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보다 더 빨리 달리는 아이들

김은애 기자  eakim@chtoday.co.kr   |  

[아프리카 자전거 순례 2만 리 28] 에티오피아, 자전거 여행

자전거 선교 여행을 시작한지 닷새째 되는 날 순례자는 대지구대(Great Rift Valley)에 속한 호수 지역의 교통 중심지 샤세메네(Shasemene)를 출발하여 그날의 목적지인 쿨리토(Kulito)를 향해 한적한 시골길을 달렸습니다. 그날도 순례자는 여느 날처럼 마을 앞에서나 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면서 땀을 닦고 목을 축일 때마다 영락없이 벌떼처럼 모여들어 나의 소중한 휴식과 경건의 시간을 앗아가는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에게 둘러싸여 구경거리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나는 자전거 여행 중에 그와 같이 모여든 사람들과 어린이들을 나에게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알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열심히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시골길에서 만난 오로모족 사람들은 암하라어나 영어를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에티오피아의 남서부 지방에 사는 오로모족은 에티오피아의 공용어인 암하라어를 사용하지 않고 오로모어를 말합니다. 오로모족이 많이 사는 아르시, 시다모, 발레 지역의 초등학교의 제1국어는 오로모어이며 두 번째 국어로 암하라어를 가르칩니다.

▲ 에티오피아 어린이들은 길에서는 달리기를 하고 공터에서는 축구를 하는 것이 다반사다.

▲ 에티오피아 어린이들은 길에서는 달리기를 하고 공터에서는 축구를 하는 것이 다반사다.

영어와 암하라어를 모르는 그들에게 소귀에 경(經) 읽기 식 메시지를 전한 순례자는 조금도 흥이 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순례자와 말씀을 듣는 이방인 사이에 성령의 역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얼굴은 복음을 듣고 얻은 평화스런 미소 대신에, 단지 누런 피부의 아시아인에 대한 호기심어린 표정이었습니다. 나의 영적인 갈증은 하루 종일 섭씨 30도를 오르내리는 뙤약볕 아래 졸아든 육신의 갈증보다 더 심했습니다. 그들과 헤어져 목적지를 향해 달리며 순례자는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낙망 대신에 희망을, 좌절 대신에 용기를, 불안 대신에 평안을, 의심 대신에 굳건한 믿음을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10여km를 달렸을까. 짚을 엮어 만든 둥근 지붕의 초가집 마을이 나타났습니다. 마을 주변에는 하얀 염소들이 풀을 뜯으며 한낮의 식도락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들이 무척 평화스러워 카메라에 담기 위해 잠시 자전거를 세우고 카메라 가방에서 사진기를 꺼내고 있는데 마을의 이곳저곳에서 어린이들이 내 쪽을 향해 쏜살같이 뛰어오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파란지! 파란지!” “아바바! 압바트!” “파더! 파더!”

‘파란지’는 오로모어와 암하라어로 외국인이란 뜻입니다. 오래 전에 아프리카가 프랑스 식민지로 있었을 때 원주민들은 프랑스 사람을 가리켜 파란지라 불렀던 것이 오늘날에는 서양인을 포함한 외국인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 된 것 같습니다. 오로모어 ‘아바바’와 암하라어 ‘압바트’는 아버지(아빠)란 뜻입니다. 어떤 아이들은 영어로 ‘파더’라고 불렀습니다. 오로모족 어린이들이 부르는 ‘아바바’는 일반적인 ‘아버지’를 초월하는 “도와주고 감싸주며 사랑을 베푸시는 어른”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아바바’는 하나님을 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에티오피아 어린이들은 시력과 청력이 매우 뛰어난 아이들이었습니다.

마을 가옥들이 내가 선 자리에서 2백 미터 이상 떨어진 곳이었는데 ‘파란지’라는 첫 말 한마디가 마을 전체의 어린이들에게 전달되어 삽시간에 아이들이 열 명 스무 명으로 불어났습니다. 어린이들은 대여섯 살의 어린 아이들로부터 열 살이 넘은 소년들이었는데 그들 사이에는 여자 아이들도 끼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자, 나는 촬영을 포기하고 카메라를 황급히 어깨에 걸쳐맨 채 자전거에 올라타 페달을 밟았습니다. 아이들이 두려워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아이들이 싫고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날은 아이들에게 나눠줄 작은 돈(동전)마저 준비되어 있지도 않은 처지였습니다. 에티오피아 어린이들은 시력과 청력 뿐 아니라 달리기에도 무척 뛰어났습니다. 나는 변속 기어를 최고로 올려 페달을 힘껏 밟았지만 아이들은 자전거보다도 더 빠른 속력으로 자전거를 뒤따랐습니다. 자전거 뒷부분에 손이 닿을만한 거리로 좁혀졌는데도 아이들은 자전거를 밀어뜨리거나 잡아당기기 않고 그냥 달려오기만 했습니다.

아이들은 뛰어오면서도 한결같이 손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야생마였고, 모두가 달리기 선수였습니다. 맨발로 뛰어오는 아이들은 모두가 1960년과 1964년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어린 아베베 비킬라였습니다. 에티오피아가 바로 이웃나라 케냐와 더불어 세계 제일의 마라톤 왕국임을 실증해 주는 순간들이었습니다. 결국 아이들의 손길과 외침을 떨쳐버리고 가파른 고개 하나를 넘었을 때 길섶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습니다.

평화의 순례자 안리 강덕치(E-mail: dckang2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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