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소년들과 호텔의 소년 가장

김은애 기자  eakim@chtoday.co.kr   |  

[아프리카 자전거 순례 2만 리 52] 에리트리아, 버스여행

4월 중순의 양광(陽光)이 가득한 정오 경에 순례자는 해발 2,350미터의 드넓은 고원에 자리잡고 있는 수도 아스마라에 도착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니까 나이가 열 살 안팎으로 되어 보이는 대여섯 명의 소년들이 나에게 우르르 몰려들어 버스 지붕에 실려 있는 자전거를 자기들이 내리게 해달라고 졸라댔습니다. 그것은 짐을 내려주고 수고비를 받고 싶다는 뜻이었습니다. 학교에 다닐 나이에 거리에서 돈벌이를 해야만 하는 가난한 에리트레아 어린이들의 간청을 나는 차마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우리나라 돈으로 몇 백 원도 되지 않는 에리트레아 지폐 ‘나그파’를 소년들에게 한 장씩 나눠 주었습니다. 자기들에게는 액수가 큰 돈-적어도 1천원 가치 이상의-을 받고 엉덩이 춤을 추고 있는 소년들의 눈앞에는 아마 하늘나라가 활짝 펼쳐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전거에 패니어와 가방 등 여러 가지 짐을 묶는 동안에도 소년들은 내 곁을 떠나려하지 않았습니다. 소년들은 서너 명이 다함께 자전거를 탈 수 없으니까 자기네들이 호텔까지 자전거를 끌어다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소년들의 청을 받아주었습니다. 무겁지도 않은 자전거를 좌우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3백 미터 쯤 떨어진 호텔까지 걸어가는 동안 소년들은 나를 중국인으로 알고 ‘칭 챙 총!’ 하면서 떠들어댔습니다. 어른을 놀리는 듯한 소년들의 무례한 언동이 나는 조금도 싫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버릇없는 언동이 악한 마음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어쩌면 어린이들만이 간직할 수 있는 천진무구(天眞無垢)에서 생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순간에 나는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소년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과 어린이들을 늘 가까이 하시고 귀히 여기셨던 예수님의 세미한 음성이 내 가슴에 스며들어왔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소년(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 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마태복음10:40)

소년들이 소개해준 호텔은 시설이 아주 형편 없었습니다. 이름이 호텔이지 우리나라의 60년대 여인숙보다 훨씬 불량한 숙박소였습니다. 화장실, 세면대, 샤워장에 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화장실의 변기는 변이 내려가지 않은 채 방기 상태였고 변기에는 착석대(앉는 자리)도 없었습니다. 침대에는 새 시트가 씌워져 있지 않았고 이부자리는 담배 니코진 냄새와 퀴퀴한 냄새가 배여 있었습니다. 이불을 새것으로 바꿔달라니까 나이가 열대여섯 살 쯤 보이는 호텔 소년 종업원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대여섯 개의 객실은 모두 비어 있었고 다른 방 침대도 헌 이불에 고리타분한 냄새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머리 속에는 다른 호텔을 찾아 나서야겠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퇴실(退室)하기 위해 자전거에서 떼어놓은 패니어와 카메라 가방과 침낭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내 방문 앞에 죄지은 사람 처럼 서 있던 호텔 소년 종업원이 겨우 입을 열었습니다.

“손님 아저씨, 하루만 더 참아주셔요. 내일 새 이불로 갈아드릴께요. 그리고 지금 양동이로 물을 떠다가 화장실과 세면대를 깨끗이 청소해드릴께요. 제발 네?”

소년의 서툰 영어를 나는 거의 알아듣고 있었습니다. 하소연에 가까운 소년의 간청이었습니다. 소년은 말하지 않았지만 마음 속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조금 전에 입실료로 주신 40나그파는 며칠 만에 들어온 수입이어요. 그동안 손님이 한 사 람도 없었거든요. 그 돈을 다시 돌려드리면 저희 집 다섯 식구가 오늘 저녁 당장 굶는답니다. 굶주려 허기진 어린 동생들을 바라보는 제 가슴은 아파요. 손님 아저씨, 저희를 도와주세요. 제발!”

그리고 버스 터미널에서 만난 거리의 소년들이 나를 이 호텔로 안내한 이유도 알 것 같았습니다. 나를 놀리며 히히덕거리던 소년들이 갑자기 정색을 하며 나즈막하게 속삭이는 말이 환청으로 들렸습니다.

“칭챙총 아저씨, 이 호텔에서 일하는 형은 손님이 주는 팁으로 먹고 살아가는 소년 가장이 예요. 요즘 호텔에 손님이 없어서 매일 굶나봐요. 불편하시드라도 여기서 꼭 묵고 가세요.”

호텔을 떠나기 위해 짐을 챙기고 있던 내 손이 그 순간 힘을 잃었습니다. 호텔 소년과 거리 소년들의 간청이 잠자고 있는 내 영혼을 깨우쳐 주었던 것입니다.

‘주님, 이 호텔 소년을 사랑합니다. 거리의 소년들도 사랑합니다. 이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 시고 도와 주십시오.’

평화의 순례자 안리 강덕치(E-mail: dckang2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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