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정리하며 새해를 계획하는 일에 있어서, 회고와 전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러시아 사역 현장을 살펴봄으로써, 타산지석이 되고 한국선교에 이정표 역할을 하였으면 하는 마음으로 몇 자 적는다.
다시 말하면 한국교회 선교는 현장을 위한, 현지 교회를 위한 사역이 되어야 한다. 현대선교는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 교회가 존재하는 지역에서 진행한다. 현지 교회가 연약하고 부족하고 조직적이지 못하고 약한 것이 것이 문제이지만, 그래서 이러한 일에 협력하고 지원하고 굳게 서 가도록 돕는 사역이 되어야 한다. 기득권과 연관이 있는 일이다.
오늘의 관계가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러시아에는 지방으로 나갈수록 우크라이나에서 투자하여 세운 교회들이 수없이 많다. 90년대 초 자유의 물결이 밀려올 당시에, 수많은 사역자들을 보내면서 교회를 건축하고 사역을 했다. 이제는 교회가 있는 곳만이 살아남아 활성화되어 있고, 여기저기 매우 활발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것을 본다.
한국교회도 이처럼 어디를 가나 사역자를 보내고 건물을 세워서 놀라운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 듣게 된다. 소수의 교회가 많은 일을 행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일에 몇몇 교회가 함께 협력하여 현장을 위한 일을 진행해야 한다. 이는 현장을 사유화하지 않고 공공화를 시키기 위함이다. 기득권 포기이다.
기득권 버려야 할 악습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고집이 세어지고 기득권을 누리려는 허세가 강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것이다. 누구에게나 기득권을 갖고 싶은 마음은 동일할 것이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일수록 내려놓게 되어 있다. 우리는 경제성장, 외적인 성장에 비하여 너무나 미성숙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현장에서는 적어도 그러한 것을 느낀다.
기득권이 발전하면 사유화가 시작된다.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자본주의의 병폐인 사유화 열풍이 분다. 지금까지는 잘 모르고 이를 진행하여 왔다면 이제는 공공연하게 하고 있다. 교회를 한 지도자가 좌지우지하는 것은 대표적인 사유화의 모습이다.
정년법을 어겨가면서도 명예와 물질을 움켜쥐려는 태도에, 젊은 학생들이 지속적인 개혁을 요구함에도 꿈쩍하지 않는 현재의 모습은, 한국교회와 자라나는 후세들을 모멸하는 천박하고 불쌍한 행위다. 전근대적인 사고와 습관이 굳어진 것인데 이것이 기득권이다.
설교의 사유화는 진리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이 너절한 이야기로 시작하여 개인의 가정사까지 늘어놓으면서 진리를 왜곡하는 행위이다. 누가 이러한 일에서 자유할까 싶지만, 적어도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전반적으로 보면 설교의 사유화가 강하다.
대부분 설교자가 원하는 것을 설교하고 준비한다. 성도들의 입장에서, 혹은 현 시대의 상황이 요구하는 일이나 어떤 규칙을 설정한 설교가 아니다. 이것이 설교의 사유화가 아니고 무엇인가?
현장에서 어느 단체는 열심히 기도하고 일꾼을 훈련시켜 사역자로 세웠다. 그리고 그들이 성장하여 이제는 총회를 결성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을 키운 선교사들은 이제 그들이 활발하게 사역하는 것을 미심쩍게 생각하고, 자기들의 생각대로 순종하지 않는다고 비협조적이다. 무엇을 어떻게 순종할까 질문해도 이유없이 거절한다.
이것이 이해관계를 떠나서 사역자가 할 일인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왜 이 땅에 와 있는가? 질문하고 싶다. 이제는 오히려 방해꾼이 되어간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기득권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기득권은 어느 사회건 가장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적어도 신앙의 세계에서는 사회를 앞서가야 하지 않겠는가?
요즘 신학계에서는 “새 관점”과 “옛 관점”이라는 논제로 학문적인 다툼이 일어나고 있다. 요즘 식으로 “보수냐 진보냐”로 말할 수 있을지. 새 관점을 이야기하면 진보 혹은 급진주의식으로 평가하기 쉬울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일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매 시대마다 탁월한 학자들이 나타나 학문의 세계를 변형시키고 진리를 더 깊이 깨닫게 한다. 기득권을 주장하면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
기득권은 현지 지도자와 관계, 양육하고 있는 제자와의 관계 등에서 나타난다. 소위 갑의 행세를 하면서 모든 것을 지시하고 순종하기를 원하는 태도이다. 단순히 물질적인 도움을 준다는 이유로, 혹은 제자였다는 것을 빌미로 기득권을 행사하는 태도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것을 버려야 한다. 성숙한 태도로 나가야 하는데 굳어져 버린 생각과 습관들이 이를 포기하기 어렵게 한다. 아무리 큰 역사(?)를 이루었다 해도 이러한 관계가 정립되지 않으면, 한국선교는 아직도 미성숙한 채로 남을 수밖에 없고 배척당하는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기득권은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서도 나타난다. 영웅시하고, 타인에게 인정받으려 하고, 자기의 공로를 나타내려 하는 태도이다. 공공의 일을 개인의 공로로 사유화하려 한다면 또 다른 기득권의 모습이다. 러시아에서는 찬송가를 공공으로 발행하던 때가 있었다. 세월이 흘러 발행위원들이 거의 현장을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직분은 그대로 가지고 있던 태도나,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개인적으로 찬송가를 발행하려는 태도는 또 다른 기득권의 모습이다.
공동체를 파괴하는 이러한 기득권이 수많은 사역 현장에서 얼마나 기승을 부리는지 모른다. 이러한 일은 언제든지 있었고,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마는, 이제 좀 성숙한 태도로 나가지 않으면 역시 현장에서 배척당하고 현장을 파괴하는 일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이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대처하여야 한다. 내가 보낸 사역자가, 우리가 보낸 사람이, 무슨 큰 일을 해낸 것처럼 자랑스러워하고 만족하면서 사사로이 물질로 후원할 일이 아니다. 결국은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바르고 공의롭게 판단하여야 한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으로 내어보내면 안 된다.
안락함을 포기하는 기득권
사역은 발로 뛰는 것이다. 이것은 안락하고 익숙한 환경에 대한 기득권을 내어놓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바라는 것은 이미 시대에 뒤처진 사고방식이라고 본다. 갈수록 디지털 사회가 되고 그로 인하여 사람들은 게을러지게 되어 있다. 현장 사역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발로 뛰면 일이 보이게 되어 있다. 실제적인 기도제목이 생기게 되어 있다. 사역의 지경이 넓어지게 되어 있다. 정신과 영적인 건강도 좋아지게 되어 있다. 그런데 현장의 사역자들은 너무나 게으르다. 타성에 젖고 안일함에 젖어 있다. 안락함을 누리고 즐긴다. 현장은 우리를 부르며 손짓하고 있다. “와서 도우라.” 그러나 사실상 갈 사람이 없다. 준비가 안 되어서, 혹은 바빠서, 또는 길이 멀어서, 여러 가지 이유가 많다. 일종의 기득권을 누리는 행위가 아닌가?
협력의 시대이다. 협력은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한국교회 훈련기관에서 소위 갑이라고 하는 지도자들이 협력의 의미를 이해하고, 조직하고 훈련하고, 국내에서 협력의 장을 마련하여야 한다. 현장을 향하여 외치는 소리는 허공에 외치는 식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좀 생각하고 협력을 이야기하면 좋겠다. 지도자의 영역에서 누리는 기득권을 좀 내려놓기를 바란다.
이론적으로 합당하고 그럴싸하지만, 정녕 현장에서 협력할 만한 일들이 없다는 것을 얼마나 아는지 모르겠다. 모든 일은 외침이나 구호로 되는 것이 아니다. 협력의 조건이 맞을 때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기본기부터 훈련하고 파송하여야 한다. 협력의 장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많은 노력과 대가 지불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것 없이 협력만 이야기하니, 허허 참, 허탄하다. 시간의 굴레 속에 살아가기에, 또한 새해라는 이름으로 변화와 성숙을 기대하며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장의 소리, 세르게이(모스크바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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