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이 칼럼 38
역사적으로 종교의 타락은 국가나 사회의 타락의 심각성을 대변한다. 사회적 모범이 되어야 할 종교적 지도자의 도덕성 추락은 그 사회의 도덕불감증 정도를 나타낸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폭력과 관련된 범죄의 만연은 사회와 구별되지 못하는 기독교의 책임이 크다 하겠다.
사사 시대에 사회의 풍조를 따라 살았던 레위인과 그 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시대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고 자기 소견대로 행하여 타락, 징계, 회개, 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망각이 다람쥐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때였다. 에브라임 산지 구석의 한 레위인이 첩을 얻었다. 그 첩이 또 다시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베들레헴에 있는 친정집으로 가서 넉 달 동안 있었다(삿 19:1-2).
레위인은 그 첩을 잊지 못하여 첩을 데리러 예루살렘으로 갔다. 첩의 친정으로 가니 장인이 레위인을 기쁘게 맞았다. 그는 장인의 집에서 삼일 동안 먹고 마시며 보냈고, 장인의 간청에 넷째 날과 다섯 째 날도 그렇게 보내다가 해가 막 기울기 전에 떠났다(삿 19:3-10).
레위인이 길을 재촉하여 여부스에 이르렀을 때 해가 지려 하자, 종이 그 성읍에서 유숙하자고 말하였다. 그러나 레위인은 이방인들 가운데서 유하는 것을 원치 않아서, 예루살렘을 지나 기브아나 라마로 가자고 하였다. 그들은 기브아에 유숙하기로 하였다. 그곳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하는 곳이므로, 그들은 기브아 사람들이 나그네를 영접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였다. 예상과는 달리 당시 기브아 거민들은 그들에게 호의적이 아니었다.
그곳에 있던 에브라임 산지 출신의 한 노인이 레위인 일행을 대접하였다. 그런데 남색에 눈이 먼 베냐민 지파의 비류들이 레위인을 요구하였다. 노인이 자신의 처녀 딸과 레위인의 첩을 내어주겠다고 하였으나 그들은 거절하였다. 이윽고 레위인이 그들에게 첩을 끌어 내어 주자 그녀를 밤새 강간하여 죽였다(삿 19:16-26)
레위인은 자기 집으로 시체를 가지고 갔다. 그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첩을 비류들에게 내어준 것에 대한 회개는 하지 않고, 자신이 당한 봉변에 악을 품고 첩의 시신을 열 두 덩이로 나누어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었다(삿 19:27-30).
분노에 찬 이스라엘 연합군은 베냐민 지파와 싸움을 하였다. 연합군은 무려 15배의 수적 우위의 병력에도 불구하고 두 번이나 패하였다. 결국 싸움이 장기화됨으로 엄청난 피해가 양측에 있었다. 베냐민 지파는 장정 600명만 남았다. 골육상전(骨肉相戰)의 비극이었다.
레위인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 올바로 서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가정이 무너지면 부부관계는 물론 자녀들이 무너지고 사회가 흔들린다. 기독교인의 성결한 삶의 시작은 바로 가정이다. 첩은 반복된 행음을 저지르고 친정으로 갔고, 레위인은 다정하게 첩에게 말하며 데려오고자 하였다. 어디에도 율법에 의한 회개나 반성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장인은 자신의 딸을 돌이키려고 애썼는지 모르겠으나, 사위의 마음만을 달래고자 노력한 것 같이 보였다. 레위인은 자신의 비정함과 비겁함을 직시하지 않았고, 자신의 분노로 민족끼리의 싸움을 부추겼다. 이스라엘의 연합지파는 레위인의 말에 의해 앞뒤를 살피지 않고 분노에 휩싸였으며, 베냐민 지파는 기브아 비류들의 범죄에 대하여 묵인하고 지파의 자존심만 옹호하다 화를 자초하였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첩을 찾는 남편들, 불륜을 반복하는 아내들, 집단 성폭행에 버려지는 여인들, 지역이기주의, 무익한 당파싸움, 민족 공멸의 전쟁 등은 사사 시대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기독교 가정들은 영적으로 더욱 깨어 도덕불감증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