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시내에서 북쪽으로 뻗어 있는, 기원전 300년경에 닦은 비아 까시아(Via Cassia)라는 길이 있다. 그 길가에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기행을 일삼아 역사가들에게 자주 안줏거리를 제공하는 네로(Nero 37년 12월 13일-68년 6월 9일) 황제의 무덤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이 무덤은 이 근처에서 발굴되어, 지금은 길가에 2-3m 정도의 축대를 쌓고 그의 석관을 올려 놓았다. 그래서 이곳을 지나가는 길손들이 그 석관을 볼 수 있게 했다. 그래서 이곳의 명칭이 “네로의 무덤 길(Via Tomba di Nerone)”이다.
네로의 무덤인 석관이 지금껏 남아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하다. 수많은 황제들의 무덤이 대부분 유실되었는데, 콘스탄틴 대제 이후 기독교가 흥왕한 로마에서, 기독교인들을 크게 핍박했던 그의 무덤이 2천 년 가까이 보존되었다니 말이다. 이 무덤에 대해 한번 글을 써야지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마침 기회가 왔다. 로마를 방문한 후배와 함께 이곳을 찾을 수 있었기에.
후배에게 기독교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밀비오(Milvio) 다리와, 기독교인을 몹시 핍박했던 네로의 무덤은 꼭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도 로마를 방문하는 기독교인들조차 대부분 이런 곳에 별 관심이 없다.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그의 석관은 장식이 전혀 없는 투박한 모습이다. 마키아벨리는 그의 군주론에서 “군주는 신하들에게 가볍게 보이는 행동이나 무시당할 수 있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네로는 그런 일을 다반사로 했다. 연극에 광대로 출연하기도 했고, 심지어 그리스에서 개최된 성악 콩쿠르에 참석하느라 일 년 동안 자리를 비우기도 했다. 그런데도 무사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가 (로마인들이 가장 흠모하는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혈족이었기 때문이리라(그의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증손녀임). 그것이 백성들로 하여금 네로를 용납하는 매개체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범죄자가 명문대 출신이거나 미녀일 때 정상참작을 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저런 사람인데 범죄할 수밖에 없는 정황이 있었겠지”라고 여기게 된다고 하니 말이다.
그의 석관을 하필 유서 깊은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길가에 놓아둔 것은,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려는 의미도 있겠다 싶다. 우리 같았으면 벌써 없애 버렸을 텐데 말이다. 그런 면에서 오랜 역사를 지탱하고 있는 로마는 다르지 싶다. 독재자 무솔리니가 세운 기념탑도 현재 그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다. 아마도 후손들이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저런 길을 걷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갖도록 배려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마키아벨리가 인간의 선함을 믿지 않았던 것 같이, 인간은 윤리나 도덕적으로 큰 차이가 없지 싶다. 얼마 전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도의 간디에게, 여성 문제가 복잡했다”는 보도를 통해 인간의 부패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를 존경했던 네로(후에 인도의 수상)조차도 이 부분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하고. 사람은 대체로 장점만을 부각시키기에 어두운 면을 보면 절망하게 된다. 그렇다면 삶의 내용은 누구나 큰 차이가 없지 싶다. 고로 윤리나 도덕적인 면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거나 지나치게 공격하면 안 되겠다 싶은 마음이다.
64년 7월 19-20일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했다. 7월 중순은 로마에 더위가 맹렬한 때다. 그런데 바람까지 강하게 불어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게 되었다. 로마의 14개 구역 중에서 열 곳이 전소될 정도로 굉장한 화재였다. 화재 소식을 듣고 네로는 별장이 있는 안지움(Anzium)에서 달려와 진압을 했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화재였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민심은 달랐다. 당시 네로는 자신의 궁 아우레아(Aurea)를 현 콜로세움 가까이에 건축하고 있었다. 그는 궁터를 확장하려는 야망으로, 가난한 시민들의 불탄 집터를 값싸게 매입할 수 있었다. 그런 네로의 행동은 그가 일부러 방화를 저질렀다는 시민들의 의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런 상황에서 골족을 다스리던 사령관이 반란을 도모했다.
이런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상황이 눈덩이처럼 커지는 것을 보며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방화의 책임을 기독교도들에게 전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기독교 지도자였던 바울과 베드로를, 방화의 책임을 씌워 죽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마무리되지 않았다. 서기 68년 6월 8일, 네로는 원로원에서 “국가의 적”으로 가결되어 하루아침에 왕궁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쫓겨나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하기에, 그는 새벽에 자신을 돕던 황궁의 재무 담당 파오의 뒤를 따라 정신없이 노멘타나(Via Nomentana) 길로 도망을 쳐야 했다.
그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얼굴을 가린 채 파오의 별장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숨 쉴 사이도 없이 그를 잡으러 달려오는, 원로원에서 보낸 병사의 말발굽 소리를 들어야 했다. 겁약했던 그는 시종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자신을 향해 칼날을 곧추세울 수 있었다. 그 순간에 토한 마지막 말을 디오카시우스는 로마사에 이렇게 기록했다. “오, 제우스신이여, 이토록 훌륭한 예술가가 죽게 되다니요.”
그런데 그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면서 흐느끼는 여인이 있었다. 그를 사랑했지만 다가갈 수 없었던, 그리스의 출신의 노예, 클라우디아 악테였다. 한창 젊은 31세에 죽어가는 네로를 지켜보며, 그 곁에서 슬퍼하며 울어주던 여인. 그 깊은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네로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인생은 죽음의 면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연약한 존재이지 싶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얼마나 나를 돌아보며 살아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