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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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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3.1 운동의 의미 작성일17-03-01 11:47 조회3,8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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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은 1919 년 3 월 1 일 일본의  식민 통치에 맞서 일어난 온 겨레의 항일 민족 독립 운동이다.
 기미 독립 운동이라고도 한다. 일본 제국주의 무력으로 우리나라의 통치권을 빼앗고 식민지 정책을 펴 온갖 굴욕과 고통을 받게 되자 온 민족이 들고 일어선 독립 운동이다.

*배경

1910 년에 일본은 강압적으로 우리나라의 주권을 빼앗고 무단 정치를 실시하여 온갖 탄압과 착취를 일삼았다.  일본의 탄압이 날로 심해지자 수 많은 애국 지사들이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을 하였고, 국내에서는 지식인과 종교인을 비롯해 학생,  농민,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반 일 감정이 더해가고 있었다.
 마침 그 무렵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결 원칙'을 발표하였다. 이 민족 자결 원칙은 항일 독립 투사들에게 크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게다가 1919 년 1 월에 고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 데 그것이 일본인에 의해서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퍼져 온 국민의 분노는 극도에 달했다.

*전개

온 국민의 항일 감정이 극도에 이르렀을 즈음, 일본에 유학 중이던 유학생들이 1919 년 2 월 8 일에 독립 선언서와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국내에서도 3 월 1 일 민족 대표 33 인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같은 시간에 탑골 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이 모여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뒤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들어갔다.
 이렇게 시작된 시위 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졌고,  중국 동북 지방과 하와이 등지로 퍼졌다.
 그러나 일본 총독부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전국 각지에서 수 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거나 투옥시켰다.
  그 대표적인 예가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 학살 사건이다.

* 의의

3.1 운동은 일본의 비인도적인 진압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일본의 가혹한 무단 통치 아래서도 꺽이지 않는 자주민의 저력을 국내 외에 떨쳤고, 세계 여러 나라에게 우리나라의 국권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또 보다 조직적인 독립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 독립 운동의 중추 기관으로 활약하였다.
 현편 국내에서는 일본으로 하여금 식민 통치 방법을 무단 통치에서 문화 정치로 바꾸는 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백과 3.1운동에서

1946 년 3 월 1 일 제 27 회 기념식을 시초로 하여 국가 경축일로 지정하였다. 1949 년 10 월 1 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공포함으로써 3.1 절이 국경일로 지정되었고,  2005 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로 개정되어 지금에 이른다.
 대한민국은 3.1 절이 국경일로 지정되어 태극기를 게양한다.

# 다음 위키 백과에서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유언...

순국하신 나이가 방년 17 세.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유언...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 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유언-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 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순국한 유관순 열사의 소식에 이화 학당(현 이화 여자 대학교) 교장이었던 프라이저 씨가 유관순의 시신을 요구했으나 거절 당하고 결국
국제 여론에 알리겠다고 윽박 질러 시신을 인도 받았는데
당시 일본은 유관순의 시신을
석유 상자 속에 토막을 내어 보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잔악한 일본이 유관순의 몸은 토막을 냈을지 몰라도 그의 독립 정신은 토막 낼 수 없었다.

 서울에서 3·1 독립 운동에 참가하는 학생들이 다칠 것을 걱정한 프라이 교장이 3.1 독립 운동 참여를 만류했으나,
유관순은 학교 담을 넘어가서 3.1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여러분! 우리는 반 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나라를 강제로 합방하고도 온 천지를 활보하며, 우리에게 가진 학대와 모욕을 가하였습니다. 10 년 동안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 되어 온갖 압제와 설움을 참고 살아왔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다시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독립 만세를 불러 나라를 찾읍시다."
(-아누내 만세 운동 당시 유관순 열사 연설 -)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 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이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는 우리를 재판 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
(- 독립 운동으로 투옥을 받고 헌법 재판소에서 유관순 열사 변론 -)

 유관순 열사는 일제의 재판관을 향하여 이렇게 항변했다.
 "죄를 지은 자는 너희들 일본인이다. 그런 일본인이 우리를 재판할 권리가 있단 말인가?" 하고 완강한 주장을 굽히지 않자 일제 재판관은,
"죄를 뉘우치고 일 본제국의 시민이 되겠다고 다짐 하면
관대한 처분을 내리겠다." 는 재판관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 강도를 몰아 낸 것이 무슨 죄가 된단 말인가? 살아서도 독립 만세, 죽어서도 독립 만세다." 라며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으니까,
"너희들 조센징이 무슨 독립을 한단 말이야" 하고 모욕적인 언사를 한 재판관을 향해서 의자를 집어 던졌다,
 
* 징역 5 년에 법정 모욕 죄 2 년을 추가해서 7 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일본인들이 자신들을 능욕했다고 감옥 투옥 중에도 불러내어 각종 고문과 여성으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성 고문까지 해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자기들의 간악한 고문 사실이 발각 될까봐 죄를 뉘우치지 않는다고 사형이라는 미명 하에 방년 17 세의 유관순을 난도질하여 사체 유기하려던 것을 당시 이화학당 미국인 교장 프레이저 씨가 일본인들을 윽박질러 시체를 인수하여 유족에게 인계한 것이다.

"17 세의 꽃다운 나이인 유관순의 사망 소식을 접한 이화 학당의 프레이저 교장은 국제 여론에 호소하여 그 녀의 시신 인도를 거듭 요구했다.
 그래서 학교 측에 인도된 유관순의 시신은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만큼 무참히 머리와 몸통, 사지가 따로 따로 여섯 토막으로 절단되어 있었고, 코와 귀가 잘리우고 머리와 손톱, 발톱이 모두 뽑혀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흉측하기 그지 없는 일제의 고문은 그 녀의 육신을 무참히 죽게 할 수는 있었으나 그 녀의 애국심 만은 결코 죽일 수가 없었다."

 우리는 오늘도 힘차게 부르짖자~

 "대한 독립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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