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이 칼럼 23
부부는 하나인가, 둘인가?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 즉 마음이 하나로 합하여 한 몸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고 상처투성이로 남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부부는 이심이체(二心異體)라는 말이 더 현실적인 것 같다. 타인으로서 남녀가 만나는 부부관계는 마음이 하나일 수 없고, 성에 따라 육체도 다르다. 이것을 인정하게 될 때 오히려 더욱 서로를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할 수 있을지 않을까 한다.
성경에서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은 신앙적인 배우자를 만나는 원리로 여겨진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가나안 족속의 딸이 아닌 그의 고향의 족속 중에서 며느리를 삼기를 원했기 때문에, 종을 메소포타미아로 보냈다. 종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들 부두엘의 딸인 리브가를 택하여 데리고 왔다. 이삭은 리브가가 도착하자 그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어가게 하고,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다. 이삭은 어머니 별세 후 마음이 쓸쓸하였었는데 그녀로 인하여 위로를 얻었다(창 24:67).
이삭은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지 못하자 아내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하나님께서 이삭의 간구에 응답하셔서 리브가가 쌍둥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리브가의 태에서 먼저 나온 아기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고 하였고, 후에 나온 아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야곱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삭은 네 명의 가족을 이루게 되었다(창 25:19-26).
하나를 이루며 행복하게 살 것만 같았던 이 가정이 나뉘었다. 리브가는 야곱과 짜고 이삭으로부터 에서를 대신하여 야곱의 축복기도를 받게 하였다. 에서는 동생 야곱의 소행을 알고 분노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작은 아들 야곱을 자기 오라비의 집으로 피신하게 하였다. 그 후 20년 만에야 야곱은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고, 마침내 형 에서와 화해를 하였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결혼했어도, 이삭과 리브가는 서로 달랐다. 이삭은 가나안에서 살았었고, 리브가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살았었다. 이삭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이었고, 리브가의 아버지는 부두엘이었다. 이삭은 신실한 신앙의 청년이었고, 리브가는 심히 아리따운 처녀였다. 이삭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였고, 리브가는 장막에 거하길 좋아하였다. 이삭은 우유부단한 면이 있었고, 리브가는 과감한 결단력이 있었다. 이삭은 에서를 좋아하였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다. 이삭은 남자였고 리브가는 여자였다.
예를 들면, 부부간에 이런 차이가 있다. 아내는 정해진 길을 가는 것을 좋아하고 남편은 매번 길을 바꿔 가는 것을 좋아한다. 아내는 허브차를 좋아하고 남편은 커피를 좋아한다. 아내는 밤을 좋아하고 남편은 새벽을 좋아한다. 아내는 질서정연한 것을 좋아하고 남편은 늘어놓는 것을 좋아한다. 아내는 도시를 좋아하고 남편은 시골을 좋아한다. 아내는 예술을 좋아하고 남편은 축구를 좋아한다. 그럼에도 아내는 남편을 좋아하고 남편은 아내를 좋아한다.
모든 면에서 다르더라도, 부부가 서로 가장 좋은 친구가 되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부부관계는 행복하게 유지될 수 있다. 결혼은 단지 한 남자와 한 여자와의 결합이 아니다. 한 남자의 익숙해진 습관적인 생활과 한 여자의 총체적인 과거의 만남을 포함한다. 그래서 각자 자신에게 굳어진 원칙들이 내재되어 있다. 부부가 서로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원칙에서 자유로워야 사랑할 수 있다. 자신의 원칙이 절대원칙이 되어 버릴 때, “헤어졌으면 헤어졌지 나는 이것을 절대 양보 못해”라는 생각 때문에 상대방을 수용하기 어려워진다.
이삭과 리브가는 서로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부부에게 결정적으로 자녀 문제에 있어서 영적 공유점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부부는 먼저 서로 적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부부는 행복한 부부가 되기 위해서 각자 자라오면서 내면화되어 있는 모든 판단 기준을 재검토하면서, 가정을 파괴적으로 이끌어가는 요소들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서로를 보듬을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