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갑 장로의 성경 속 수학 이야기 (5)
삼위일체, 성육신, 십자가의 죽음과 부할은 기독교의 신비 중의 신비이다. 이 중 삼위일체의 신비는 기독교 역사 초기 2, 3백년간 이단 시비가 계속되었던 주제였다.
예수님께서 하신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요 14:28)는 말씀을 비롯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낳아 보내지신 분이라거나, 아들은 시작을 가졌고 하나님은 시작 없이 계신 분이라고 주장하면서 삼위의 등급 사고를 고집한 이단들과의 끊임없는 성경 본문 해석을 둘러싼 투쟁이 있었다.
삼위일체 논쟁은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입회하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들이 아버지와 본질상 동일하시다라는 신앙고백을 인정하지 않는 신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이후 362년 알랙산드리아 공의회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의 본질을 갖는다고 정리하였으며 이러한 내용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거쳐 451년 칼케돈 공의회의 신앙고백서에서 교리로 확립되었다.
어거스틴은 창세기 1장 26절의 ‘우리의 형상과 우리의 모양대로’에서 우리라는 표현이 삼위일체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장 1절에 있는 하나님의 호칭인 히브리어 엘로힘이라는 명사가 복수형임은 하나님이 본질상 한 분이 아님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 있는 축도의 인용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성령 세 분의 하나님이 함께 사역하시는 표현이지만 사도 바울이 당시에 삼위일체적 사상을 갖고 있었다고는 보지 않는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이다.
하나님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신 6:4)이시며,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시다(요 10:30). 또 한 세례시에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행하여야 하며(마28:19) 이 때 세 분 하나님의 사역이 서로 다른 것을 마태복음 3장의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또 서로 다른 세 위격으로 역사하시는 신비한 삼위일체 하나님이신데 이를 단순히 세 분 하나님이라는 유한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답답함이 있기에 이를 쉽게 설명해 보고자하는 시도로 삼각형이나 물의 비유를 들 수 있다.
세 변이 있어야 삼각형을 완전히 그릴 수 있는 것과 같이 세 변과 하나의 삼각형 관계의 설명이나, 물이 상황에 따라 고체, 액체, 기체의 세가지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설명, 또는 육면체 모양이 삼차원을 대표한다는 것과 같은 설명이 시도 되었으나 어딘지 시원한 대답이 못되는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등장한 집합론에 의한 수학적 이론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집합론에서는 두 개의 집합의 원소가 서로 일대일 대응될 때 두 집합은 동일하다고 본다. 예를 들면 자연수의 집합1,2,3,4,5…와 짝수의 집합2,4,6,8,10…은 동일하다고 본다. 일견 두 집합의 요소의 수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으나 자연수나 짝수 모두 무한하기 때문에 어떤 자연수에 대해서도 그 수를 두배한 수가 존재하기 때문에 두 집합의 원소의 갯수도 같다고 본다.
물론 홀수의 집합1,3,5,7,9…도 짝수의 집합과 동일하다. 왜냐하면 홀수의 집합은 짝수의 집합에서 하나를 빼면 되기 때문에 어떤 홀수라도 그에 대응되는 짝수가 존재하기 때문에 두 집합은 동일하다. 따라서 홀수의 집합은 자연수의 집합과도 동일하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수의 집합이 성부 하나님, 짝수의 집합이 성자 하나님, 홀수의 집합이 성령 하나님을 나타낸다고 가정해 보면 세 집합이 서로 그 원소는 다르지만 동일한 집합인 것처럼 세 분 하나님도 그 위격은 다르지만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주장이 분명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이 세 집합을 연합해 보면 자연수의 집합으로 하나가 된다. 즉,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라 한분이시다. 아들과 아버지와 성령은 각각 고유한 특성을 갖지만 혼합되지 않으시고 연합하여 한 분으로 존재하신다는 우리의 신앙고백을 증명해 주는 집합론 이론이다.
일체는 수가 아니고 오히려 모든 수의 근원자체라고 주장한 서방교회 4대 교부 중의 하나이면서 성 어거스틴의 스승인 암브로시우스의 정의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