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 사건으로 신앙운동의 기치를 올리다

류재광 기자  jgryoo@chtoday.co.kr   |  

[프랑스 종교 개혁 발자취 3] 프랑스 최초 교회인 모(Meaux)

▲파리에 이어 브리소네 주교가 개혁을 시도했던 모 성당.

▲파리에 이어 브리소네 주교가 개혁을 시도했던 모 성당.

생 제르망 데 프레 성당의 수도원장으로 개혁을 시도하던 브리소네(Briconnet)는 1518년 모(Meaux) 성당 주교로 옮겨가자, 지금까지 개혁 운동을 함께 한 르페브르를 그의 보좌 신부로 임명하고 자신의 주교구에서 극심한 부패를 일소하려고 힘썼다.

이런 노력으로 인문주의적 종교개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1520년부터 이 도시로 많이 모여들게 된다. 이들은 독일의 종교개혁과는 달리 로마 교회와의 단절은 추구하지 않고, 단지 고전 연구와 원어 연구를 기반으로 성직자들의 지적 수준을 향상시키고 확대시킴으로 장기적으로는 교회 내 비리 척결을 통해 교회 개혁운동을 시도하게 되는데, 이들을 ‘모(Meaux) 그룹’이라 한다. 이 모 그룹에 속한 사람 가운데 르페브르, 그리고 깔뱅(칼빈)을 제네바로 초청하는 등 그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쳤던 기욤 파렐(Guillaume Farel)이 이 도시에서 크게 활약하게 된다.

그러나 프랑스의 개혁주의 운동에 대한 강력한 역풍이 불게 되는데, 최초의 프랑스 루터주의자 쟝 발리에르(Jean Vallière)가 1523년 8월 8일 산 채로 화형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부터였다. 이 소식을 접한 브리소네는 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으며, 개혁주의적 성향을 가진 친구들이 더 이상 자신의 교구에서 설교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브리소네는 지역 공의회(synod)를 소집하여 루터의 저작들을 정죄하였고, 연옥과 성인 숭배, 마리아 숭배 등을 비판하는 설교를 하는 사제들을 책망하였다. 하지만 기욤 파렐은 아랑곳하지 않고 복음주의 설교를 계속하였다.

모 그룹의 인문주의적인 개혁운동은 점차 급진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개혁 사상들을 접하면서 많은 이들이 로마 천주교회의 미신적인 예배와 폭정에 대하여 급진적으로 개혁할 것을 촉구하게 된다. 개혁에 대한 요구가 거세게 일어나자, 프랑스 왕실은 1525년부터 개혁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고, 브리소네는 소르본느에서 종교재판에 회부된 후, 프랑수와 1세에 의해 투옥된다. 이런 일들이 발생하자 르페브르와 그의 제자들은 스트라스부르그로 피신하게 된다.

▲1546년 프랑스 최초의 개혁교회로 세워졌던 모 교회.

▲1546년 프랑스 최초의 개혁교회로 세워졌던 모 교회.

지금까지 모 그룹에 관대하였던 프랑수와 1세는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스페인군에 패배하면서 포로가 되는 굴욕을 겪게 된다. 이후 왕은 통치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성직자들의 강한 힘에 눌려 그들의 요구대로 개혁자들을 탄압해야만 했다.

당시 성직자들은 교회의 부패를 지적하는 개혁자들로 인해 위기에 몰려 있었고, 왕은 포로로 실추된 자신의 위신과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성직자들의 강력한 힘을 필요로 했기에 자연스럽게 서로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국가의 기강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국민적 통합을 이루어져야 하고, 그 우선적인 일은 종교적 통일이라고 주장하며 개혁자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이러한 정치적 파동으로 파렐마저 바젤로 피신함으로, 모에서 시작된 개혁운동은 1525년에 완전히 붕괴된다. 바른 신앙의 회복을 위해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던 르페브르의 신약 성경도 불태워짐과 동시에 많은 개혁자들이 핍박과 함께 화형을 당한다.

그러나 이런 왕정의 분위기와는 달리 1530년대에 접어들면서 개신교의 수가 늘어나며 개혁에 대한 더 과격한 주장들이 나타난다. 개혁을 촉구하는 시위는 1534년 10월에 절정을 이루게 되는데 이것이 일명 벽보 사건이다. 이들은 공공의 장소에 벽보를 붙이며 시위하였고, 궁에 있는 왕의 침실에 들어가 개혁을 요구하고 가는 일까지 생겼다. 이 일로 수백 명의 개혁자들이 투옥되었고, 35명이 화형에 처해졌다. 깔뱅은 이 일 이전까지는 국내 다른 지방으로 피신하였지만, 벽보 사건 이후 스트라스부르그를 거쳐 스위스로 피신하게 된다.

박해와 국제사회의 비난이 있었고 1536년에 왕은 잠시 개혁자들에 대한 완화 정책을 펼치게 된다. 얼마 전 파비야 전투의 패배로 수치를 겪게 했던 신성 로마제국 카를 5세와 다시 전쟁하기 위해서는, 루터파 제후들과 위그노에 대해 호의를 베푸는 영국 왕 헨리 8세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1535년 7월 16일 ‘꾸시 칙령( l'édit de Coucy)’을 만들어 탄압을 중지하고, 망명자들의 귀환을 허용하는 관용 정책을 일시 펼치게 되는 1536년에서 1538년까지는 박해가 없었다. 이처럼 위그노들은 항상 왕의 권력을 위한 협상의 도구로만 이용되었기에 아무도 로마 교회로 돌아가지 않았고, 오히려 개혁주의자들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결국 1540년 개혁주의자들을 재판하고 처형하는 법적인 장치를 마련하고,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모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비밀리에 모임을 갖다가 20년이 지난 1546년에 그들이 간직하였던 복음의 불씨를 모아 프랑스에서 최초의 개혁교회를 세우게 된다.

▲모 교회가 Etienne Mangin의 집에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간판. 1546년 14명의 순교 사실도 기록돼 있다.

▲모 교회가 Etienne Mangin의 집에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간판. 1546년 14명의 순교 사실도 기록돼 있다.

모 교회는 깔뱅이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세운 위그노 교회를 그 모델로 하고 있다. 1546년 순교와 함께 교회 문을 닫은 후 프랑스에서는 1555년이 지나서야 파리(Paris), 엉제(Angers), 발랭스(Valence)에 교회가 세워진다.

모 교회가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것은 브리소네와 르페브르, 기욤 파렐 등이 이룬 개혁의 기틀은 핍박으로 완전 중단된 것처럼 보였으나, 남은 신자들은 환경에 낙망하지 않고 요한 깔뱅의 가르침을 기초로 핍박 가운데 프랑스 최초의 교회를 1546년에 세운다는 것이다.

사역자 삐에르 르 끌렉(Pierre Le clerc)을 중심으로 그 도시의 부유한 에티엔 멍정(Etienne Mangin)이 제공한 장소에서 예배의 모임을 갖게 된다. 이 교회에는 모 뿐 아니라 주변 Nanteuil -les -Meaux, Quincy, Mareuil, Fublaines 도시에서 4백여명의 성도들이 모인다.

교회가 세워지고 얼마 있지 않아 왕국은 예배 드리던 성도 가운데 남자 41명, 여자 19명 합 60여명을 체포하고, 그들 중 14명은 파리로 잡아갔다가 하나의 수레에 이들 모두를 싣고 와서는 교회 바로 앞에 있는 시장 광장에서 산 채로 화형시킨다. 그 중에는 사역자 르 끌렉과 예배 처소를 제공한 멍정도 포함돼 있었다. 그 후 교회는 폐쇄된다.

이 사건이 일반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다가 1985년에 과거 교회당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에 돌로 된 안내판을 달면서 알려지게 된다. 삐에르 르 끌렉은 역사 기록에는 단지 사역자로 기록되어 있지만 모 교회 역사책에는 그가 목사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목사로서는 최초의 순교자가 된다.

삐에르 르끌렉의 어머니와 형에 대한, 숨을 멎게 할 정도로 놀라운 기록이 있다. 1525년 모에서 쟝 르끌렉(Jean Lecler 삐에르 르끌렉의 형제)가 3일을 계속 매질 당하는 형을 받게 되었고, 매를 맞던 그의 온몸이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런데 그 장면을 보고 있던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큰 소리를 내어 기도했다. “그에게 용기를 주소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시여”.

쟝은 그후에 메쯔(Metz)에서 산 채로 화형을 당한다. 21년 후 형제 삐에르 르끌렉도 모에서 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하다가 적발되어 산 채로 화형을 당하므로, 형제 둘이 순교자가 된 집안이다. 도대체 그의 어머니는 어떤 신앙을 가졌기에 피투성이의 아들을 보고 후회나 원망을 하지 않고 그런 기도를 할 수 있었을까.

개혁자들의 도피와 1534년 브리소네의 사망 후 모에서의 개혁운동은 잠시 멈춘 것 같았고, 거기에다 순교 사건으로 복음의 능력은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였지만, 14명의 순교 이후에 놀라운 사건이 벌어진다. 목회자를 비롯한 지도자들이 순교를 당하고, 교회당은 권력의 힘으로 인해 비록 문은 폐쇄되지만, 복음을 갈구하는 그들의 신앙의 문은 닫을 수 없었다. 순교 사건 이후 더 엄청난 신앙 운동이 일어나는데, 교인들은 핍박을 피해 오흘레앙으로 옮겨 가 그곳에서 전도자가 되어 종교 개혁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모 교회의 바로 앞 광장이 바로 당시의 순교지이다.

▲모 교회의 바로 앞 광장이 바로 당시의 순교지이다.

사도행전 8장에 스데반 집사의 순교와 큰 박해로 교인들은 다 흩어지지만 이는 그들이 체험한 복음을 가는 곳마다 전하는 기회가 된 것처럼, 모 교회 성도들 역시 박해로 떠나야 했으나 복음의 불씨를 옮기면서 프랑스 전역에 복음의 불을 피우는 계기가 되었다.

십자가는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더하기 표시가 되어 교인들을 더하게 하지만, 세상 권력이 그 십자가를 무시하고 발로 차게 되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곱하기가 되어 더 큰 힘을 발휘하게 한다.

1848년이 되고서야 처음 건물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새로운 교회당을 세우게 된다. 이 교회당에는 14명의 순교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 교회당 앞에는 1517년 개혁 시대에서 시작되고 최초로 세워진 교회를 그 뿌리로 두고 있다는 안내가 있다.

▲1848년 최초 교회 건물 인근에 세워진 새로운 교회당.

▲1848년 최초 교회 건물 인근에 세워진 새로운 교회당.

▲현재 모 교회의 예배 모습. 안타깝게도 종교 개혁 당시의 뜨거움은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다.

▲현재 모 교회의 예배 모습. 안타깝게도 종교 개혁 당시의 뜨거움은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다.

▲모 교회 예배당 뒤쪽 양편에 두 개의 돌판으로 순교자의 이름이 기록된 두 돌판이 있다.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계 21:14)는 말씀을 연상하게 하듯 순교로써 이 교회의 기초가 된 그들의 이름이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다. 각 돌판에 7명씩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성도의 죽은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 116:15)는 말씀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마 5:10)라는 성경구절이 기록되어 있다. 이 성경구절은 그들의 순교가 복된 것임을 그 어떤 유명인의 글보다 더 명확하게 깨닫게 한다.

▲모 교회 예배당 뒤쪽 양편에 두 개의 돌판으로 순교자의 이름이 기록된 두 돌판이 있다.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계 21:14)는 말씀을 연상하게 하듯 순교로써 이 교회의 기초가 된 그들의 이름이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다. 각 돌판에 7명씩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성도의 죽은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 116:15)는 말씀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마 5:10)라는 성경구절이 기록되어 있다. 이 성경구절은 그들의 순교가 복된 것임을 그 어떤 유명인의 글보다 더 명확하게 깨닫게 한다.

▲출구 한편에는 깔뱅의 사진과 함께 이 교회가 깔뱅의 가르침을 받았음을 알리는 글이 있다.

▲출구 한편에는 깔뱅의 사진과 함께 이 교회가 깔뱅의 가르침을 받았음을 알리는 글이 있다.

▲출구의 또다른 한편에는 쟌 후스부터 시작된 종교 개혁자 8명의 사진이 있었고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라는 기록이 있었다.

▲출구의 또다른 한편에는 쟌 후스부터 시작된 종교 개혁자 8명의 사진이 있었고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라는 기록이 있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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