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자전거 순례 2만 리 60] 에리트리아, 자전거 여행
우리나라의 어느 유명한 연예인 아줌마는 세계적인 자선 기구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고급 지프차로 아프리카의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며 편안하고 안전한 여행을 하면서 병들고 굶주린 수많은 어린이들을 구제했다고 합니다. 그런 자본주의식 사마리아인의 활동을 아무도 탓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나 그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 탈렌트 아줌마는 책까지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잘한 일입니다. 그렇게 못하는 내 자신이 졸자(拙者)일 뿐입니다.
시외버스 정류장에 당도했을 때 에리트레아의 홍해 연안 길을 자전거로 달리겠다는 전날의 나의 계획이 완전히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고통을 이겨내고 수행을 수반해야 할 순례여행의 참 뜻과 가치를 저버린 채 나는 편리하고 안락한 여행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순례자는 정류장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버스가 오는 대로 즉시 자전거와 짐을 실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예상대로 아스마라를 출발한 아싸브 행 시외버스가 9시를 조금 넘어서 포로에 도착했는데 바로 호텔 앞에 정차했습니다. 버스는 초만원이었고 버스 지붕에는 엄청난 화물이 실려 있어 자전거를 실을 만한 공간이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운전사에게 사정을 하니까 실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버스 조수는 할 수 없다고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외버스는 포로 정류장에서 사람들을 한 사람도 태우지 않고 어딘가로 사라졌습니다. 버스를 타려고 아우성치던 사람들이 어딘가로 뿔뿔이 사라지고 나 혼자만 덩그마니 남았습니다. 허전했습니다. 그리고 외로웠습니다. 나는 ‘순례자’가 아닌 ‘나그네’일 따름이었습니다. 동행자가 없는 외로운 나그네였습니다. 그 입술에는 기도가 없었고 그 가슴에는 찬양이 없었습니다. 그 영혼은 메말라 있었습니다.
그 순간 주님의 세미한 음성이 나의 귓전에 들려왔습니다.
“우유부단한 순례자여, 그대는 떠돌며 머물며 무엇을 하려느뇨?”
나는 자전거 손잡이의 미간에 얼굴을 파묻고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주님, 저와 자전거는 기력이 쇠했습니다. 나귀를 닮은 자전거 당쇠는 몸의 각 기관(부품)이 닳고 망가져 박물관에 보내야 할 나이입니다. 저도 당쇠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저와 자전거는 무척 피곤합니다. 주님, 제가 좀 편하게 여행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십시오”
“평화의 순례자여, 시편 121장의 말씀에 의지하여 지금 곧장 자전거로 겔로 엘로를 향해 달리시오”.
자전거로 가야할지 버스로 가야할지 마음의 방황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마침내 주님의 음성을 듣고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의 목적지를 향해 페달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힘이 생겼습니다. 마치 모터가 달려있는 것처럼 자전거는 그렇게 잘 달려주었습니다. 마치 두 날개를 가진 갈매기처럼 날아가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 은혜를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날 포로에서 겔라 엘로까지 거친 비포장 길의 2백리 길을 달릴 수 있었던 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요 축복이었습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혼자서는 기적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더불어 합심하여 선(善)을 이룰 때만이 기적이 일어나는 법입니다. 나에게는 두 동행자가 있었습니다. 한 분은 나의 여행길을 동행하신 나의 ‘길벗’ 예수님이었고, 다른 하나는 나의 여행길을 동반한 나의 충성스런 ‘종자(從者)’ 자전거 당쇠였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성령 충만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온 몸과 온 마음으로 합력하여 최선을 다할 때 반드시 기적이 일어나는 법임을 깨달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