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조상은 누구인가? 셈의 후손 아르박삿

김진영 기자  jykim@chtoday.co.kr   |  

노아 후손들은 어디로 갔을까?(14)

▲조덕영 박사.
▲조덕영 박사.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창세기 10:22)

아르박삿 후손들의 정착지

셈은 홍수 후 2년 아르박삿(Arphaxad)을 낳았다. 아르박삿은 셈의 다섯 아들 가운데 엘람과 앗수르에 이어 세 번째로 기록된 이름이다. 다른 계보와 달리 셈과 그 아들 아르박삿에서 아브라함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민족의 족보에는 다행스럽게도 그 조상들의 생존 연대가 기록되어 있다. 아르박삿은 35세에 셀라를 낳았고 그 후에도 403년을 더 살아 총 438년을 살았다. 셀라는 에벨을 낳았고 에벨은 벨렉과 욕단이라는 두 아들을 낳았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아르박삿은 438년을 살면서 셀라 말고도 당연히 많은 자녀를 낳았을 것이다(창 11:13).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경은 그 구체적 부분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성경의 족보는 이제 주로 셈의 후손 아브라함을 향한다. 즉 셈의 후손 가운데 아르박삿이 아브라함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 성경이 우리 인류에게 알려주려는 요점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을 부르는 히브리인이라는 이름은, 과거에는 좀 더 광범위한 영역을 지칭했던 듯하다. 이스라엘이 히브리 족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아르박삿의 후손 에벨의 이름에서 기원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참조, 창 14:13). 그렇다면 고대 히브리인이라는 이름의 출발은 단순히 아브라함 후손만이 아니라, 고대 중동에서 보다 더 광범위한 족속을 일컫는 말이었음이 분명하다. 주전 18세기의 유물로 알려진 1933년 패롯(Parrot)에 의해 텔-하리리(Tell-Harriri)에서 발견된, 소위 마리(Mari) 토판에는 하비루족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하비루는 칼데아(Chaldeans) 사람들의 조상이었다. 이것은 주전 15세기 중엽 시대의 기록인 누지 토판(Nuzi tablets)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누지는 니느웨 남동쪽으로, 이 토판에는 칼데아의 창시자를 아립-허라(Arip-hurra)라고 표현하고 있다. ‘히브리’라는 명칭은 바로 여기에서 왔음이 분명하다. 즉, 유대인들의 또 다른 별칭이 되어 있는 히브리인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아브라함 이전부터 광범위한 지역에 살던, 아브라함의 선조인 에벨의 후손들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 후손들 가운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이 번성하면서 히브리인이라는 명칭은 이스라엘 후손들을 가리키게 되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선조 아르박삿의 후손들은 주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물줄기를 중심으로,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살았다고 볼 수 있겠다.

아르박삿 후손 셀라와 가이난의 미스터리가 주는 교훈

아르박삿은 35세에 셀라를 낳았다(창 10:24; 11:12; 대상 1:18; 24).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아르박삿과 셀라 사이에 가이난(Cainan)이 등장한다(눅 3:35-36). 아르박삿이 35세에 셀라를 낳기 전 가이난을 낳았던 것은 분명하다. 앞에서도 설명했듯 아르박삿은 많은 자녀를 낳았을 것이다(창 11:13). 그럼 이 가이난은 누구일까? 누가복음의 계보대로 가이난은 셀라의 부모란 말인가? 성 어거스틴은 <신국론>에서 불가타, 즉 칠십인역의 라틴어역본을 인용한다. 불가타 성경을 따를 경우, 아르박삿이 셀라를 낳은 게 아니라 아르박삿은 135세에 가이난을 낳았으며 가이난은 130세에 셀라를 낳았다. 셀라-에벨-벨렉-르우-나홀로 이어지는 출생 연대도 맛소라 사본과 칠십인역은 전혀 다르다. 불가타 성경을 따를 경우 홍수로부터 아브라함까지는 1070년이 된다. 히브리 사본으로는 그 연대가 훨씬 단축된다. 이 골치 아픈 논란을 수습하기 위해 일부 학자들은 누가복음 기록(눅 3:36)의 실수설을 주장한다(창조과학자 헨리 모리스 등).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은 정확무오한 성경을 믿는 보수 신앙을 훼손할 수 있는 중대한 문제이다. 성경의 난제가 어디 한두 군데 뿐이던가? 그것을 모두 성경 필사자의 실수라는 식으로 몰아가다 보면 그것은 성경이 아니다. 성경의 내용을 무조건 문자적으로 믿는 것도 위험하지만 반대로 해석이 곤란하다고 함부로 필사자 실수로 몰고 가는 것은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위험한 발상이다. 난해한 구절은 난해한 상태로 수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적합한 때에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그 난해한 구절에 빛을 비추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바른 태도이다.

누가복음의 예수님 족보에 가이난이 왜 삽입된 것인지, 아직까지 이 문제를 정확하게 풀 수 있는, 성경의 결정적 실마리는 없다. 하지만 무조건 필사자의 실수라고 단정하는 것을 옳지 않다. 어찌 필사자가 사람 족보의 인물을 아무 이유 없이 무심코 삽입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일은 평범한 우리 민족의 족보에서조차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위경(Pseudephigrapha) 요벨서 8장에는 가이난이 아르박삿의 아들로 도시로 나가 점성술사의 가르침을 받고 일월성신의 징조로 점을 쳐 범죄한 자가 되었다고 했다. 위경의 내용을 사실로 수용할 수는 없으나, 가이난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장자권을 상실했음은 분명하다. 즉 가이난은 분명 셈의 계보에 있던 인물이었고, 무슨 이유인지 구체적으로는 모르나 그가 영적·육적 이유로 장자권을 상실하였다고 보는 것이 바른 해석이라고 본다.

이 미스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해석학의 중요성을 암시하고 있다.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사사로이 풀 수 있는 책이 아니다. 기도하면 모든 것이 그저 술술 풀린다는 단세포적인 생각과 미혹이 얼마나 많은 이단과 사이비들을 만들어 왔는지 잊지 말아야 한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있는 죄악된 세상에서, 인간이 성령의 생각을 바르고 깊게 아는 일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은혜의 통로가 필요하다. 때로는 신앙의 선배들이 노고로 이룬 해석과 열매들을 참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깊은 통찰과 기도와 연구 아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할 때도 있다. 하나님은 가이난의 삽입을 통해 성경이 단순한 책이 아님을 보여준다. 성경은 최고의 성경학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평생을 파내도 마르지 않는 샘처럼 신비한 영성이 늘 넘쳐난다.

아르박삿 후손 벨렉과 욕단

1) 아브라함의 조상 벨렉과 바벨탑 사건

성경은 에벨(Eber)의 후손 벨렉-르우-나홀-데라-아브람의 경로를 통해 아브라함의 직계 조상들의 이름을 남기고 있다(창 11:16-26; 대상 1:19-25; 눅 3:35). 벨렉은 아브라함의 직계 조상일 뿐만 아니라 벨렉의 때에 세상은 나뉘었다(창 10:25; 대상 1:19). 즉 바벨탑 사건 이전 인류는 구음(口音)이 하나요 언어도 하나였다(창 11:1-2). 그럼 홍수 이전 최초 언어는 어떤 언어였을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 어원이 고대 셈어에 남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들은 그 셈어 가운데 주로 히브리어에서 태초 언어의 원형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특별히 고유 명사 등에 있어서는 홍수 이전 언어와 홍수 이후 바벨탑 사건 이후 흩어진 언어 사이에 변동 폭이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이다. 이 태초 언어의 원형은 언제나 회복될 수 있을까? 성경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 일어난, 놀라운 언어 통합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어떤 암시와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렇게 바벨탑 사건 이후 인류가 온 땅으로 흩어진 때를 성경은 벨렉 시대부터였다고 알리고 있다(창 11:8-9).

벨렉의 시대 인간은 빠르게 세속화되었다. 사람들은 홍수 교훈을 쉽게 잊어버렸으며, 참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피조물을 섬기기를 시작했다. 신은 어느 새 인간의 모습으로 대치되었으며,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과 세상의 중심에서 배제되었다. 사단의 미혹이 지속적이라는 것을 인간은 간과하였던 것이다. 이때 영육 간에 남보다 뛰어났던 함족의 니므롯은 영웅이 되었고 초대 지도자가 되었다. 세속화된 지도자를 중심으로 멋지고 거대한 탑이 구상되었다. 탑은 영적이면서도 문화적이며 어떤 홍수도 이겨낼 만한 견고한 최신 과학이 모두 동원된 건축물이었다. 강림하신 하나님은 이 바벨탑을 보시고 사람을 모두 흩으셨다(창 11:5-9). 하나님이 사람을 흩으신 방법은 바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신 방식이었다. 홍수 이전 언어의 원형은 셈의 일부 후손들에게만 남겨졌으며 언어는 다양해졌다. 인류는 그 흩어진 언어를 따라 민족과 나라를 구성하면서 온 세계로 흩어졌다.

2) 아브라함 조상 벨렉보다 번성한 욕단의 후손들

벨렉이 30세에 낳은 아들 르우만 성경에 그 자녀 이름을 남긴 데 반해 에벨의 다른 아들인 욕단(Joktan)은 13명의 아들들이 있었다(창세기 10:26-30). 알모닷, 셀렙, 하살마왯, 예라, 하도람, 우살, 디글라, 오발, 아비마엘, 스바, 오빌, 하윌라, 요밥이 그들이다. 이들이 사는 땅은 메사(Mesha)에서 동쪽 산간 지역 스발까지였다. 이들 종족이 지금의 어느 민족을 말하고 이들이 거주하던 지역이 현재의 어디를 말하는지 명확히 밝히는 것은 어려우나, 성경은 이들이 종족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별로 흩어져 살았다고 했다(창 10:31). 금으로 유명한 오빌과 사베안족과 연관된 스바의 지명을 참고할 때, 많은 학자들은 이들이 아마도 오늘날 아라비아 땅에 주로 정착했다고 보고 있다. 성경이 벨렉의 후손들과 달리 욕단의 후손들 이름을 이렇게 상세하게 거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은 분명 욕단의 형 벨렉도 르우 말고도 많은 자녀를 낳았음을 우리들에게 알려준다(창 11:18-19). 239세를 살았던 벨렉은 아마 조상인 셈-아르박삿-에벨처럼 지금의 우리들보다 훨씬 많은 자녀들을 양육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르우 이외 벨렉의 자녀들 이름은 생략하고 동생인 욕단의 자녀들만을 소개하고 있는 걸까? 그 구체적 진실은 알 길이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창세기 기자가 성경을 기록할 당시 욕단의 자녀들은, 벨렉의 다른 자녀들과 달리 많은 이들에게 익히 알려진 족속이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은 셈족 또는 셈족 아르박삿의 후손인가(셈족이 영육 간에 복을 누린다는 착각과 신화에 대해)?

우리 민족을 셈족으로 비정하는 주장에는 세 줄기가 있다.

먼저 심정적으로 막연히 셈족으로 보는 경우이다. 아시아인인 이스라엘 민족이 셈족이요, 한때 페르시아제국을 이루었던 오늘날 이란의 조상인 엘람족이 셈족이요, 지금의 이라크 땅의 주인이었던 대제국 앗수르의 주인공도 셈족이므로, 같은 아시아 민족인 우리 민족도 당연히 셈족일 거라고 여기는, 심정적 셈족설이 있다. 하지만 이 주장에는 어떠한 성경적·인종학적 결정적 증거가 전혀 없다. 오히려 창조과학자 헨리 모리스는 우리 한민족을 함족으로 비정한다. 물론 이것도 성경적 근거가 있는 주장은 아니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의 단 지파를 우리 민족의 조상이라고 보는 주장이다. 이 견해는 “단군”과 “단”지파의 언어적 유사성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단 지파의 오랜 무대는 가나안 땅이었다. 야곱의 다섯 번째 아들이요 야곱 아내 라헬의 종 빌하가 낳은 첫 번째 아들이 단이었다. 출애굽 시 성막 제조를 도왔던 아히시막의 아들 오홀리압(출 31: 6)이 단 지파였으며, 사사 삼손도 단 지파였다(참조: 삿 13-16장). 야곱의 축복 가운데 단은 독사로 말의 발굽을 물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다(창 49:16-17). 이 예언을 통해 단 지파는 싸움에 능하고 싸움에 직면할 처지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모세는 단을 ‘바산에서 뛰어 나오는 강한 사자 새끼’(신 33:22)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 예언처럼 단 지파는 요단강 동편에 있는 바산 부근의 한 지역을 점령하였다. 처음 단 지파는 유다와 에브라임과 베냐민 사이의 한 지역과 해안 평야 지대를 분배받았다. 가나안 정착 이후 왕국 시대 이전까지 단 지파는 이렇게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있었다(수 19:40-47). 이렇게 야곱과 모세의 예언대로 단 지파는 늘 블레셋과 아모리 족속과 충돌하면서 전쟁에 노출된 지파로 살게 되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스라엘의 12지파 가운데 오직 단 지파만이 하나님의 종들 144,000명의 명단에서 누락된 것을 볼 수 있다(계 7:4-8). 단 지파는 여로보암 왕 시절 우상 숭배에 열심이었던 지파였다(왕상 12:29). 단 지파는 에브라임 중심의 북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우상의 미혹을 뿌리치지 못한 지파가 되었다. 에브라임 중심의 북 10개 지파가 사마리아인으로 변질되어 가는 과정에서 단 지파는 더욱 하나님 눈 밖에 나게 된다. 그렇게 단 지파는 신약의 요한계시록에 와서 12지파 명단에서도 탈락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사라진 그들 단 지파가 우리 한민족 조상 단군이 되었다는 것은 아무런 논리적 근거가 없는, 너무 큰 비약이다. 설령 단군이 단 지파라 하더라도, 그것은 명예가 되기는커녕 우리 한민족이 비운의 민족이라는 멍에를 덧입을 뿐일 것이다. 일부 일본인들조차 자기들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비운의 단 지파의 후예들이라고 우기고 있으니, 참으로 애처롭기만 하다. 우상 숭배로 인해 12지파 가운데 요한계시록에서도 제외되고 하나님 공동체와 멀어진 비운의 단 지파가 그리도 좋을까? 

마지막으로 욕단을 언어적 유사성으로 인해 우리의 단군에 비정하는 주장도 있다. 이것도 우리 민족을 셈족 욕단 후손이라 전제하고 억지로 모든 것을 거기에 맞추려는 위험한 접근 방법의 하나일 뿐이다. 그렇게 억지로 우리 민족이 셈족 가운데 언약의 사람 아브라함의 후손도 아닌, 곁가지에 불과한 욕단 후손이라는 황당한 꿰맞추기 주장이 민족사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으며 무슨 자부심이 될까?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적 할례자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 마음의 할례가 참 할례가 된 것이다. 아브라함의 조상들도 달신(月神)을 섬기던 우상숭배자들이었다.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마엘과 에서도 야곱의 후손들과 달리 여호와 하나님과 멀어졌다. 심지어 육적 아브라함 후손들은 오늘날 대부분 그리스도 예수를 메시아로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오늘날 셈의 후손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제대로 따르는 민족이나 국가는 없다. 지극히 소수의 개인만이 그리스도인일 뿐이다. 육체적 셈족이 영육 간에 복을 받는다는 신화와 착각에서 빨리 벌어날 필요가 있다. 아무 근거도 없이 굳이 우리 민족을 아브라함 계열도 아닌 욕단의 후손이라 복을 누린다는 착각과 신화와 집착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욕단에게는 육체적 할례 언약조차 없었다. 육체적 할례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 후손들(유대, 이스마엘, 에서 등)조차 신앙과 멀어진 현실을 보라! 지금까지 노아 후손들 행로를 추적해 볼 때, 우리 민족의 큰 줄기는 셈의 계열이 아닌 야벳 족의 흐름을 따라왔다고 본다. 역사는 신앙이 오히려 이방 야벳의 땅에 씨가 뿌려지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음을 보여준다. 육체의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요 믿음의 할례가 필요하다. 이방인의 사도가 된 사도 바울이 전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유대적 할례의 현대적 의미와 적용

유대적 할례는 결국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이요 그림자(모형)였다. 따라서 육체의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가 더욱 중요하다(롬 2:29). 할례는 유대인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중동의 모든 이스마엘의 후손들(대부분의 아랍인들)과 에서 후손들에게도 적용된 육체적 언약이었다. 은혜 시대 하나님은 이 할례 언약의 진정한 의미를 그리스도를 통해 알려주셨다. 바울이 볼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한 육체적 할례가 아닌 믿음이 언약의 근거였다(롬 4:9-12). 예레미야도 할례 받은 사람의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렘 4:4). 그러므로 신자는 이제 육체적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받아 정결해져서 하나님이 맡기신 일에 소명을 다해야 한다(롬 2:29). 세례는 할례를 대신하고 있으며(골 2:8-15) 바울과 히브리서 기자도 할례를 부정하지는 않으나, 육체적·의식적 징표가 하나님 언약의 조건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제는 육체적 할례보다 새 언약의 징표인 떡과 잔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고전 11:25).

둘째, 할례의 위생상 효과에 대해 너무 과장되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 할례의 본 목적은 분명하다.  그것은 하나님과 믿는 자녀의 언약의 관계이다. 다시 말하면 구속적 은총과 관련된다. 자연적 은총은 부차적인 것이다. 그것도 할례의 위생상 효과는 지극히 작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위생상 극히 중요했다면, 하나님은 믿음의 자녀들에게 계속적으로 할례를 요구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위생상 효과를 그리 강조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가나안 지역의 고대 풍토에서는 약간의 위생적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할례 받지 않아도 위생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수천 년 할례 없이 살아온 우리 민족이 할례에 익숙했던 중동과 아프리카 사람들보다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일부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는 근본주의자들처럼 할례의 위생상 효과를 너무 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마지막으로 할례보다 중요한 것은 새 언약이다. 지금은 할례의 시대가 아니다. 은혜의 시대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완성하였다. 마치 안식일이 주일로 바뀐 것처럼 그리스도가 새 언약의 주인이 되었다. 할례 언약이 영적으로든 위생상으로든 신약 시대에도 중요하다면, 그리스도께서 한 번쯤은 말씀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 새 언약을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므로 할례의 율법이 아닌 사랑의 율례인 성례를 제정하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주님의 떡과 잔을 먹고 마시며,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미 계시하였던 그 새 언약(렘 31:31)의 십자가 사랑을 기억하고 할례의 참 뜻을 기려야 한다.

아르박삿 후손들의 미래

모든 셈의 후손들이 아르박삿의 후손들은 아니다. 또한 모든 아르박삿 후손들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아니었다. 모든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스라엘 민족이 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도 아니다. 명목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하나님의 자녀일 거라는 착각도 버려야 한다.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며 거짓 선지자 노릇하는 이단·사이비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마 7)! 명목상의 아르박삿 후손이나 이스라엘 민족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만 전도하면 종말이 온다는 착각에 빠지지 말라.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은 차별없이 오직 하나님의 참 자녀를 찾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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