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창립 및 제중원 개원 14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
연세대학교 창립 140주년 및 제중원 개원 14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이 4월 8일 오전 연세의료원 종합관 331호에서 진행됐다.
‘제중원과 한국 기독교의료 140년’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세미나는 총 4부로 나뉘어, 여인석 교수(연세대)의 사회로 기조강연에 이어 9개의 발제가 진행됐다.
특히 ‘한국 기독교의료의 기원과 발전’이라는 주제로 발제한 여인석 교수는 “병원은 기독교 의료의 핵심이었을 뿐 아니라 예수의 치유 활동이 지상에서 그의 사역의 핵심적인 부분이었다는 점에서 곧 기독교적 가치의 구체적으로 실현된 형태였다”며 “19세기 들어와 기독교 선교가 활발히 이뤄졌다. 선교는 기독교 교리만이 아닌 서구적 가치관과 지식, 특히 과학을 전파하는 계기가 됐다. 이를 위해 학교와 병원의 설립이 선교활동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게 됐다”고 했다.
여 교수는 “개항과 함께 서양 문물 도입에 대한 필요성이 커지고 있을 무렵인 1884년 12월, 최초의 선교의사로 한국에 온 알렌은 갑신정변에서 심하게 부상을 입은 당시 실력자 민영익을 살려냈고, 이것을 계기로 서양의학의 효과는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다. 그 결과 1885년 4월 10일 알렌의 건의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이 서울 제동에 세워졌다. 이후 광혜원은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왕실에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들을 진료하는 기관으로 성장했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에서 가장 먼저 의료사업을 시작한 미국 북장로회는 서울 제중원(1885)을 기지로 의료사업을 확장했고, 이어 부산, 평양, 대구, 선천, 재령, 청주, 강계, 안동 등지에 진료소 및 병원을 설치했다. 북감리회는 서울에 시병원과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성병원인 보구녀관을 설치했고, 이어 평양에 기홀병원과 광혜여원을 설립하고 원산과 공주에서도 의료사업을 시작했다. 미국 남감리회는 개성과 원산, 호주 장로회는 부산과 진주에 병원을 설립했다. 캐나다 장로회는 원산, 성진, 함흥, 용정에 병원을 설립해 운영했다. 1900년대에는 전국 13개 지역에 22개, 1903년에는 15개 지역에 20개,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에는 25개 지역에 29개 기독교 병원과 진료소가 있었다.
제중원이 성공적으로 운영되자 알렌은 한국 내 의료진 양성을 위해 의학교육을 추진했고, 이에 고종은 제중원 북쪽에 위치한 가옥을 구입해 학교 건물로 사용하게 했다. 1886년 3월 29일 선발된 16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의학교육이 실시됐으나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못하다, 1893년 7월 새로 부임한 에비슨은 제중원의 정상화를 위해 운영권을 미북장로교 선교부로 넘길 것을 제안했고, 이것이 갑오개혁 때 받아들여졌다. 에비슨은 보다 나은 시설이 갖춰진 병원 설립 기금 10,000만 달러를 기부받아 1904년 남대문 밖 복숭아골(현 서울역 맞은편 세브란스 빌딩 자리)에 병원을 세웠다. 1908년 제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했고, 이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면허를 부여받았다.
여 교수는 “일제 식민지배가 시작되면서 기독교 의료기관은 결핵·나병환자 치료시설을 운영하고, 부인과 영유아, 농맹아 등 장애아에 대한 의료사업을 펼치는 등, 총독부의 의료정책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취약한 이들을 돌봤다. 기독교 의료는 식민지 의료의 사각지대를 보듬으며 존재 이유를 증명해 왔고, 이러한 역할은 해방 이후에도 지속된다”고 했다.
그는 “사회적 지원이 부족하던 시기에 기독교 병원은 한국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의료적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현재 국가나 대기업의 충분한 지원을 받는 대형 병원들이 각축하는 한국의 의료 상황에서, 기독교 의료기관이 병원으로서 우수성을 유지하면서도 정체성에 부합한 의료활동을 펼치기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의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또 지구상에는 열악한 의료환경을 가진 국가들이 적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기독교 의료는 이제 한국 사회를 넘어 국제적으로 많은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고 할 것”이라고 했다.
‘각지 선교병원에서 활동한 세브란스 졸업생’이라는 주제로 발제를 맡은 김영수 교수(연세대)는 “각지에서 선교병원과 관립병원이 경쟁과 협력관계에 있던 시기, 세브란스 졸업생 중 선교병원에서 근무한 인물들을 파악하고 선교병원과 세브란스의전과의 상관관계를 확인한 결과, 졸업생 절반 이상이 의료계와 선교계의 추천이었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선교부가 운영하는 의학교였기 때문에 의료계와 선교계의 추천이 많았다는 점은 예상 가능한 결과이지만, 한편 절반 정도는 관련자의 추천이 없었다는 점도 흥미롭게 볼 지점”이라며 “이를 바탕으로 세브란스 졸업생이 졸업 후 선교병원에 근무하는 비율이 어느 정도 되는지 다루어 보았다. 관립의학교 졸업생과 마찬가지로 관립의료기관에 근무할 수 있는 여건은 아니었기 때문에 선교병원은 개업을 하지 않는 한 세브란스 졸업생이 우선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선교병원이 한국인 의사 인력을 확충하려는 노력과도 결부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부 졸업생은 선교병원을 당시 시행하고 있던 임상 교육 수련을 위한 장으로 활용했을 것으로 보이나, 상당수는 선교병원의 추천을 받았던 인물이 졸업 후에 다시 선교병원에서 사역하는 형태였다. 다만 그러한 경우에도 선교병원에 오래 근무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선교병원의 운영 상황과 인턴제도의 시행, 의사면허자들이 증가하는 가운데 바로 개업하기 어려웠던 사정 등 당시 선교계와 의료계의 현실과도 맞물린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세브란스 졸업생은 선교병원의 운영이 지속되는 한 꽤 오랜 기간 동일한 선교병원에서 중요한 인력으로 참여하며 지역 주민의 건강을 돌보고 연구에 힘썼다”고 했다.
한편 세미나에 앞서 최재형 연세대 의과대학장이 개회사, 금기창 연세대학교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과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 축사를 각각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