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식’ 해소하려 일부러 도박에 빠지는 사람들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김충렬 박사의 ‘중독탈출’ (53)-도박 중독[20] 도박중독 치료와 죄의식 해소

▲ 김충렬 박사(한일장신대·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 김충렬 박사(한일장신대·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도박중독은 정신분석에서 죄의식의 해소와 관련된다. 도박중독이 죄의식을 해소하려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이는 도박중독자들이 더 많이 죄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과 관련되는 문제여서 약간의 의문이 든다.

이런 점과 관련하여 프로이트는 도스도예프스키의 도박행위를 분석한 ‘도스도예프스키의 아버지 살해(Dostoyevsky and Parricide)’라는 논문에서 돈을 따서 빚을 갚기 위해 도박을 하는 게 아니라고 밝혔다. 그들의 도박은 단지 합리화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도박 자체를 위해, 즉 행위에 내기를 걸는 것이다. 그들의 행위는 자신도 모르는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함이고, 역설적이게도 많은 돈을 잃어야 죄의식을 벗을 수 있다. 이런 점은 도박중독 치료를 죄의식 관점에서 다룰 근거를 제공한다.

1. 죄의식의 근거로서의 도박중독

도박행위가 죄의식과 관련있다는 점을 프로이트가 밝히면서 도박중독은 병적인 관점에서 치료할 근거가 생겼다. 그 근거가 정신분석적 입장이라 보편성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심리학에서는 상당히 인정된다. 이해를 돕기 위해 도박행위가 어떻게 죄의식과 관련되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도박행위가 죄의식과 관련되는 점은 저 유명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해를 전제로 한다. 프로이트는 도스도예프스키가 아버지를 향한 살인충동을 가진 데 주목했다. 이는 반드시 도스도예프스키만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경쟁 관계에 있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의미한다. 아들과 아버지의 경쟁적 관계에서는 특성상 상대를 지배하려 하고, 심지어 상대를 완전히 제압하려는 목적에서 죽이려는 심리를 갖는다. 이런 특성이 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아들이 아버지를 좋아하고 존경하지만 그와 동시에 아버지를 밀어내고 어머니를 차지하고 싶어해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버지와 동일시하고 경쟁하려 한다.

프로이트는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합당치 않은 생각이 무의식에서 죄의식과 연관돼 남아있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초자아와 자아의 관계로 변형된다고 설명한다. 이때 초자아는 물론 아버지임과 동시에 가학자·핍박자이므로 자아는 핍박받는 자이며 처벌받을 위치에 있게 된다. 그러면 자아는 아버지를 사랑하면서도 증오했던 살해 충동 때문에 자아 속에서 처벌받으려는 숭고한 욕망이 자라난다. 거세당하는 것, 도박에서 돈을 잃는 것, 패배자가 된다는 것은 잘못을 속죄하고 아버지에게 다시 사랑받음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이 바로 죄책감 해소로 이어진다. 이때 도박중독자들은 죄책감을 줄이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패배를 추구해 창백한 범죄자, 신경증적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다. 도박중독자들은 돈을 잃으려,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도박을 해야 하고, 많은 돈을 잃어야만 죄책감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런 원리에서 치료자는 도박중독을 죄의식과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병적인 죄의식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의무나 강박, 내재적 관계에 있다. 일반적으로 죄의식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평판과 사랑을 잃지 않을까 하는 고통에서 비롯되거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랑과 평판을 잃지 않을까 하는 자기애적 고통과 궤를 같이한다. 죄의식은 언제나 감정적 관계 안에서만 형성되기에 의사소통을 하고 하나가 되려는 욕망인 사랑과 관련된다. 그런 측면에서 사랑이란 하나의 욕망으로 선물로 주어질 뿐 아니라 하나의 요구라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욕망은 흔히 바람직한 대상이 되기를 요구하고, 사랑할 만한 대상이 되기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랑은 주체가 그의 실존 속에서 확인하는 다른 사람의 욕망에 어느 정도 부응해야 함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치료자가 이런 죄의식을 도박중독자들에게 적용하면 중요한 치료 근거를 발견하게 된다. 그들 자신의 결함이나 잘못 때문에 스스로 그럴 만한 자격이 없다고 느끼는 감정인 죄의식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욕망이나 평판에 부응을 못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경험되는 점이다. 그들에게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욕망은 깊은 결속을 맺지 못하게 만들므로 사랑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좋은 평판을 얻으려 하는 한, 그들이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는 그를 그에게 의존하게 할 만큼 강력하다.

이때 치료자는 그들 내면에 내재하는 죄책감을 해소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그들이 부정화되기 시작한 때를 점검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언제부터 부모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를 점검해 이를 해소하는 차원으로 나가야 한다. 이런 해소가 바로 그들의 부정화로 인한 죄의식을 해소하는 차원이기 때문이다.

2. 자기처벌의 행위로서의 도박중독

앞에서 우리는 도박중독이 죄의식 해소와 관련되고 있는 점을 정신분석 입장에서 살폈다. 죄의식은 처벌을 두려워하는 심리와 맞물려 있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이미 처벌 심리는 불안에서 비롯됨이 나타났다. 아들이 아버지와 경쟁하려 하고 힘의 우위에서 포기할 수 밖에 없다 해도 심리적 측면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점 때문이다. 이는 프로이트가 도박을 죄책감 해소를 위한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는 이유다.

프로이트의 뒤를 이어 도박중독을 심리적 피학증(psychis masochism)으로 정립한 사람은 베르글러(E. Bergler)다. 베르글러는 도박꾼이 돈을 잃기 위해 도박한다는 생각을 널리 전파했으며, 그의 이론은 프로이트 이후 가장 흥미로운 이론이 됐다. 도박자는 베르글러에 의하면 죄의식에 의해, 그리고 양심을 속죄받고자 하는 자기 처벌 메커니즘에 의해 움직인다. 그러면 이들의 죄의식이나 속죄받으려는 심리는 더욱 인정받으려는 심리로 이해된다. 다른 사람의 사랑과 평판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그들에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지 하는 걱정으로 광범위해진 죄의식일 수 있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이 아직 분명하게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들은 때때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려는 근심 때문에 다른 이들의 사랑과 평판을 잃지 않으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그들이 더욱 도박으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 인정과 사랑의 조건을 갖추게 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때 그들이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가, 상대방에게 사랑받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조바심에 근거한 신경증적 관계를 초래하는 점도 자명하다. 이것은 그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얻지 못해 정말 출구가 없는 걱정이 된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그럴수록 더 많이 도박하려 한다. 치료자는 이런 행동을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얻으려 많은 수고를 하고 있다고 이해해야 한다. 물론 그들의 노력은 생각과는 달리 오히려 더 사랑을 얻지 못하게 된다. 그들의 내면에는 결코 달랠 수 없는 불신과 노력의 대가에 대한 요청이 있어 그런 목표에 장애를 경험한다. 이런 점은 일상생활에서 오랫동안 바꾸고 싶은 삶을 거친 암묵적인 의도를 담은 결과다. 그들은 지금까지 사랑의 불행을 겪으면서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자기가 사랑한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치료자는 도박중독자를 자기 처벌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그들의 무의식이 반영되는 꿈 분석을 할 필요가 있다. 꿈에는 그들의 처벌적 두려움이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이 히스테리증자의 분석경험에서 터득한 확증을 꿈에서 얻을 수 있음을 깨닫고, 어느 때보다 과감한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꿈이란 의식이 잠재의식적인 것에서 불러내고 펼쳐놓고 판별해내고 꺼내놓는 어떤 것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거부된 것에 의해 구성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그들의 꿈은 무엇엔가 항상 쫓기고 있거나, 어디론가 숨으려 할 것이다. 이런 현상은 그들이 현실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불안한 심리 형태를 보이는 것으로 심리적 안정을 찾는 노력의 일환이라 볼 수 있다.

물론 꿈을 분석할 수 없는 치료자의 경우라면 그들의 깊은 사고를 파악하는 것도 가능하다. 현대에 이르러 무의식을 분석하는 것이 깊은 생각의 심층을 살피려는 것도 이런 점에 착안한다. 누구나 꿈을 꾸지만 모든 사람들이 쉽게 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상당 기간 동안 꿈을 분석 받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런 훈련은 어렵기도 한 점에서 상당 기간의 분석을 받은 후에라야 꿈을 잘 기억한다. 처음에는 꿈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 훈련을 거치면 마치 한 편의 수필을 쓰듯 기억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를 감안하여 오늘날 치료 현장에서 꿈 분석은 심각한 논의로 대치되기도 한다. 이때 그들의 깊은 사고는 대개 부정적이다. 생각이 대개 불안하고 의심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마치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는 주체가 나는 의심한다”라는 진술과 상동 관계 속에 결정되는 점과 같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를 포착한 것은 ‘나는 의심한다’라는 언어적 행위를 통해서이기에, 그들의 부정적 언어는 그대로 그들의 생각을 담고 있는 것이면서 여전히 의심에 부칠 수 있는 지식 전체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도박중독의 치료에서 치료자가 자기처벌의 문제를 놓치지 말아야 할 이유다.

3. 보상적 행위로서의 도박중독

도박중독자들은 죄책감이나 자기처벌의 관점 외에도 스스로 보상을 받고자 하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의 죄책감이나 자기처벌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까? 여기서는 그들의 아동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그들의 죄의식의 근원은 부모의 규제에 대항하여 금지된 쾌락을 추구했던 아동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그들이 이미 성인으로 성장한 그들의 내면에는 결혼으로 인해 마땅히 해소되어 발전되어야만 할 무의식의 욕망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관점에서다.

그러면 그들의 반항은 부모에 대한 무의식적인 적개심과 다르지 않으며, 이런 공격성으로 인해 그들은 죄책감과 자기처벌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시각에서 도박중독자들은 부모의 처벌을 무효화하기 위하여 스스로 거절당하고 치욕을 당하는 길을 선택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이제 그들이 도박판에서 상대하는 적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거부하는 부모와 동일시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공격성은 허위 공격성(pseudo-aggression), 패배와 거부를 열망하는 공격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그들의 행위는 ‘나는 사랑받기 위해서 패배한다.“는 것을 공식화하고, 실현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는 도박이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금지된 행동이며, 죄책감에 의해 움직여지는 행동이라는 이유가 된다.

그들의 무의식적 반항과 그에 따른 공격성이 도박이라는 행동으로 분출된다면, 이는 현상적으로 일종의 무의식적인 반응이면서 일종의 보상을 바라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보상적 행위는 반드시 도박행위를 해야만 한다고 하는 강박성으로 나타나, 이제 그들은 무엇엔가 충실하려고하는 것을 일상의 직업보다도 도박으로 대치하게 된 것이다. 이런 경우에 도박은 그들이 충실하게 전력을 쏟을 수 있는 최고의 일터가 되기도 한다. 그러면 치료자는 그들의 행동을 잘못된 판단으로 보고 있지만 적어도 그들에게는 도박을 통하여 그들의 능력이나 존재감을 인정받으려는 노력의 일환이라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까 그들이 도박에 열심을 내는 태도는 자신의 행동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보장받으려는 강박적 특성을 지닌다. 이때 그들의 인정받지 못한 부분은 도박을 통하여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게 되기에 그들은 도박을 더 많이 하려는 방법으로 보상을 받으려고 한다.

그러다가 그들은 사회에 해가 되는 도박행위를 이제는 형식상 도박을 해야 하는 의무로 바뀐다. 물론 그들이 언제나 돈을 잃어버릴까 봐 걱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도박행위는 물론 일상적인 삶의 활로를 도박의 성패에 두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이 이런 원리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 즉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나쁘게 평가할까 봐 더욱더 그들의 존재가 받아들여지기를 바라고,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치료자는 그들의 이런 심리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들의 내면에서 작용하는 동기적인 특성을 간파하자는 것이다. 그들이 중요한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는 심리는 그들의 부정적인 양태, 즉 거부당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 속에서만 들어 있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치료자는 도박에서 어떤 역설적인 도치가 이루어지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가급적이면 불완전한 것을 교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생사를 주관하는 존재와의 관계에서 완전히 의존적인 자리에 놓이려고 하기에 지금까지 누리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쾌락을 누리려고 한다. 그것이 그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더 이상 그들에게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대하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제 가급적이면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하고, 가까운 사람들이 생각하고 바라는 대로 그들도 생각하고 바라려고 하며, 그들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려고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이 되려고 그들의 다른 욕망을 모두 포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그들은 스스로 도박을 통해서 보장받으려고 하며, 그들의 능력을 인정받으려고 한다. 결국 그들의 도박행위를 통해서 그들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존재로 만들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물론 그들이 성실하게 노력하지 않고, 도박에 신뢰를 두고 있는 셈이기에 그들의 도박은 다른 사람들의 좋은 평가를 보장받으려는 추구로 변질되고 만다. 이는 치료자가 그들의 내면에는 잘못된 생각이 감춰져 있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할 문제인 것이다.

4. 죄의식과 신경증적 환상

죄의식은 신경증적 환상이 가능해진다. 정신이 정상적으로 가동하지 않는 부정적 상태에서는 이상한 환상이 일어난다. 이런 현상은 스스로의 해결책을 원하는 무의식적인 반응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죄의식에 대하여 심하게 강조하면 특히 피학적 음란증을 초래하는 것을 예를 들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그들에게 고통이 변태적인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고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중요한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얻으려고 스스로에게 고통의 대가를 지불하는 꼴이다. 그들은 무의식에서 드러나는 인정과 사랑의 자유연상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인정과 사랑은 신경증 환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남다르게 타인의 인정과 사랑을 받는 곳에서는 질투하는 심리를 감추고 있다. 이는 그들이 내면적으로 더 많이 인정과 사랑을 받으려는 데서 비롯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양면적인 심리적 형태는 극단을 치달을 수 있는 특징이 있다. 겉보기에는 유약하게 보여도 도박하는 데에는 대담한 형태를 보이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그들에게 양가감정이 억압되어 있는 상태로 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그들의 시각은 세상을 보는 데에는 부정적인 관점을 갖지만 도박하는 일에는 대단히 긍정적인 관점을 갖는 등의 극단적인 시각이 가능하다. 그들에게 미움을 불러일으키는 증오에 가득 찬 세상의 일들은 무의식적인 증오와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들에게는 정당한 것도 일종의 술책이라는 환상이 가능하여 공격성과 반공격성이라는 끊임없는 사실을 만들어 낸다.

이런 것은 일종의 신경증의 증상과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그들에게 그런 이상한 상상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강박신경증에 걸린 어떤 환자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어떤 흑인이 어두컴컴한 저녁에 그의 머리를 깨부수려고 곤봉을 들고 정원에서 그를 기다린다는 상상을 하곤 하였던 어느 날 자신의 머릿속에 가학적인 미지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런 것은 물론 현실과는 다른 환상으로서 그 환상은 그의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가 들어갔던 것과 관계되는데, 그것은 두통약을 선전하는 광고에 나오는 어떤 남자의 이미지였다. 주기적으로 매우 신한 두통에 때문에 고통을 받았던 그 강박신경증 환자는 정신분석을 통하여 그의 피학적인 환상과 격렬한 미움이 어디에서 유래된 것인지 알게 되자, 결국 그 두통으로부터 풀려났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들에게 죄의식이 강조되는 심리적 태도가 그 밑바닥에 무의식적인 양가감정을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닌지 질문해야 한다. 양가감정과 강박신경증 사이의 유사성은 그런 질문을 하게 만들지만 본능이 그 지점에서 자기애 때문에 그를 그렇게 괴롭혔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전에 갈등이 있었다는 징표로서 매우 심한 양가감정은 억압체계 속에서 그를 지켜줄 방어책을 찾는다. 미움은 사람들이 그에 대한 방어수단을 찾지 못할 정도로 위험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다른 생각을 검토해 볼 수 있다. 도박중독자들에게 있는 매우 심한 환상은 그들로 하여금 완전성을 추구하게 했을 뿐 아니라, 거울에 비친 자신의 상을 계속 생각하게 하면서 자신들을 이상화하게 했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그들은 그 상(像)을 그들의 상상 속에서 더욱더 크게 만들게 된다. 이는 그들의 완전성에 대한 생각으로서 그들이 자신들을 스스로 그렇게 되고 싶어 하는 순수하고 강력한 이미지로 만들며, 그것은 아무리 본능적인 동요가 심할지라도 흔들이지 않는 자제와 포기의 모델이 된다. 그런 환상적인 상은 사실 이상적인 사람을 대체할 수 있는 또 다른 이미지이며, 그의 과도한 요청이 만든 초자아의 아버지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이상화는 항상 절망을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환상적인 상은 어디에서 그 능력을 행사할 것인가? 그들의 환상은 어떻게 보면 걸작으로 생각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무질서가 판치는 현실이기에 종잡을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가볍게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심지어 그들에게는 이 세상이 ‘죄악된 세상’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렇게 잘못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에게도 부딪히는 수수께끼지만 그들에게는 더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런 불확실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불식시키고, 소중하게 붙들고 있는 신념에서도 지상에 있는 것들을 보증해 주어야 한다는 요청을 거부하게 한다. 그러나 도박을 이상화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시련은 너무나 가혹하기에 그들은 자기애를 손상시키지 않고 도박으로 인한 위험에 봉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런 반항적이고 걸림돌이 되는 아픈 감정을 억압한다. 이는 자신들의 행동을 이상화시키는 중심에서 그들의 양가감정은 농축되어 도박의 승리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양가감정이 무의식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도박중독자들의 신경증적 환상에는 신비주의가 내재해 있다. 미래를 염려하는 신경증적인 증상에는 불안이 내재한 것이지만 이런 신경증이 도박중독자들에게는 신비한 환상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래서 그들은 마지막 재산을 잃고 가진 돈을 모두 잃는다 해도 그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물론 이렇게 신비화된 도박에 대한 생각에서 이루어지는 억압체계에 바치는 대가는 너무나 막대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잃고 난 다음에라야 이런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들이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는 지각에서 나온 깊은 절망감은 억압된 것들이 되살아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래서 그들은 도박을 위해서 그렇게 열광적으로 임했던 좌절의 문턱에 들어선 다음, 갑자기 그들이 일확천금을 꿈꾸어 왔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예를 많이 보게 된다. 그때 어떤 이들은 그들이 도박에 대한 ‘신화’를 가지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또 어떤 이들은 아무런 유보 없이 도박을 계속하면서, 그들이 공상에 가득 찬 모험을 하기 위해서 불법적으로 도박에 정박해 있지 않은가 하는 씁쓸한 감회에 젖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숭고하리만치 중요한 도박에 대한 욕망 역시 끈질기다. 그들에게 도박은 이제 절대적인 대상의 상실이라는 음푹 팬 구덩이처럼 느껴지고, 도박에 실망하여 오히려 세상에 대한 미움을 가지게 된다. 그들은 아직도 도박에 대한 계산이 어떻게 끝나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도박에서 치료자가 그들의 신경증적 환상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5. 도박중독자들의 진정한 죄의식과 상상적인 죄의식

도박중독자들의 죄의식이 만드는 그림자의 모습은 매우 다양하다. 그런데 이 세상에 정상적인 죄의식의 지표는 어떤 것인가?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더 모호하게 하는 왜곡된 양심과 그들을 진실한 삶의 분명한 모습으로 이끄는 양심 사이의 확실한 경계선이 어떤 것인지 찾으려고 한다. 여기에 한 가지 단순하고 분명한 것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실제로 잘못한 것을 단지 그들이 잘못했다고 상상 속에서 생각하는 것과 구분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어떤 가증스러운 범죄를 저지른 다음에 느끼는 죄의식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진정한 죄의식이다. 그러나 상상한 것만으로 자책하는 생각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것으로서 정신병적인 강박관념에서 나온 죄책감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실제적이라는 말과 상상적이라는 말은 감정이라는 말이나 욕망이라는 말과 비교해서 쓸 때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증인의 입장에서 볼 때 고소당할 만한 점이 없는 행위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과연 상상적인 죄의식인가 하는 점은 문제가 되는 행위의 심각성이 주관적인 평가와 달리 객관적으로 볼 때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될 때에만 내려질 수 있다. 모든 사회의 규범은 그 구성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합의가 개인적인 견해의 자의성을 배제한다는 점에 있어서 객관적인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뛰어넘을 수 없는 난점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 책임을 물으려고 할 때가 아니라, 스스로 책임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점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그 어떤 치료사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으며,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어떤 사람이 비난받을 만한 행위를 했을 경우, 그가 그렇게 했던 이유를 여간해서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사람도 마찬가지이지만 그것도 여러 가지 환상과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지 못하는 것과도 같다.

도박중독자들이 어떤 잘못을 한 다음 도박에 대하여 후회할 때, 그들이 진정으로 잘못했던 것에 대해서 느껴야 마땅한 만큼 후회하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거기에는 그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것으로 모순되는 욕망들과 모호한 기억들이 뒤엉켜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쩌면 죄책감 자체가 병리적인 것이 아닌지 물어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들이 씁쓸하게 자책하면서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직접적으로 하는 대신, 그의 내면에 피난처를 만드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에스나르(A. Hesnard)는 『잘못의 병적인 세계』라는 책에서 이 문제에 관해 깊이 있게 고찰하였다. 그는 죄의식 안에 여러 가지 굴곡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서 연구한 결과, 죄의식은 인간의 실존에 필요한 고통들을 섞어 놓는다는 가르침을 도출해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감정은 비현실적이며 내적인 것이고, 바깥으로 나아가는 행동만이 현실적인 것이라는 점에서다.

그가 죄라는 관념에 대해서 비판한 것은 죄가 ‘내면적이고 개인적인 도덕성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죄는 ‘삶의 내적인 드라마로 나타나는 반작용’이 아니라 무익하지만 불안해하는 주관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악이라는 표지가 붙은 생각인 것이다. 죄의 본질은 바로 거기에 있기에 죄에 대한 그러한 정의 속에는 신학자들이 염려하듯이 의미론적으로 규정한 것은 그가 생각하기에 이 세상에 정신의 질병이 아닌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죄의식은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 단 하나 예외가 있는데, 그것은 내면적으로 경험한 것을 생산적인 행동으로 펼치는 것이다. 고백적으로 사는 것은 병이 아니지만 그것은 너무 급진적이고 천사에게서나 가능한 듯한 입장이다. 그것은 결코 실용주의적인 행동으로 단순히 환원시킬 수 없는 정신적 실재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에스나르의 저서에 대한 논쟁은 신학이나 도덕철학의 영역이 아니라 심리학에 속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먼저 에스나르가 정신분석학을 현상학적으로 재해석했기 때문에 무의식을 소홀히 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한다. 그는 죄의식에 의해서 생긴 병을 마치 죄책감이라는 감정인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면 강박관념이나 공포증의 경우, 죄의식의 표상은 의식의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죄의식을 예방하고 억압하는 것을 작용 원리로 가지는 것이다. 죄책감이나 병적인 것들이 그렇게 동화되기 때문에, 에스나르는 강박관념이나 공포증을 생물학적 유기체론이나 심리학적 조건론 같은 심리학 이론으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정신적 실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잘못했다는 느낌을 모두 병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에스나르가 잘못했다는 감정의 지각(知覺)에 도덕적 특성이 있다는 이론을 반대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행위의 도덕적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명료하게 주장한 칸트(Immaneul Kant)의 『실천이성비판』을 다시 보는 듯하다. 그렇다면 감정은 인간의 성질 위에 쓸데없이 덧붙여진 소용돌이에 불과한 것이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죄의식을 병적인 혼란으로 분류할 때, 우리는 거기에 모든 익숙한 정서들인 분개, 사람의 감정, 향락 등도 덧붙여야 하지 않을까? 다른 감정들이 객관적이고 실용적인 기준에서 볼 때 불행한 것들이 아닐지는 몰라도, 그것들은 그래도 상상적이고 마술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프로이트의 태도는 이와 매우 달랐는데, 프로이트보다 인간의 감정이 가진 환상적이고 기만적인 특성에 관해서 더 잘 지적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실 감정이 말하는 것들은 언제나 의식의 표면을 뒤틀리게 하고 뿌옇게 한다. 꿈이나 담화나 본문에서 숨기고, 다시 돌아가고, 생략하는 것들은 죄책의 감정을 감추고, 도치시키며,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그것들을 비웃지 않았다. 그는 감정은 인류의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인식의 방식인데, 그것이 일상적인 인식의 방식과 너무 달라서 사람들은 그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밖에는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프로이트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그들의 민족의 본질적인 서사시를 모세의 살해에 대한 기억을 억압하기 위해서 기록하였다고 설명하였다.

죄의식에서 비롯된 침묵이나 탄성은 그 다음에 나오는 행동이 도덕적일지 그렇지 않을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도덕의식은 이상하게 특별한 의식이라서 죄책감 역시 사람들을 올바르게만 인도하지 않는 것이다. “도덕의식은 어떤 사람이 도덕적일수록 그에게 더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더 믿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을 가장 고약한 죄인이라고 정죄하며, 그가 성인의 길에 더욱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도덕적인 사람들이 그에게 약속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너무 착하고 금욕적인 사람들은 여간해서는 그의 내면에 있는 인도자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는 것 같은 이치다.

이 점에 대해서 프로이트의 설명은 우리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하다. 그는 인간의 도덕의식에는 요구하는 것들과 경계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체념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의 내면에서는 본능이 더 자극을 받고 유혹이 더 많아진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새로운 말이 아니라 상식에 속한다. 프로이트는 본능을 적당히 충족시키고 죄의식을 억압해 가면서 다눈히 현실에 적응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심리와 달리, ‘문화를 위한 체념’은 윤리와 문명의 조건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죄의식은 실제로 나쁜 행동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유혹을 느끼는 것’에서도 생길 수 있다는 점이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행동만 가지고 죄의식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6. 심리적 결핍의 산물로서 죄의식

죄의식은 심리적 결핍의 산물이다. 물론 이런 결핍은 부정성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부정성의 결과가 바로 죄의식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들이 갖는 죄의식은 행동의 잘못으로 인한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지 모른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갖는 심리적 결핍으로 인한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치료자는 이런 점을 감안하여 그들을 대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도박중독자들이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로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결핍이 가져다주는 결과로서 희생된 피해자라는 관점을 갖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치료자가 그들을 고치려는 자세보다도 그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태도가 더 치료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 그들은 자신을 치료해달라기보다는 그런 자신들을 이해해달라는 마음이 기저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을 잘못된 사람으로만 보려는 태도는 실패하기 쉽다. 그리고 이런 이해의 태도는 그들로 하여금 실제로 죄의식이 해소되는 효과를 거두게 된다. 죄의식은 부정화의 산물로서 이해는 긍정화를 이루어 해소되기 때문이다.

물론 죄의식은 인간의 본능과 윤리규범 사이의 갈등에서도 생긴다. 인간의 본능은 그 자체로서 도둑질이나 거짓말이나 살인 같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이런 유혹들에 빠지 않도록 그 위험성을 알려주기도 한다. 이런 것을 두고 도덕의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도덕의식은 사람들이 옛날부터 느껴 왔던 유혹을 그들이 현재 느끼는 갈등 속에서 그때처럼 느끼게 한다. 공감(共感)을 분석해 보면 그것이 비록 윤리적 행동이 아니라서 도덕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지만, 도덕적 행동을 자극하고 유지시켜 준다. 공감이라는 말은 그 단어가 말해 주듯이, 드 그레프(E. De Greeff)가 생각했던 것처럼 생명의 약동이 자연스러운 산물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동일시할 때 생기는 긍정화의 산물이다.

도박중독자들을 긍정적으로 대하는 원리는 그들에게 치료적 효과를 이룬다. 여기에는 공감의 예를 들 수 있다. 공감한다는 것은 그들과 같이하는 것이며, 그들이 있는 곳, 즉 그들의 자리에서 느끼는 것으로, 치료자가 마치 그들인 듯이 그들의 곤경(困境)을 같이 괴로워하고, 그들의 즐거움을 같이 기뻐하며, 그들의 갈등과 반발을 같이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고 순진한 것이 아니다. 우선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안겨 주는 지배의 본능을 극복한 다음에 나온 감정이다. 이것은 치료에서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공감의 원리다.

따뜻한 공감은 인간에게 있는 다른 사람 등을 아프게 하려는 성향을 이긴 감정이다. 이런 공감의 원리는 치료에서 중요하게 작용한다. 전술한 대로 치료자가 도박중독자들을 치료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서 그가 경험하는 것을 다시 경험하려고 하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심리를 살펴보거나, 임상경험은 공감(共感) 속에 숨어 있는 함정을 많이 보여준다. 치료자가 그들의 다른 점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임상적 상황에서 보이는 공감이나 감정이입은 그들을 지배하는 의도로 판명이 난다. 치료자가 그들에게서 드러나는 윤리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그 어떤 감정을 분석하더라도 그 감정은 본능적이고 감정적인 것들 때문에 생긴 감정이라는 사실이다.

도박중독자들이 갖는 죄의식은 그들만의 특유한 감정이 아닐 수 있다. 이는 모든 부정성을 갖는 사람들이 그들의 행동과는 무관하게 갖는 죄의식이라는 점에서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치료자가 그들의 행동을 무조건적으로 잘못이라는 시각으로 보려는 태도를 지양해야 할지 모른다. 그것은 모든 인간들이 갖는 것으로 심리적 결핍에서 비롯된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들이 갖는 죄의식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갖는 죄의식일지 모른다는 관점에서 보면 어쩌면 그들은 모든 인간이 갖는 부정성의 결과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희생자들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윤리적인 행동은 본능을 따르거나 본능 위에서 이루어지는 고생스러운 작업의 결과 생기는데, 그런 작업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은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당위성이 형성되는 과정과 관계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인간에게 그런 고통스러운 작업이 계속해서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려 준다. 흔히 이야기하듯이 사람들에게 인격의 변화가 이루어져 ‘덕성’이 쌓이면, 그 내면에는 윤리적 행위의 모델들이 각인되고, 사랑의 질서가 확장되면서, 그것을 따라서 기쁨을 누렸던 기억들이 새롭게 되어 본능과의 갈등이 점점 더 적어진다.

그러나 죄의식에 비해 도덕적이나 윤리적 변화는 그렇게 쉽게 전환되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인간의 정신에서 과거에 생긴 정신의 층은 새로운 획득물 곁에 계속해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무수한 시간을 거쳐서 해소되거나 제거되어야만 새롭게 정신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대개 사회법을 거스르려는 욕망과 싸우는 과정에서 생성되고 그렇게 생성된 도덕의식은 그때부터 매순간 그들이 실제적인 삶 속에서 유혹을 느낄 때마다 다시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그것을 거스르려는 유혹은 마치 외부로부터 들어와 그의 좋은 성질과 맞지 않지만 그 성질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작용할 것이다. 예를 들어, 극적인 문학작품들은 인간의 정신을 정화(catharsis)시키는데, 그것들은 비극적인 영웅의 행적을 정신적으로, 또 감정적으로 다시 체험하게 함으로써 교만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박중독자들이 실제로 사회법을 범한 것이 아니라면, 죄의식 역시 머릿속에서 떠오른 본능의 표상들이 만들어 낸 상상 속에서의 범죄처럼 상상적인 것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치료자는 그들이 어떤 반사회적인 열정이 본성상 아무리 사악하다고 할지라도, 그 열정은 아직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그것이 인간의 욕망 밖에 있는 순전히 생물학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근거도 없을지 모른다. 다만 그 열정들은 그들의 욕망으로부터 나오고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욕망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들이 그것을 실행하려면 그것이 아무리 그들의 의도와 다를지라도 거기에 동의해야 할 것이다.

도박중독자들이 갖는 죄의식이 그들의 확고한 정신작용에서 나온 나쁜 열매라면, 치료자는 그것과 싸우거나 억압하거나 그것을 윤리적인 성향으로 바꾸려고 해서는 안 된다. 상상 속에서 저지른 행동은 그들의 예민한 의식이 이미 죄가 있다고 판정한 행동을 하려는 욕망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치료자는 도박중독자들의 죄의식을 정죄하려고 입장을 취하기보다는 이해하려고 하고, 더 나아가서는 인간의 근본적인 결핍의 결과를 대하고 있다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

치료자는 도박중독자들의 죄의식을 단순히 그들만의 문제라고 보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도박행위는 사회법을 어긴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그들의 내면에 잠재하는 죄의식은 인간의 원형적인 죄의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두고 치료자는 인간의 보편적인 죄의식을 생각할 수 있는 생각의 영역을 넓혀야 한다. 이것은 도박중독자들만 아니라 모든 정신병에 이상한 증세를 보이는 자들, 아니 어쩌면 아직은 그 도상(途上)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해당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프로이트는 사람들에게 있는 보편적인 죄의식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행적에 염려되는 흔적을 남겨놓았을 인류 최초의 범죄라는 이론적 허구(虛構)를 만들어냈다고 보았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토템과 타부』를 마무리하면서 인간은 근본적인 정신의 차원에서 상상적인 것과 실제로 행해진 행동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지 않은가 하는 질문을 하였다. 그런 관점에서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은 모두 원시적인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원시적이라는 말은 본래 가지고 태어난 특성을 얼마나 관리하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이런 점을 치료자가 놓치지 않는다면 치료에서 더 넓은 그들의 이해를 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이것은 도박을 한 사람들과 아직 도박을 하려는 사람, 그리고 도박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이 가능해진다. 다만 그들은 본능의 즉각적인 충동을 묵인하면서 상상 속에서 도박을 행동으로 옮기려는 의도를 실행시키고 말았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은 가슴 아프지만, 그들의 감정에서는 그들 자신은 물론 윤리와도 불일치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러나 죄의식이 전하려는 것은 그 어느 것도 결정적으로 행해진 것은 없으며, 놀랍게도 살인을 하거나 실인처럼 비도덕적인 행동이 저질러졌을 뻔했으며, 이제는 그들이 평화를 찾아서 살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은 본능을 억압하여 좋지 않은 결과가 생기는 것보다 죄의식을 받아들임으로써 정화작용이 일어나는 것이 더 낫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인지 모른다. 사람들은 마음속에서 공격성이 일어날 때 죄의식을 느끼고, 그것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우울해지는데, 그 우울감은 수수께끼같이 운명적인 것이다. 그러나 치유는 사람들이 우울증 밑에 있는 열정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데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확실히 죄의식이란 도덕이 무엇인지를 아는 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에스나르가 말한 상상계의 내면은 인간의 정신 깊은 곳에 있는 영역으로서, 실현되려고 나아가는 욕망과 반대되고, 파괴적인 곳으로 치달으려는 욕망들이 머무는 갈등의 자리인 것이다. 죄의식의 부재가 양심이 없거나 양심과 반대되는 것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모든 정신분석적 치료가 목표로 하는 것은 이것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려고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방어기제를 작동시켜 죄의식을 의식의 영역에서 벗어나게 하고, 죄의식을 전혀 느끼지 않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하지만 이런 경우에 치료자는 당황해 할 것이다. 그러나 치료자는 그 어떤 경우에도 그들을 이해하려는 입장만 취할 수 있다면 그대로 좋을 것이다. 치료자의 눈앞에서 당장에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해도 언젠가는 자신이 스스로 깨닫고 변화될 것을 생각하자는 것이다. 그렇기에 치료자는 “치료는 반드시 내가 해야 한다.”는 억지를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세가 바로 치료자의 진정한 모습이기도 하다.

7. 결론: 도박중독자의 죄의식을 먼저 이해하자

지금까지 우리는 도박중독과 죄의식의 해소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도박중독자들은 그들의 심리적 기저에 죄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 주된 핵심이었다. 그리고 치료는 이런 죄의식을 해소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죄의식은 도덕이나 윤리의 결과로 일어나는 부정적인 감정이지만 이를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태도가 치료자에게 요구된다는 점을 역설한 것이다. 실제로 죄의식은 때로 잘못 행동한 것과는 무관하게 심리적 부정성의 상태에서 유발되는 특성을 가졌다. 도박중독자들은 이런 죄의식에 시달리는 자들임을 인식하고 그들의 심리적인 고민을 이해하고 수용하자는 것이 요지였다. 그들을 잘못한 사람들로 보려는 인식은 오히려 그들에게 반감만 불러일으킬 뿐 치료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죄의식의 근본적인 원인을 살피고 이에 대응하는 치료자의 자세가 요구되었다. 여기에서 치료자는 그들의 죄의식을 단순히 사회법을 어긴 결과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원형적으로 갖는 부정성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것을 두고 원죄적인 부정성을 인간이 갖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면 그들은 자신을 관리하지 못한 점은 있지만 원천적으로는 결핍의 희생자일 수 있다는 넓은 이해력을 갖자는 것이다.

이런 넓은 시각을 갖고 대하는 것이야말로 치료자가 도박중독자를 다른 치료기법을 활용하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자세일 수 있다. 단순히 그들을 문제를 가진 사람으로 보고 치료하겠다는 자세보다는 그들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겠다는 전향적인 자세를 갖는 것이 오히려 치료적 효과를 갖게 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치료의 획기적인 관점으로 그들을 당장에 눈앞에서 변화시키려는 치료적 자세보다는 그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던 점을 이해하고 수용하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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