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이 칼럼 31
세계 역사 가운데 여걸(女傑)이 종종 등장한다. 여걸이란 ‘걸출한 여자’를 말한다. 우리나라 역사 가운데 등장하는 여걸은 고구려와 백제 창업의 주역인 소서노, 최초의 여왕이자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선덕, 우리 역사 최초의 여장군 연수영, 고려의 자주성 지킨을 목종의 모후 천추태후 등을 꼽는다. 이들은 우리 민족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여성의 자취가 드문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도 여걸이 발견된다. 이스라엘의 네번째 사사인 드보라이다. 그녀는 잇사갈의 후손으로 랍비돗의 아내였다(삿 4:4). 그녀는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뒤, 예전에 사무엘 선지자가 라마와 벧엘 사이를 오가며 직무를 수행하였던 사마리아 남부 에브라임 산지의, 종려나무가 서있는 한 넓은 공중 집회 장소를 택하여, 그곳에서 법령을 베풀고 백성들을 재판하여 주었다.
당시 전 사사였던 에홋이 죽은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왕 야빈의 압제 아래 20년 동안 지냈다. 철병거 900대가 있는, 군대장관 시스라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드보라는 하나님의 명을 받고 이스라엘의 장군이었던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초청하여, 당시 가장 학대를 받고 있었던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들 중 1만 명을 뽑아 가나안 왕과 전투하기를 명하였다. 그러나 바락은 많은 부담을 가졌기 때문에 주저하면서 드보라에게 동행하기를 건의하였다.
드보라는 함께 출전하여 바락에게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주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에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 하는지라”(삿 4:14)고 했다. 바락이 승리의 확신을 갖게 되어 1만 명을 데리고 다볼 산에서 내려갔다.
그들은 드디어 산에서 내려와 시스라가 운집해 있는 평지로 돌진하였으며, 상대가 기습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가나안 병사들은 놀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더욱이 하늘에서 별들이 도와 거센 우박 줄기와 폭우가 쏟아짐으로 철병거도 무력하였을 뿐 아니라, 큰 우박에 맞은 적군들은 쓰러져갔다. 적장 시스라도 철병거를 버리고 도보로 도망하다 야엘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바락과 함께 승리한 드보라는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드보라에 비하여 남편 랍비돗에 대한 언급은 전쟁할 때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어미로서 걸출한 여인이었지만 그 남편은 평범하였던 것 같다. 일반적으로 남녀가 결혼할 때, 결혼 경사(marriage gradient) 현상이 일어난다. 이 현상은 사회학자 제시 버나드(Jessie Benard)가 「결혼의 미래」에서 언급한 것으로, 남녀 간에 배우자 선택 시 기울기가 생기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대체로 여성은 자신의 남편을 존경할 수 있기를 원하고, 남편도 물론 아내가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 그로 인해 여성은 키, 연령, 학력, 직업 등에서 자신보다 다소 우월한 위치에 있는 남성을 선택하게 되고, 남성은 자신과 비슷하거나 다소 열등한 위치에 있는 여성을 원하여 결혼 경사 현상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여성들은 결혼을 통하여 계층을 상승하고, 남성들은 매력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부분에서 자신보다 낮은 여성을 선호한다. 그러나 결혼 경사 현상은 자발적 독신의 증가와 여성들의 연하 남성에 대한 선호, 여성의 사회적 진출에 따른 경제력 증가가 그 의미를 퇴색하게 하고 있다.
랍비돗이 아내로부터 우월한 위치를 점유하기를 고집하는 사고를 가졌다면, 그 결혼생활은 불행하였을 것이다. 드보라가 사사로서 40년간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이 아내에게 임한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며 존중하는 관계에서 가능했다.
부부관계는 외면적으로 드러난 조건에서 파생되는 우열이 아니라, 내면적인 상호 존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인격과 몸의 존중에서 시작되는 가정의 행복은, 나라의 위기를 구하는 여걸과 영웅의 탄생을 가능하게 한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