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스파이, 암살자’ 본회퍼의 히틀러 암살 가담, 성경적으로 문제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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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본회퍼: 목사.스파이.암살자> (1)

이번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에서는 지난 4월 9일 개봉한 영화 <본회퍼: 목사.스파이.암살자>를 다룹니다. 이 영화는 시나리오 및 감독 토드 코라르니키(Todd Komarnicki), 등장인물은 디트리히 본회퍼 역 요나스 다슬러(Jonas Dassler), 마르틴 니묄러 역 아우구스트 딜(August Diehl), 카를 본회퍼 역 모리츠 블라이브트로이(Moritz Bleibtreu), 파울라 본회퍼 역 나딘 하이덴라이히(Nadine Heidenreich) 등 독일 배우들이 맡았습니다. -편집자 주

▲영화 &lt;본회퍼: 목사.스파이.암살자&gt;는 반나치 저항단체 &lsquo;검은 오케스트라&rsquo;에 소속되어 활동했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생애에 관한 작품이다.

▲영화 <본회퍼: 목사.스파이.암살자>는 반나치 저항단체 ‘검은 오케스트라’에 소속되어 활동했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생애에 관한 작품이다.

20대 중반부터 촉망받던 신학자
독일 교계 내 반나치 투쟁 기수
평화주의 고수하다 비폭력 포기
본회퍼 가문, 대부분 암살 동조
윤리적 숭고함, 기독교 선인가?
초대교회 성도들은 폭력 거부해

목사로서의 본회퍼: 반나치 비폭력 저항활동 시기

지난 4월 9일 개봉한 영화 <본회퍼: 목사.스파이.암살자>는 나치 치하 독일에서 반나치 투쟁에 뛰어들었다가 나치 패망 한 달 전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목사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다. 미국에서는 작년 11월 22일 개봉했고, 한국에서는 약 넉 달이 지나 본회퍼 목사가 세상을 떠난 지 정확히 80주년 되는 날 개봉했다.

본회퍼 목사는 원래 기독교 윤리 영역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저명한 목회자이자 신학자인데, 국내에서는 “미친 자가 잡은 운전대” 발언 때문에 일반 대중에게까지 널리 알려졌다. 본회퍼는 생전 다음과 같이 말한 적 있다.

“미친 자가 차 운전대를 잡고 무고한 사람들에게 돌진하는 것을 내가 옆좌석에서 본다면,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참상이 일어나는 것을 그저 지켜보는 데 그치는 방관자가 될 수 없다. 다친 자들을 돌보며 죽은 이들을 장사지내는 역할만 할 수는 없다. 비극이 일어나기 전에, 나는 그 미친 자에게서 운전대를 빼앗아와야 한다.”

이 말은 본회퍼가 직접 글로 남긴 적 없으나, 본회퍼의 형수인 에미 본회퍼가 직접 그에게 들은 말을 훗날 회고한 것이다. 에미 본회퍼는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형 클라우스 본회퍼의 아내였으며, 클라우스 본회퍼는 디트리히 본회퍼와 함께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가 마찬가지로 1945년 4월 수용소에서 사형을 당했다.

<본회퍼: 목사.스파이.암살자>는 본회퍼의 미국 유니언신학교 시절에 대해 묘사하고, 그 뒤 독일로 귀국해 벌인 투쟁활동을 비교적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통상 본회퍼에 대해 어렴풋이 아는 이들은 그가 히틀러 암살 시도에 가담한 인물이라는 것 외에, 그의 삶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이미 20대 중반부터 독일 신학계에서 촉망받는 신학자였으며,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1932년 이후 나치 반유대주의와 파시즘에 저항하는 고백교회를 주도하는 주요 인물 중 하나로 두각을 드러냈다. 미국에서는 그의 학문적 명성과 반나치 투쟁에 감명받은 이들이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 그를 미국에 피신시키려 노력할 정도로, 기독교계에서 그에게 보인 관심과 기대는 컸다.

이처럼 히틀러 암살과 쿠데타 계획 가담 이전부터 본회퍼는 독일 기독교계 내부에서 반나치 투쟁의 기수에 섰던 인물이다. 1938년 이전까지 본회퍼의 투쟁은 기본적으로 평화주의적이었다. 그는 20대 초반부터 이미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투쟁을 매우 높게 평가해, 직접 간디를 만나러 인도에 갈 계획까지 갖고 있었다.

이렇게 평화주의 투쟁을 고수하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인 1938년부터 폭력 수단 사용에 동조해 히틀러 축출을 위한 쿠데타 세력 ‘검은 오케스트라’ 멤버가 됐다. 자신이 고수하던 기독교적 양심과 비폭력주의적 신념을 끝내 포기한 것이다. 그에게는 대체 어떤 심경 변화가 있었을까?

▲미국 유니온 신학교 유학 시절 본회퍼.

▲미국 유니온 신학교 유학 시절 본회퍼.

스파이-암살자로서의 본회퍼: 히틀러 암살과 쿠데타 계획 가담 시기

“미친 자가 잡은 운전대”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듯, 본회퍼는 더 많은 독일인들과 유대인들을 살리고 싶은 마음 때문에 평화주의와 비폭력주의를 포기했다. 여기에는 본회퍼 주변 인물들의 동태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본회퍼 가문 전체가 직·간접적으로 히틀러 축출 혹은 암살에 동조하고 있었다.

본회퍼 자신과 형 클라우스 본회퍼, 그리고 매형인 뤼디거 슐라이허와 한스 폰 도나니 모두가 루드비히 베크 장군과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이 이끌던 검은 오케스트라에 가담한 상태였다. 그리고 1943년 3월 7일 히틀러 전용기 폭파 시도, 3월 16일 군사 박물관 폭파 시도에 적극 가담했다. 본회퍼는 유대인 구출, 여타 반나치 저항세력 규합, 영국 정부와의 비밀 협상 임무를 맡았다. 매형인 폰 도나니는 폭탄 준비, 운반, 설치에 가담했다.

이 두 건의 암살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본회퍼는 매형인 폰 도나니와 함께 1943년 4월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돼 감옥에 갇혔다. 이때까지만 해도 본회퍼와 폰 도나니가 받은 혐의는 히틀러 암살 시도에 대한 건이 아니었다. 본회퍼와 그의 매형은 유대인들을 중립국 스위스로 빼돌린 것, 그리고 외국 교회 지도자들을 만나 반나치 투쟁을 전개한 것 때문에 기소됐다.

미리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두 사람은 1944년 7월 ‘발키리 작전’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계획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본회퍼는 이번에야말로 암살 계획이 성공해 나치 정권이 전복되고 전쟁이 멈추며 자신을 비롯한 저항 세력 인사들이 풀려날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거사는 이번에도 실패로 돌아갔다.

▲1944년 발키리 작전의 암살시도 현장. 히틀러는 경상을 입는 데 그쳤고, 대대적인 체포, 심문, 그리고 처형이 뒤따랐다.

▲1944년 발키리 작전의 암살시도 현장. 히틀러는 경상을 입는 데 그쳤고, 대대적인 체포, 심문, 그리고 처형이 뒤따랐다.

저항세력이 설치한 폭탄은 히틀러를 죽일 만큼 강하지 못했다. 히틀러는 경상을 입는 데 그쳤고, 곧 대대적인 수색, 검거, 심문, 그리고 처형이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본회퍼와 폰 도나니를 비롯한 본회퍼 가문 남성들 여럿이 발키리 작전을 시도한 검은 오케스트라 주력 멤버들이었음이 밝혀졌다.

이후 본회퍼는 영화에도 잘 묘사되었듯 매우 고통스러운 처지에 놓였다. 계속되는 취조와 심문, 그리고 옥중 저술활동이 이어졌다. 1945년 2월에는 독일 패망이 거의 임박한 상황이라 독일 영토 전역이 연합군 폭격에 노출돼 있었다. 본회퍼가 있던 형무소도 폭격으로 거의 무너질 뻔했다. 사형 집행 전 폭격으로 죽을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이로 인해 그는 여러 차례 다른 수용소로 이송됐다.

그리고 마침내 1945년 4월 9일, 본회퍼의 사형 집행이 이루어졌다. 영화에서는 이 교수형 장면에서 밧줄로 만들어진 매듭을 보여주는데, 이는 순화된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 히틀러는 자신을 암살하려던 저항세력 멤버들의 처형에 밧줄이 아닌 철사를 쓰도록 명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것은 사형에 처해진 이들에게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최대한의 고통을 안겨주기 위한 악의적 조치였다.

이렇게 본회퍼는 비폭력주의 반나치 저항을 포기한 대가로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 오늘날 한국 신학계를 포함한 세계 신학계 전반이 이 죽음을 본회퍼의 숭고한 기독교적 양심의 증표로 바라본다. 그래서 그가 쿠데타를 꾀하는 레지스탕스 활동에 가담한 것을 거의 문제 삼지 않는다.

▲영화 속 옥중에서 집필 중인 본회퍼.

▲영화 속 옥중에서 집필 중인 본회퍼.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본회퍼의 방법이 기독교적으로 정당한 것이었는지. 그가 자신의 비폭력주의를 끝내 포기하면서까지 많은 선량한 이들을 살리려 한 점은 ‘윤리학적으로’ 봤을 때 분명 높게 평가받을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적으로’ 봤을 때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로마 제국 시절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폭군 네로를 포함한 여러 로마 황제들의 비정하고 부도덕한 압제에도 불구하고, 폭력혁명이나 쿠데타를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6:52)”는 주의 말씀을 순전하게 믿었기 때문이다. <계속>

박욱주 박사

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객원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 좁은문은혜교회에서 목회자로 섬기면서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박욱주 교수.

▲박욱주 교수.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 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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