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갑 장로의 성경 속 수학 이야기 (12)
성경을 읽다 보면 세상적 이치와 맞지 않는 듯이 보이는 내용들을 접하게 된다. 어떤 경우에는 지금까지 배워왔던 수학적인 원리와는 전혀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말씀도 접하게 된다. 쉽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신기하기만 한 하나님 나라의 계산법을 알아 보자.
우선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산법은 1+1+1=1 이라는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 세 분 하나님이 한 분으로 존재하시는 것이다. 1+1+1=3 이 되는 것이 세상적인 계산이라고 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계산법에 의한 삼위일체 신비는 한 분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1+1+1=4가 되기도 한다.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야벳느고가 신상에 절하라는 왕명을 어긴 죄로 풀무불에 들어 갔지만 느브갓네살왕이 풀무불 속에서 본 것은 세 사람이 아닌 네 사람이었다(단 3:25). 뿐만 아니라 세 사람이 모인 곳도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면(마 18:20)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1+1+1=4가 된다.
우리가 열매를 맺으려 해도 만일 예수님 없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요 15:5). 즉 믿는 자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능력이 없이는 0이 된다는 것이다. ‘믿는 자 – 예수님의 능력=0’.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3장 6,7절 말씀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공식을 말씀하고 있다. ‘심는 자 + 물 주는 자 = 0’이지만 ‘심는 자 + 물 주는 자 + 하나님 = 자라게 함’이다.
이 번에는 하나님 나라의 비교법을 알아 보자. 마태복음 18장 12절 말씀에 잃어버린 양에 대한 비유가 나오는데 여기서 계산되는 비교법은 1>99 라고 표현 된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는 말씀(행 20:35)은 ‘주는 것 > 받는 것’이라는 방식이 된다. 누가복음 9장 24절의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라는 말씀은 ‘잃은자 > 구원하고자 하는 자’로 표시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세월이 흐름에 따른 자신의 성숙됨을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고전 15:9) <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엡 3:8) < 죄인 중의 괴수(딤전 1:15)’라고 겸손함의 표현을 하였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 16:24)는 말씀으로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를 생각해 보자. 십자가의 모양은 더하기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더하기를 잘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빼기이다. 우리를 유혹하는 부정과 부패와 같이 더러운 것들을 우리 마음에서 빼야 한다. 욕심을 빼야 한다. 욕심이 자꾸 쌓이면 배가 터질 것이다. 또 한 십자가의 고난은 몇 배나 되는 영광을 주신다. 하나님의 은혜로 임하시는 곱하기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나누기도 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예수님께로 오면 쉼을 얻는다(마 11:38-30). 예수님과 함께 나누어 메는 멍에는 쉽기만 한 것이다.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의 품꾼들에게 주는 품삯 이야기는 또다른 하나님 나라의 신기한 계산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일을 시작한 사람이나,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 심지어는 오후 5시에 일을 시작한 사람 할 것 없이 일한 시간에 관계 없이 누구에게나 처음에 약속한 품삯 한 데나리온만 지불하는 주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계산법이 우리의 상식을 뛰어 넘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는 것이다. ‘나중 된 자 > 먼저 된 자’.
세상의 계산법은 다분히 물량적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계산법은 분명히 은혜가 역사한다. 한 분이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분을 믿기만 하면 온 인류가 구원을 얻는 기하급수적 열매를 맺는 신비하고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계산법을 의지하자. 우리의 삶에 아무것도 아닌 세상적인 것을 곱해서 0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며 무한대를 곱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독자 여러분의 선택은 어떤 곱하기인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