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내가 섬기는 하이델베르크 한인교회에 유일한 일본인 청년이 출석하고 있다. 오르간 연주자인 그의 이름은 겐야 카이. 30대 초반의, 겉으로는 우둔하게 보이지만 부모를 닮아 두뇌가 명석한 초년생 음악가이다. 수 년 전에 하이델베르크의 교회음악대학을 졸업한 그는 어서 바삐 일본으로 날아가 모국교회를 위해 오르간 반주자로 봉사하고 싶었지만, 일자리를 찾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뛰어난 연주자로 소문난 겐야는 다행히 하이델베르크 일원의 독일 개신교회와 가톨릭교회로부터 예배(미사) 또는 결혼식이나 장례식의 오르간 반주자로 청빙을 받아 시간당 사례비로 생활을 꾸려가고 있다.
일본에 대지진이 발생했던 지난 3월부터 겐야는 자신이 독자적으로 또는 독일교회가 주관하는 ‘일본돕기자선음악회’를 위해 홍보하랴 연주하랴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냈다. 아내와 나는 이따금 겐야를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기 위해 집으로 데려와 그가 좋아하는 비빔밥과 불고기, 또는 생선 요리로 식사를 대접하기도 한다.
나는 그를 바라보면서 그 눈으로 일본을, 일본 사람과 일본 교회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눈으로 그들이 우리에게 저질렀던 과거사를 떠올리며, 우리에게 행하였던 몹쓸 짓을 뉘우치거나 사과하지 않는다고 그들을 원망하며 성토하는 우리들의 수많은 눈초리들을 바라본다.
나도 한때 일본을 그런 눈초리로 바라보았던 한국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주의의 사슬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나는 일곱 살의 어린 소년이었다. 일제 36년 가운데 8년간의 어린 시절에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일제의 만행과 압박이 얼마나 심했고 그 삶의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컸던가를 낱낱이 들려 주셨다. 아주 어린 나이였으므로 대부분 잊어버렸지만 초중고등학교 시절 학교 교과서와 여러 미디어를 통해 다시 듣고 다시 알게 되었다.
극치에 달했던 일본의 만행은 3.1운동을 전후하여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길거리로 뛰쳐나와 시위하던 수많은 선남선녀를 살상하고 투옥했던 일들이었다. 경기도 화성에서는 백여 명에 가까운 교인들을 예배당(제암리교회) 안에 가두고 불을 지른 사건(23명 순국)이며, 17살의 여학생 유관순을 모진 고문으로 옥사시킨 일 등을 어떻게 일일이 다 나열할 수 있겠는가? 소년기와 청년기에 나의 뇌리와 가슴에 잠재하고 있었던 것은 ‘일본은 용서할 수 없는 철천지 원수’라는 고정관념이었다. 6.25 사변 때 이승만 대통령도 ‘총부리를 일본으로 돌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정도로 일본에 대한 구원(舊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나도 변하고 일본도 변했다. 모태 신앙자인 나는 어머니의 기도로 강하고 곱게 성장했고 또 그렇게 늙어가고 있다. 내가 변했다는 것은 일본을 바라보는 눈이, 세상 사람의 눈에서 주님의 눈으로 변했다는 뜻이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어야 한다. 그렇게 일본을 미워하고, 욕하고, 저주했던 눈초리가 긍휼과 사랑의 눈웃음으로 바뀐 것은 나의 조그마한 가슴 속에 예수님이 와 계시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3월, 일본에서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독실한 크리스천이라 자부하는 사람까지도 “그래, 잡신이나 섬기고 우상숭배하는 나라가 온전할 수 있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지!” 이렇게 한 마디씩 내뱉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한국의 어느 대형교회 성직자도 설교 중에 침을 튀기며 그런 저주스런 말을 했다고 한다. 심판을 받을 사람은 바로 그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지난 달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여자축구월드컵’ 결승전이 있었다. 세계 최강의 미국과 일본의 경기였다. 어머니가 살아생전 좋아하셨고 세 누이동생 가족이 사는 나라여서 그런지 어떤 스포츠, 어떤 경기든 나는 미국 편이었고 미국을 응원해 왔는데 그날만은 달랐다. TV중계를 관전했는데 두 팀은 문자 그대로 용호상박(龍虎相搏)의 땀을 쥐게 하는 경기를 펼쳤다. 경기 내용이나 기량에 있어서 미국이 훨씬 우세했고 해설가와 관중들의 대부분도 미국의 우승을 점쳤다. 그런데 연장전에 승부차기까지 이어진 결승 드라마는 일본의 3대 1 우승이었다. 일본이 우승하게 된 요인은 트레이드마크인 ‘단결력’이었다. 단결력을 무기 삼아 펼치는 그들의 뜀박질과 공차기는 감동 그 자체였다.
“저 애들이 수 세기 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의 후예일거야. 아, 자랑스러운 우리의 딸들!” TV 앞에서 나는 우승컵을 부여안고 환희의 눈물을 흘리는 일본 여자 선수들과 한 동아리로 되어 있었다. 밤이 깊은 그 시간에 겐야 카이는 주로 외국인 유학생인 기숙사 친구들과 일본의 우승을 축하하며 샴페인을 터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