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선영 칼럼] 슬픔이 무의식을 점령할 때

김은애 기자  eakim@chtoday.co.kr   |  
▲강선영 박사(한국상담심리치료센터 대표, 한국목회상담협회 감독).
▲강선영 박사(한국상담심리치료센터 대표, 한국목회상담협회 감독).

내 어릴 때 기억들이 대부분 슬픔의 빛깔을 띠고 있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봄이 되면 화사한 벚꽃 향기에 취했었고, 흐르는 금호강의 잔잔한 물결에 반사된 봄 햇살에 기운이 돋을 때도 있었다. 봄 햇살을 맞으면서도 느꼈던 슬픔의 감정들. 오래 전 언젠가, 친구가 말했다. “너에겐 오래된 슬픔이 느껴져”라고.

그때, 슬픔이 온 몸과 영혼에 녹물이 흘러내린 것처럼 나는 누렇고 푸르죽죽했었나 보다. 10대 후반을 거치는 동안 내내 그랬었다. 슬프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삶이 더 슬픈 여운을 남기는가 보다. 그 시절 교회 선생님 한 분이 따뜻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너는 사슴처럼 슬퍼 보이는구나. 노천명의 사슴 시처럼…….”

그때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어쩌면 나의 영혼에 가득한 슬픔을 나보다 먼저 봐준 사람들 덕분에 내가 살아남지 않았을까. 슬픔이 무의식을 점령한 채 오래 살면 마음엔 조금씩 암덩어리가 생긴다. 그 암덩어리는 자신의 슬픔을 더욱 키우고 타인에게까지 전가한다. 

슬픔은 우울증의 가장 전형적인 증상 중의 하나다. 우울증이 오래 진행되면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게 되는 순간, 죽음이 가까운 것을 알아야 한다. 계절이 봄을 지나가는데도 영원히 겨울 속에 머물러 있게 하는 우울증.

술에 취해 집으로 오고 있던 아버지가 추운 겨울 길거리에서 동사했던 큰 슬픔을 가진, 어릴 때 친구가 있었다. 그 아이는 슬픔에 취해 살았다. 마치 자기 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살았던 것처럼. 그리고 스물 두 살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 아이의 슬픔은 자신이 제어하지 못할 만큼 커져 버렸고,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나 역시 내 슬픔 때문에 그 아이의 슬픔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때 내가 좀 더 건강하고 밝은 아이였다면, 나는 어떻게든 그 친구의 슬픔을 덜어내어 주고 죽지 않게 도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슬픔이 슬픔을 밀어낸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계속 새롭게 올라오는 슬픔이, 묵은 슬픔을 밀어대며 죽음으로 몰고 간다.

아, 동병상련이라는 말은 아픔을 견딜 수 있을 만큼만 가진 자들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누구든 자신의 아픔과 슬픔이 가장 크게 느껴지고 치유되기 전에는, 타인의 슬픔을 볼 수 없고 공감할 수도 없다. 

태어난 것만으로도 슬픈 여성들이 있다. 아들이 아니어서 엄마의 첫 젖도 얻어먹지 못한 채 싸늘한 윗목에 뉘여 있었던 세상의 딸들, 그녀들은 숨막히게 슬프고 외로운 채로 시간을 견디며 살아왔다. 시간이 많이 지나면 표현할 수 없는 먹먹한 슬픔을 가슴에 묻고 산다.   

그녀들을 위한 따뜻한 위로가 필요하다. 위로가 치유로 흐르면 차가운 가슴에도 온기가 배어든다. 그런데 위로가 필요한 여자들은 많은데, 위로할 여자들이 너무 부족하다. 여자를 낳은 여자인 엄마들도 너무 슬프고 외로워서 딸들을 더욱 슬프게 한다. 

그래도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여자들이 낫다. 느낄 수 없다고 슬픔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세상에 이토록 많은 슬픈 음악들이 있는 것도, 인간의 슬픔을 반증하는 역설이다. 

오늘도 북한강변 카페엔 슬픈 아리아가 흐른다. 슬픔으로 슬픔을 위로하려는 음악이 흐른다. 휴일 오후 삼삼오오 카페에 앉은 여자들, 혹은 홀로 앉아 커피를 마시는 여자들을 보면 때때로 슬퍼 보인다. 그 슬픔을 조금씩 강물에 흘려 보내자. 그리스도는 슬픈 자들의 편이다. 그리고 쉬지 않고 이들을 위로한다. 꼭 기억하자. 

그리고 슬픔의 시간을 치유한 우리가 지금 슬픈 이들을 위로하자. 봄이 따스하게 영혼에 차오를 수 있도록.

한국상담심리치료센터 www.kclatc.com
강선영의 힐링카페 http://cafe.wowcc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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