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
창세기 1장 1절은 세상 어떤 책에서도 볼 수 없는 신비한 구절이다. 창조의 주체이신 하나님과 창조의 사실에 대해 아주 단순 명백하게 선포한다. 우주의 그 복잡한 모든 피조세계의 창조에 대해 누가 그렇게 간단하면서도 심오한 의미를 담백한 한 구절에 담아 낼 수 있단 말인가? 이 구절은 신적 기원이 아니라면 누구도 결코 이렇게 말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면 1절과 2절은 서로 어떤 관계일까? 이 창세기 1장 1절이 독립절인지 2절이나 3절의 종속절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관사가 없는 성경의 첫 히브리어 단어인 ‘베레쉬트’(bereshith, ‘태초에’)의 해석 때문이다. 관사가 없으므로 2절이나 3절의 종속형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부사구는 관사가 없어도 절대형으로 쓰이는 만큼 독립절이 맞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즉 학자 간 일치되지 않고 불분명하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해석이다. 우리 한글 성경들도 불분명하기는 마찬가지다. 우리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개역한글판, 개역개정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표준새번역),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신구교 공동번역)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얼핏 보면 독립절을 염두에 두고 쓴듯하면서도 여전히 1장 1절이 2절과 연관되어 창조의 첫째 날 우주의 기본들(물질, 시간, 공간)의 창조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창조에 대한 웅변적인 독립적 선포인지 우리 성경도 분명하지가 않다. 표현 자체가 해석자들 간의 뚜렷한 일치를 허락하지 않는 다는 말이다. 성경은 이 구절들에 대해 함부로 비약하는 겻을 분명 경계한다. 또한 1절과 2절 사이에 틈새를 만들어 해석을 덧붙이려 하거나 무엇 인가로 메꾸려 시도하는 것은 잘못하다가는 성경 외에 다른 것을 더 할지도 모르는(계 22:18) 위험한 유혹이요 시도이다. 아무리 중요한 주제라도 성경이 명료하고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해석을 멈추고 그대로 두는 것이 개혁신앙이다. 그렇게 시급하고 중요하면 인간이 서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셨을 것이다.
또 다른 신비도 있다. 여기서 명사 하나님(Elohim)은 복수형 주격(主格)이다. 왜 하나님을 복수형으로 표현했을까?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하나님(엘로힘)은 히브리어로는 복수형이나 우리말로는 단수이며 동사 역시 단수 동사 ‘창조하시니라’(bara: Qal,3,남,단,완)를 취한다. 즉 단수의 의미를 지닌 복수형 명사(단일-복수형, uni-plural)이다. 인간은 피조물이므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이 같은 본성적 신비에 대한 명확한 유비(analogy)를 피조세계에서는 찾아낼 수가 없다. 이 하나님의 삼위일체가 너무 신비롭기 때문에 인간의 미천한 머리로 굳이 이것을 좀 더 정교하게 해석하려고 시도하다가 그만 이단 시비가 걸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대개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 이 분야에 탁월한 학자들이 그만 삼위일체 이단 시비에 잘 말려들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은 삼위일체가 아니다. 그런 이유로 인해 누가 삼위일체를 해석하더라도 인간은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과 해석에 있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제한적임에도 인간은 하나님을 더 잘 알고 싶어하는 욕구와 창조주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 바르게 해석해야 할 당위성 때문에 신자들 뿐 아니라 신학자들도 고민하게 된다.
복수 형태의 명사 어미를 가지나 단수로 해석하는 단어는 엘로힘 이외에도 하늘(샤마임, 창 1:8), 물(마임, 창 1:6,7,7,9,10,20,21,22; 7장, 8장 참조), 생명(하임, 신 30:19; 렘 21:8,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물리적, 육체적 생명이 아닌 인간의 삶 등 좀 더 추상적인 생명) 등이 있다.
만일 엘로힘이 복수형이라고 일반적 언어 규칙을 따라 복수 동사를 사용하였다면 삼신론에 빠질 심각한 위험이 있었다. 하나님은 ‘엘로힘’이라는 특수명사를 통해 인간의 오류를 자연스럽게 막아주시면서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지극하신 위대함과 신비로움은 유지하시는 놀라우신 섭리를 인간에게 전해주신 거라고 본다.
그럼 창조의 시기는 언제일까? 창조의 시기는 명확히 우리가 알 수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이후 성경이 기록되었기에 동사를 현재가 아닌 완료형인 과거를 사용하였다고 여겨진다. 그것 만이 우리가 아는 시간에 대한 실마리일 뿐이다. 이 동사는 큰 바다 짐승과 각종 물고기와 공중의 새를 창조할 때 사용하였으며(1장 21절), 아담의 창조 시에도 사용하였고(1장 27절), 5장 1,2(niph.)절 등에 반복하여 사용되고 있다. 그 외에는 앗사(asah, 창 1:7, 16, 25, 26; 2장 4절)나 바나(창 2:22)나 야차르(시 94:9, 사 44:9,10)가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의 주어는 항상 하나님인데 특별히 사람 창조에 강조 되어 사용하고 있다. 사람은 우연한 존재가 아닌 하나님이 특별히 창조한 존재이다. 다른 생명체들과도 달랐다. 다른 생명처럼 같은 흙으로 창조되었으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존재였다. 그리고 이 1장 1절의 동사는 성경이 기록된 시점에서 볼 때 완료형이라도 사실 운행, 유지,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섭리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창세기 1장은 성서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많은 논쟁 거리를 남기고 있다. 성서신학자가 아닌 조직신학자로서 필자의 관심은, 창세기가 시작되는 이 중요한 부분을 왜 하나님이 누구도 인정할 만큼 명확하게 사람들에게 밝히지 않으셔서 사람들 끼리 서로 의견이 나뉘고 갈라지게 하셨는지 그것이 더 궁금하다. 이것(견해차) 때문에 너무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서로 갈라지고 미워하는 모습을 보면 가끔 너무 안타깝다. 여기에 이 구절 해석에 학문적 의미를 초월하는 신앙적 의미가 분명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 경륜 앞에 우리 인간은 자신의 견해가 옳다고 고집하기보다 더욱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자신 만이 옳다는 것은 오로지 자기만의 확신이요 자기 교만일 뿐이다. 참 된 믿음은 어떤 부분에서는 결정적으로 침묵하거나 명확히 알 수 있을 때까지 잠시 비워두거나 하나님께 맡기고 겸손히 고개를 숙인다. 올바른 해석도 중요하나 오히려 그 이상으로 겸손히 때를 기다리는 것이 참 믿음의 표현인 경우가 많이 있다. 때로 인간의 해석이란 그저 유치할 뿐이다. 성경은 전반적으로 어려운 책은 아니나 그리 단순하거나 간단한 책도 또한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일에 있어 자신이 스스로 성경의 최종 해석자요 심판자가 되려는 유혹을 이겨내고 신중해야 한다. 창세기 1장 1절은 판단자가 아닌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들에게 웅변적으로 그것을 가리키고 있다. ‘너희가 참 믿음이 있다면 때로는 하나님 앞에 조용히 기다리면서 머리를 숙이라’고(벧후 1:20-21).
* 이 글은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연구소’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