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넷플릭스 영화 <계시록> (2)
박욱주 박사님의 이번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에서는 전편에 이어 넷플릭스에서 3월 21일 공개된 스릴러 영화 <계시록>을 분석합니다. <부산행>, <정이>, <지옥> 등을 연출한 연상호 감독과 <그래비티>, <로마> 등으로 유명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협업한 신작으로 배우 류준열, 신현빈, 신민재, 문주연, 한지현, 김보민, 최광일 등이 출연합니다. 이 칼럼에는 최소한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편집자 주
성범죄자 권양래 교회 방문,
신앙 아닌 여학생 납치 위해
교회, 죄인들이 오는 곳이나
어떤 죄인인지 생각해 봐야
죄인들로 이루어진 교회, 어떤 죄인들을 말하는가?
영화 <계시록>의 두 번째 쟁점으로 주목해야 할 사안은 ‘교회가 죄인(실제 범죄자)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다. 작중 소규모 개척교회 목회자 성민찬(류준열 분)은 자신의 교회에 권양래(신민재 분)가 처음 찾아오자, 그를 반갑게 맞이하며 교회 새신자로 등록할 수 있도록 힘을 쓴다. 그리고 권양래가 떠나려 할 때 그의 신발을 챙겨주다가, 권양래가 발에 전자발찌를 차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권양래는 경찰의 추적을 받는 성범죄자였던 것이다.
여기서 성민찬이 한 말이 아마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의 일반적 정서일 것이다. 성민찬은 권양래에게 “교회는… 죄인들이 오는 곳입니다”라고 진지하게 말한다. 이러한 성민찬의 태도에는 “전과자든 아니든 교회를 찾아왔다면, 최대한 의심 없이 맞이하고 환영하는 것이 교회의 책임”이라는 선의(善義) 넘치는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
이런 생각이 한국 개신교계의 지배적 정서로 굳어진 데는 여러 성경적·역사적 배경과 요인들이 존재한다. 우선 회개하고 돌아온 탕자의 비유(눅 15:11-31)나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31)”고 가르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다.
그리고 교회사 전체를 돌아보면 흉악범죄를 저질렀지만 복음을 믿어 새롭게 변화된 그리스도인들의 사례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의 찬송시를 지은 존 뉴턴(John Newton, 1725-1807) 목사가 대표적이다. 포악한 노예상이었던 그는 노예제의 참혹함과 자신의 허물어진 영적 상태를 돌아보고 죄과를 뉘우쳐, 성공회 목사로서 죽을 때까지 노예제 폐지를 위해 힘썼다.
문학작품과 대중문화 또한 교회가 전과자, 범죄자들을 환영하고 돌봐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가장 대표적 사례가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 1862)이다. 주인공 장발장의 도둑질을 눈감아주고 그의 회심을 이끌어낸 미리엘 주교는 오늘날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회를 막론하고 모든 기독교 신앙인들에게 용서하는 그리스도인의 표본처럼 여겨진다.
여기 언급한 사례들만 놓고 보면, 교회는 어떤 범죄자든 그 사람이 그리스도께 나아올 때 일단 마음을 열고 환영하는 자세를 보여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교회가 이처럼 범죄자들에게 무방비한 태도를 보일 때 간혹 교회 신자들이 커다란 정신적·신체적 피해를 입는 경우가 발생한다.
영화 <계시록> 역시 그런 사례를 중심으로 서사를 진행한다. 성범죄자 권양래가 성민찬의 교회에 방문한 것은 신앙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에 출석하는 여학생을 납치해서 학대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범행으로 말미암아 성민찬과 권양래, 그리고 납치된 여학생과 그 가족들의 삶은 모두 손을 대기 힘들 만큼 비틀어진다. 성민찬은 목회자로서 통상적 교회의 정서를 따라 아무 문제없이 행동했는데,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그리스도 앞에 나아오는 이들이라면 그들이 범죄자라 하더라도 한없이 관대하게 대해야 한다는 오늘날 기독교계의 정서는 한 가지 잘못된 성경 해석에서 유래된 것이다. 성민찬이 권양래에게 한 말, “교회는 죄인들이 오는 곳입니다”라는 말은 그 자체로서는 틀린 점이 없는 기독교적 명제다.
문제는 이 신앙의 명제를 구성하는 세부적 개념 정의에 있다. 여기서 ‘죄인’이라는 말의 개념정립 방식이 문제가 된다. 죄인이라는 말은 여러 양태의 인간 군상을 포함하고 있다.
과거 실제로 죄를 지은 자들, 지금 혹은 장래에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는 죄성을 가진 자들,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죄인과 법적 관점에서의 죄인, 지은 죄에 대한 후회와 탄식을 가득 품은 자들 혹은 자신이 죄를 지은 탓을 남에게 돌리는 이들까지,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수많은 양태의 죄를 지은 인간 군상이 다 죄인이다. 대체 이 가운데 어떤 죄인이 교회가 환대해야 할 죄인인가?
양적 확장 잘못된 번영신학 경도
거짓 형제 가려낼 장치 못 갖춰
선량한 신앙생활 하려는 교인들
거짓 죄인들로부터 보호해내야
환영할 만한 죄인과 수긍하지 못할 죄인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이러한 고민의 답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가운데 환대하신 죄인들은 모두 자기 죄에 커다란 가책을 느끼고 죄 사함을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던 이들이었다. 당연히 자신이 과거 지었던 죄를 다시 짓는 데 괴로움과 절망감을 느끼는 이들이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부르시는 죄인들은 죄인 전체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전체집합 가운데 매우 적은 부분을 차지한다. 미국 저명 기독교 윤리학자 스탠리 그렌츠(Stanley James Grenz, 1950-2005)는 저서 <환영과 거절 사이에서>(Welcoming but not Affirming, 1998)에서 교회가 환영할 수 있는 죄인과 수긍할 수 없는 죄인을 구분해 설명한다.
그렌츠에 의하면, 교회는 죄인들로 구성된 공동체다. 그렇지만 여기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구속받은(redeemed)” 죄인들의 공동체라는 점이다. “교회는 죄로 인해 무너진 삶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이들의 공동체이고, 오직 그렇게 죄를 극복하며 하나님께 복종하는 이들만 도울 수 있다.”
그렌츠의 통찰을 따르자면, <계시록>의 권양래는 수긍할 수 없는 죄인이다. 그는 죄를 회개하고 버리기 위해 교회에 온 것이 아니라, 죄를 다시 저지르기 위해 교회를 찾아왔다. 당연히 교회에서 절대 환영할 수 없는 인물이다.
죄인 혹은 실제 범죄자의 교회 가입에 대한 환대와 경계심의 교차는 단지 그렌츠뿐 아니라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고민해온 사안이다. 사도들이 목회하던 초대교회는 이 점에 있어 엄격한 기준을 갖고 있었다.
유대인들의 박해, 로마 제국 권력자들의 박해에 노출된 당시 기독교회는 교회에 아무나 가입시키지 않았다. 새로 교회를 찾아온 이들의 신앙심을 엄밀하게 확인하는 기간을 거쳤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 교회에 가입한 이들이 박해나 환란 앞에서 쉽사리 교회를 배반하고 교인 전체를 위험에 빠지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되고 나서는 이 전통이 상당 부분 사라졌다. 기독교회는 공인됐고, 황제의 지지를 받게 됐다. 이에 교세는 급속도로 커졌고, “거짓 형제(갈 2:4)”의 위험에서도 벗어났다. 일반인들이 교회의 눈치를 봐야 하는 세상이 왔으니, 당연히 ‘수긍하지 못할’ 죄인들조차 교회에 대해서는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다.
환영할 죄인과 수긍 못할 죄인을 구별하는 전통은 종교개혁기에 이르러 되살아났다. 갓 설립된 개신교회는 수많은 위협에 처해 있었다. 외부로부터 오는 위협(가톨릭 교회와 가톨릭 군주들)과 함께 내부적 위협(개혁의 시기를 틈타 새로운 교리로 분열을 일으키는 이들)에도 대처해야 했다.
그래서 이 시기 개신교회들을 보면, 교회에 새로운 신자가 가입할 때 철저한 검증(며칠에 걸친 신앙상담과 일정 기간의 신앙생활 관찰)을 거쳤고, 목회자가 부적합하다고 판단하면 그 교회 신자가 될 수 없었다.
이런 검증 과정은 같은 개신교인들에게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종교개혁에 찬동하는 개신교 신자라도 신앙 내용이 크게 다르거나 신앙 열의가 떨어지는 이들에 대해서는 교회 가입을 불허했다.
이런 교회 전통은 1730년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가 감리교 운동을 시작하면서 다시 크게 약화된다. 구원의 은혜를 받는 데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갖는 역할에 무게중심을 두었던 웨슬리의 전도 사역은 많은 이들이 죄인임을 자백하고 충실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끌었다. 그러면서 교회의 문호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활짝 개방되었다.
영국에서 크게 확산된 웨슬리의 부흥주의 사역전통은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와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를 통해 제1차 대각성운동이라는 형태로 미국 전역의 교회들에 전파됐다.
그 결과 미국 회중교회나 침례교회에서도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에 대한 환대가 교회가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졌다. 이 부흥주의 전통 아래 성장한 19세기 북미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한국 개신교회 역시 개방적 교회 전통을 이어받았다.
회개하고 신앙으로 살고자 하는 죄인을 환대하는 정서 그 자체는 사실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이 정서를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목회자들과 이를 악용해 교회의 틈을 노리는 범죄자다.
영화 <계시록>에 등장한 성범죄자 권양래는 다소 극단적 사례다. 하지만 실제 목회 현장에서 교회의 자본이나 인맥 등을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회개하려는 죄인이 아니라 그저 죄인 그 자체로서 교회에 접근하는 이들의 사례는 적지 않다.
교인들의 선의를 이용해 대규모 사기를 친 사기범도 있고, 신앙에는 아무 관심 없이 그저 결혼이나 연애를 목적으로 교회를 찾아오는 이들도 있다. 교회 인맥을 이용해 사업이나 정치활동에 도움을 얻으려는 이들도 있다. 이들 모두는 교회가 환영해야 할, 주님께서 부르시는 죄인의 무리에 포함되지 않는다.
한국 개신교회는 북미 선교사들을 통해 자리잡은 부흥주의 전통을 따르는 동시에, 교세의 양적 확장을 목회의 절대적 성공 기준으로 삼는 잘못된 번영신학에 경도돼 거짓 죄인, 거짓 형제를 가려낼 최소한의 장치와 분별력을 갖추지 못했다.
부흥주의 전통은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믿음을 가질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귀한 전통이지만, 교세 확장에만 몰두하는 번영신학의 잘못된 가르침이 이 부흥주의 전통을 악용하는 이들마저 교회로 쉽게 들어오게 만들었다.
<계시록>의 연상호 감독은 한국 개신교회가 가진 이 세밀한 약점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목회자라면, 적어도 선량하게 신앙생활을 하려는 교인들을 거짓 형제와 거짓 죄인들로부터 보호하고 지키는 역할을 제대로 해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 감독이 전하는 질책의 메시지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 말라
무조건적 용서와 포용 강조 아냐
회개 의향 없는 죄인, 환대 안 돼
죄인, 피해자에 진정으로 참회를
우리 한국교회가 이 메시지를 귀담아 듣기를 바란다. 교회는 죄인을 환대하지만, 죄를 수긍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격언과 일맥상통한다. 원래 이 격언은 어거스틴 서신 211번에서 나온 말로, “인류에 대한 사랑과 죄에 대한 미움을 담아(Cum dilectione hominum et odio vitiorum)”라는 문구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말은 ‘죄인에 대한 무조건적 용서와 포용’을 강조하는 것으로 자주 해석된다. 하지만 이는 심각한 오해다. 교회 입장에서 죄는 미워하고 경계해야 할 대상이며, 이 죄를 신앙으로 해결할 의지가 없는 자 역시 경계의 대상이다.
어거스틴 역시 진심으로 회개할 의향이 없는 죄인은 교회가 환대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같은 맥락으로 영화 <넘버 3>(1997)에서 마동팔 검사(최민식 분)가 흉악한 범죄자들을 두고 한 말, “죄를 지은 새끼가 나쁜 새끼지 죄는 아무런 죄가 없다”는 주장은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다.
영화 <계시록>이 묘사하는 교회와 죄인의 긴장관계는 비록 영화적 과장과 비약이 담겨 있기는 하지만, 교회가 범죄자에 대해(혹은 범죄 의향을 가진 자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고 대해야 할지, 어떠한 때 죄인에 대한 용서와 환대가 가능한지 깊이 생각해 보게 만든다.
그리스도께서 찾으시는 죄인은 자기 죄의 무게를 깨닫고 거기서 절망과 고통을 느끼며 피해자에게 진정성 있는 참회를 하기 위해 힘을 다하는 자다. 이로부터 벗어난 모든 죄인, 범죄자에 대해 교회는 함부로 무장해제를 해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이 저지른 범죄의 이력을 되짚어보며 논평을 마치려 한다. 작중 장발장은 본래 가난하지만 가족을 힘써 부양하려 한 선량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기 사회적 혼란과 경제불황 속에 극심한 가난을 못 이겨 누님과 7명의 조카를 먹이려고 빵집에 침입해 몇 개의 빵을 훔쳤다. 그는 이 일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그 후 밀렵 행적이 추가로 드러나고(이것 역시 가난 때문에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행한 불법 사냥이었다), 형벌의 부당함에 대한 분노와 가족의 안부에 대한 걱정으로 몇 차례 탈옥을 시도한 것이 19년의 수감생활로 이어졌다.
애초 장발장이라는 인간 자체가 남을 희생시켜 자기 탐욕과 쾌락을 채우려 했던 자가 아니다. 그런 삶을 살아온 사람이기에 미리엘 주교의 도움에 감화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우리는 추측해볼 수 있다.
장발장의 삶의 이력은 교회가 환대할 수 있는 죄인의 최소 자격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욕심과 쾌락을 추구하려 타인에게 고통을 주거나 도덕적 규범을 어기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보여야, 교회에 가입할 수 있는 죄인의 자격을 얻을 수 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이들을 효과적으로 분별할 수 있도록 공의와 선의지가 확립된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데 힘써야 한다.
박욱주 박사
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객원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 좁은문은혜교회에서 목회자로 섬기면서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 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