위에 두었다.
끝으로
우리는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심판할 것이다.
정치인은 역사의 이름으로 남는다. 한동훈이 어떤 이름으로 남을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의 행보는 ‘정치적 기회주의자’이자 ‘보수 해체의 방아쇠’로 기록되고 있다.
그가 선택한 길은 그의 몫이다. 그러나 그를 선택할지 말지는 국민의 몫이다.
우리는 정치적 배신에 침묵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정치적 기회주의가 득세하지 않도록 단호하게 말해야 한다.
그가 출마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를 철저히 외면하는 것, 그것이 오늘 국민이 지켜야 할 정치적 정의다.
한동훈은 더 이상 ‘희망’이 아니라, ‘경고’다.
그리고 이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국민만이,
진짜 정치의 새 길을 열 수 있다.
최원호 박사
심리학 박사로 서울 한영신대와 고려대에서 겸임교수로 활동했습니다. <열등감을 도구로 쓰신 예수>, <열등감, 예수를 만나다>, <나는 열등한 나를 사랑한다> 등 베스트셀러 저자로 서울 중랑구 은혜제일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최원호 박사의 이중창’ 칼럼은 신앙과 심리학의 결합된 통찰력을 통해 사회, 심리, 그리고 신앙의 복잡한 문제의 해결을 추구합니다. 새로운 통찰력과 지혜로 독자 여러분들의 삶과 신앙에 깊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