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이 칼럼 35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은 외롭다. 그래서 가수 남진 씨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에서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백년 살고 싶다”고 노래하였다. 그리고 그는 “님과 함께라면 초가집에 사는 것도 좋다”고 하였다. 인간이 수명이 늘어가는 현대 시대에 있어서는 한백년 같이 사는 것이 뜬구름 잡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요셉은 외롭고 힘든 시절을 보냈다. 형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았다. 그래서 요셉은 멀리 외국 땅 애굽의 보디발의 집으로 오게 되었다.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 인정을 받아 가정 총무의 위치에 올랐다. 요셉은 어느덧 용모가 빼어난 청년이 되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반하여 눈짓하며 동침하기를 청하였다. 요셉은 이 여인의 요청에 “내가 어찌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하며 거절하였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모함하여 하인들과 남편에게 오히려 요셉이 자신을 희롱하려 했다고 죄를 뒤집어 씌웠다. 그래서 요셉은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이국땅에 사는 외로운 시기에 유혹이 왔지만 이를 이겨내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옥중에서도 은혜를 주셔서 간수장에게도 인정을 받았다. 간수장이 옥중죄수를 다 요셉에게 맡겼다. 감옥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들어왔다. 어느 날 아침에 요셉이 그들을 보니 근심의 빛이 있어 물어보았다. 이들은 각각 꿈을 꾸고 그 뜻이 무엇인지 몰라 고민하는 중이었다. 요셉이 하나님의 지혜를 힘입어 술 맡는 자는 사흘 뒤에 자리를 회복할 것이고 떡 굽는 자는 사형을 당할 것으로 해석해 주었다. 요셉의 해석대로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그는 요셉의 은혜를 잊어버렸다.
이 년이 지난 후 바로가 꿈을 꾸고 나서 해석할 사람을 찾았다. 바로가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렀으나 아무도 해석하는 자가 없었다. 이 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여 추천하였다. 요셉은 왕 앞에 와서 왕의 꿈을 다 해석하여 애굽에서 장차 일어날 7년의 흉년에 대비하라고 하였다.
바로는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임명하였다. 요셉이 아스낫과 두 아들을 낳았다. 요셉이 두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와 에브라임이라 하였다. 장남 ‘므낫세’는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의미였다. 차남 ‘에브라임’은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는 뜻이었다(창 41:50-52).
요셉은 버림받은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형들에게 버림당한 상처,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하며 받은 상처, 의롭고 순결하게 살려고 했는데 감옥살이하게 된 상처가 있었다.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받은 이런 마음의 상처의 흔적이 얼마나 컸으면 아들의 이름 속에 그 아픔이 묻어 있다. 아내는 그런 남편의 고통에 공감하였던 것 같다. 아스낫은 사랑으로 남편을 품을 줄 아는 여인으로 보인다. 아스낫은 따뜻한 사랑과 애정으로 감싸주면서 모든 고통에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준 여인이었기 때문에, 에브라임에 나타난 이름의 의미를 통하여 모든 상처를 딛고 일어서 요셉의 고백을 보게 된다.
요셉 뿐만 아니라 많은 남편들은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깊은 상처를 지니고 있는 나약한 사람들이다. 남편들에게 부모님에게 받은 상처, 형제에게 받은 상처, 직장에서 무능력자로 낙인찍혀 받는 상처, 친구들에 의한 상처, 열등감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한 상처 등이 있다. 아내들은 남편의 심정을 알아주고 동참할 수 있는 여인이 되어야 한다. 과거의 아픔이 있다면 부부는 서로 애정을 가지고 어루만져야 한다.
아내의 헌신된 사랑, 포근한 어머니와 같은 사랑을 받는 남편이 영육이 건강한 남성으로 일어서게 된다. 그러면 부부는 백년해로를 하는 것이다.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