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선교의 이슈 중에 패러다임의 변화를 요구하는 내용은 선교집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주제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변화하는 선교”라는 책 속에서 데이비드 보쉬는 복음서의 저자 누가의 선교 패러다임을 몇 가지 제시하고 있는데, 한국 선교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여 필자의 소견과 더불어 나누는 것임을 밝힌다.
신약의 저자인 누가의 선교 패러다임은 현대 선교가 결코 어떤 조직의 개편이나 전략에 있기보다 좀더 개인의 영적 능력,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실천 능력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첫째는 성령의 사역 패러다임이다. 선교는 오직 성령께서 사역을 인도하시고 성령을 통하여 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 전환이 그 요건이다. 우리 주변의 소리, 외적인 요소나 기술이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략이 많아질수록 성령의 의존도는 약해지고, 합리적일수록 성령의 역사하심은 줄어든다. 구체적인 사역과 이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감당해야 할 것인지 온전히 성령께 의존하는 기도 작업이 필요한데, 이것은 자신의 계획이 아닌 성령의 뜻을 분별하는 선행작업이다.
특히 기도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기도 내용의 변화가 절실하게 요구된다는 것을 필자는 깊이 의식한다. 한국교회의 기도 내용, 선교사역을 위한 기도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기도한다는 것은 매우 깊은 영적 교제이기 때문이고, 기도는 우리를 행동하게 하기 때문이다. 성숙한 기도가 없이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누가는 유대인 선교와 이방인 선교를 상호 연결했다. 결코 분리하지 않고, 구분하지 않았으며, 배타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의 의미는 오늘의 선교현장에 매우 유익하다. 나의 선교현장은 대부분 구분된 사역을 생각 없이 진행한다.
국교로 인정받는 종교, 우리가 배척하는 이슬람, 불교 혹은 기타 타종교에 대한 무의식적이고 무지한 구분을 시도한다. 그리고 배척하는 태도를 일반적으로 지니고 있다. 지성의 성숙함이 필요한 것이라고 본다.
레슬리 뉴비긴은 타 종교와의 관계를 설정하면서, 선한 일에 협력을 할 수 있고 그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음을 말하며, 그들도 선교의 대상임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우리의 생각과 태도가 보다 더 훨씬 넓어져야 하는 것임을 느끼게 한다. 나의 소극적이고 편협한 무식함을 깨우치는 것이 곧 새로운 패러다임의 문제인 것을 알게 된다.
셋째는 정의의 실현이다. 마태는 일반적인 정의를 실현하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면, 누가는 경제 정의를 실천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그의 복음서에서 보게 된다. 소외된 자들, 가난한 자들에 대한 누가의 관심은 우리의 선교 패러다임의 방향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지나친 사회선교 방향으로 치우치는 것도 조심해야 할 일이고, 물질로 해결하려는 어리석음이 이러한 사역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보수주의 경건한 신앙을 이야기할수록 세상과 담을 쌓고 세상의 일에 무관심하는 태도를 보이게 되는데, 이것이 얼마나 편협한 사고인가를 깨닫게 된다. 경제 정의의 핵심은 나눔인 것을 배우게 된다. 오늘 불합리한 경제정책이나 정부시책에 인터넷 댓글이나 달고 비난을 하는 것은 누구도 할 수 있지만, 성경의 경제 정의를 가르치는 것은 영적 지도자의 책무이고 이것이 새로운 선교 패러다임이라는 것이다.
넷째는 화평함을 이루는 것이다. 악에 대한 비폭력저항, 증오와 복수의 무익함, 폭력과 테러와 전쟁 빈곤의 현실 속에 화평함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의 기도, 스테판의 죽음 앞에서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수가 존재할 자리가 없음을 웅변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선교의 실존적 본질임을 말하고 있다.
오늘날 수많은 선교지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요소들은 대부분 동료들간의 관계이다. 극도의 대립으로 인하여 서로가 파괴되고 깨어지는 관계가 일상화되어 있는 현실은 암담할 수밖에 없다. 선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것은 이러한 관계를 새롭게 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갈등의 구조는 역사 이래 인간의 숙제이다.
상호간의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은 현대인의 시각이지만, 예수님의 시각은 일방적이다. 자기들을 향하여 창과 칼을 든 자들에게 일방적으로 기도하고 선포한다. 여기에서 우리의 한계를 느끼게 되는데,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도할 일이다. 그리고 죽음으로서 화평을 극치를 이룬다. 화평은 죽음, 즉 개인의 희생과 파괴와 절망과 비난과 무시함을 딛고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보게 된다.
다섯째는 대적과 고난의 패러다임이다. 예수님의 사역과 제자들의 사역 속에 나타난 핵심은 대적과 고난이다. 핍박으로 특징되는 것은 바울의 사역이다. 바울의 사역은 적대감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죽음으로 그의 선교적인 일생을 마무리한다. 대적과 고난과 십자가,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이러한 패러다임이 누가의 주장이다.
오늘날 지역과 개인의 형편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현대 선교에서 대적과 고난의 의미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 가고 있다. 대적이 일어나지 않음은 세상과의 타협 때문이고, 고난이 일어나지 않음은 편리주의에 빠진 이유일 것이다.
우리의 시간과 몸과 물질을 복음을 위하여 사용하는 일에 고난을 거의 받으려 하지 않는 현대주의의 모습을 보게 된다. 현장을 누비다 보면 당하는 수많은 일들이 있다. 문화적인 충돌과 민족주의 낯선 곳에서의 외로움과 문명의 이기를 누릴 수 없는 답답함이 엄습해 온다. 일종의 고난의 행렬이다.
현장은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있다. 와서 도우라, 말씀으로 가르침을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상식만 가지고 있어 현장의 요구에 응답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다. 선교의 패러다임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라 나의 지성과 영성의 깨우침이고 거기에 대한 헌신과 노력인 것을 알게 된다.
현장의 소리, 세르게이(모스크바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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