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밭에서 만난 소년

김은애 기자  eakim@chtoday.co.kr   |  

[아프리카 자전거 순례 2만 리 34] 에티오피아, 자전거 여행

호수 길의 드넓은 초원에서는 농부들이 하얀 호반새의 축복을 받으며 풍년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도중에 순례자는 바나나 밭에서 일하고 있는 대여섯 명의 농부들을 만나 그들 가운데 한 소년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습니다.

“쎌람, 데나 네!(안녕)”
“쎌람, 데나 노트!(안녕하세요)”

살결이 매끄러운 구릿빛 살갗의 소년 유수프 오마르(13살)는 아침 일찍부터 해가 지는 시간까지 하루 종일 바나나 밭에서 일을 합니다. 집안이 가난하고 학교에 다니지 않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유수프는 오로모 소년답게 얼굴 생김새가 뚜렷하고 인상이 서글서글한 잘생긴 소년입니다. 소년은 일요일을 제외하고 일주일 내내 일을 하지만 하루에 받는 삯은 고작 5비르(약 6백원)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와싸-아게레 마리암-케냐 국경 구간 도로 공사 때 인부로 일하던 아버지는 척추를 크게 다쳐 몸져 누워있는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저도 돈을 모아 자전거를 사면 아저씨처럼 우리나라를 한 바퀴 돌고 싶어요!”

▲“저도 돈을 모아 자전거를 사면 아저씨처럼 우리나라를 한 바퀴 돌고 싶어요!”

“아저씨, 저의 나라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라지요? 다른 나라에 가서 돈을 벌고 싶 어요. 돈을 벌면 먼저 저를 옳은 길로 키워주신 아빠에게 휠체어를 사드릴래요. 아래 세 어린 동생들과 누나도 돌보고 싶구요. 저를 낳아주신 어머니의 마음도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요. 아저씨, 하나님께 기도하면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열리겠지요?”

이렇게 말하는 소년의 눈동자는 샛별처럼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유수프의 가슴에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간절한 신앙심이 아로새겨져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몸져눕기 전이었던 서너 해 전 까지만 해도 유수프의 어린 시절은 거칠고 버릇없는 아이였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때려서 키우는 오로모 족의 전통적인 가정 교육이 유수프를 그렇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엄하고 성급한 아버지에게 매를 맞을 때마다 소년은 자기 누나와 동생들, 심지어는 엄마에게도 분풀이를 했습니다. 자기를 젖 먹여 키워준 엄마의 젖가슴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타박상을 입혔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엄마가 애지중지하셨던 나귀의 한 눈을 꼬챙이로 찔러 눈 병신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엄마는 포악한 아들을 용서와 사랑으로 감싸주었습니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땅이 이른 봄의 햇살을 받아 서서히 녹듯이 유수프의 꽁꽁 얼어붙은 가슴이 사춘기에 엄마에게서 받은 사랑으로 녹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해빙기에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면서 봄 땅에 새 싹이 돋아나듯 유수프의 가슴에 조금씩 기적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하고 동생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싹이었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살쾡이의 성품을 사슴의 성품으로 변화시킨 것은 어머니의 바다 같은 넓고 깊은 사랑이었습니다.

헤어질 때 유수프는 반질반질 녹색 윤이 나는 예닐곱 개의 바나나를 내 자전거 패니어에 넣어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순례자 아저씨, 이건 엄마에게 드리려고 밭 주인 어른께 허락받고 제일 좋은 것으로 골라 받아온 건데요. 출출하실 때 잡수보세요. 그리고 저도 어른이 되어 돈을 벌면 자전거를 타고 북쪽지방에 있는 ‘랄리벨라’ 등 문화 유산지를 순례하고 싶어요. 아저씨랑 함께요. 그때까지 꼭 사셔야 해요! 그리고 꼭 연락 주셔야 해요!”

아바야 호수의 하늘 아래에서는 호반새, 해오라기, 따오기 등 물새들이 아름다운 노래 소리로 우리들의 작별을 서러워하고 있었습니다.

평화의 순례자 안리 강덕치(E-mail: dckang2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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