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이 칼럼 21
조선시대 여인들에게는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는 굴레가 있었다. 이것은 고대 중국으로부터 전해온 유교적인 산물로,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이유가 되는 일곱 가지의 허물을 말한다. 그 중에는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도 이혼을 당하는 사유가 되었다. 이것은 결혼의 이유를 종족 보존과 가문 번성에 두었던 전통사회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구약 성경의 족장 시대에도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커다란 불행이었다.
하나님께서 고향에서 아브람을 불러내실 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고 약속하였다. 그런대 어찌된 일인지 1년이 가고 10년이 가도 그토록 바라던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어느 날 환상 중에 말씀이 임하여, 하나님이 아브람의 방패와 지극히 큰 상급이라 하셨지만, 그는 자신에게 자식이 없으니 상속자는 집에 있는 다메섹 엘리에셀이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 말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고 네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셨다(창15:1-3). 그러나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기다리다 지친 사래는 남편에게 여종 하갈을 주어 이스마엘을 얻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다시 나타나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며,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또 사래에게는 사라라는 이름을 주시고, 아들을 낳을 것이며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너무나 기기 막혀서 웃으며 마음 속으로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을 할 것인가” 하였다. 하나님은 이삭이라는 아들의 이름을 주시며 자식을 낳을 것이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의 집에 세 사람의 손님이 방문하여 대접을 했더니, 손님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사라는 “내가 늙었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겠느냐”고 속으로 웃어버렸다. 하나님께서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14)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사라가 임신하여 드디어 아들 이삭을 낳았다! 사라는 웃으며 기뻐하였다.
자녀는 부부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다. 부모가 된 부부는 물심양면으로 자녀에게 정성을 쏟는다. 그런데 여기서 부부들이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자녀가 부모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 부부에게 하나님은 잔인한 주문을 하신다. “이삭을 바치라”. 사라에게는 얼마나 애지중지하는 아들인가. 이삭을 바치라, 이것은 믿음의 시험이었지만 자녀가 우상이 되어 버리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부부관계와 자녀관계에 하나님 중심으로 균형을 가질 필요가 있다. 유교 문화는 부부가 어떻게 행복하게 살 것인가가 아니라 자식이 부모에게 어떻게 부모를 만족시킬 것인가를 강조하였다. 예전 부부 관계를 보면, 아버지는 모든 정서적·성적 만족을 밖에서 다 채우고, 외로운 할머니의 시중을 들면서 효자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아야 했다. 어머니는 남편으로부터 해결되지 못하는 정서적인 충족을 아들을 통하여 얻고자 하였다. 남편은 어머니의 필요를 주고받고, 아내는 아들과 결핍을 서로 충족하여 삼각밀착관계가 이루어질 때 악순환이 된다.
다행히도 아브라함과 사라는 좋은 관계의 부부였다. 그래서 사라와 이삭이 밀착관계로 빠지지 않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은 이삭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해주었다. 삼각밀착관계는 가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면, 시어머니가 끊임없이 아들 부부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하는 것, 배우자로부터 정서적인 만족을 못하여 우울증에 걸리는 것,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 외도를 하는 것, 관심받지 못한 자녀들이 반항과 과격 행동하는 것 등으로 이어진다. 과잉 밀착관계에서 빠져나와서 부부관계를 회복해야지 건강한 가족관계를 이루어나갈 수 있다. 마마보이, 마마걸은 성숙한 부부생활을 할 수 없다. 부부가 행복해야지 자녀들도 행복하게 살게 해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