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모든 길의 여왕이라는, 유서 깊은 아피아 안티카(Appia Antica)를 걷고 있다. 수천 년 동안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삶의 무게로 허덕이면서 지나간 길이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마다 삶의 고뇌를 각인하듯 마차의 바큇자국이 움푹 움푹 패여 있다.
길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보통은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이웃과 관계를 갖는 중에 부산물로 생겨났지 싶다. 또는 다른 사람이 걸어간 발자국을 뒤쫓아가다 보니 한 사람 두 사람 그 길을 따라가게 되고, 그러다 보니 반짝거리는 길이 생겨나기도 했을 것이고, 그 길을 통해 삶의 슬픔과 기쁨들이 물안개처럼 퍼져나가기도 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해지자 좀 더 편리한 길, 좀 더 빠르게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고속도로를 만들기도 했을 터! 그 당시 길을 만드는 열풍이 강렬하게 일어남으로 많은 길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 모든 길의 길이는 8만Km, 지선까지 합하면 15만Km에 이른다니, 로마인들은 길을 만드는 일에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가를 깨닫게 된다.
길을 만드는 일에 땀을 많이 흘렸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의 이동이 중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의 모든 길들의 역사는 아피아 길을 정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된다. 아피아 길 이전에 만들어진 길 중 오스티아 길(Via Ostiense)은 로마에서 오스티아까지, 살라리아 길(Via Salaria)은 로마에서 아스콜리 피체노(Piceno)까지, 라티나 길(Via Latina)은 로마에서 나폴리 근교인 카푸아(Capua)까지다.
아피아 길 이후에 만들어진 길 중 아피아 길(Via Appia)은 기원전 312년 로마에서 브린디시(Brindisi)까지, 아우렐리아 길(Via Aurelia)은 기원전 241년에 로마에서 서해안의 제노바(Genova)까지, 카시아 길(Via Cassia)은 기원전 154년에 피렌체(Firenze)까지, 플라미니아 길(Via Flaminia)은 기원전 220년에 동해안에 있는 리미니(Rimini)까지, 티부르티나 길(Via Tiburtina)은 로마에서 티볼리를 거쳐 동해안의 페스카라(Pescara)까지다.
그런데 기원전 312년에 로마의 감찰관이었던 아피우스(Appius Claudius)는, 군사 및 행정 효율을 위한 인프라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그래서 수로와 군사도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공익사업을 위해 재정 지출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 그 거대한 토목공사를 통해 고용 창출의 효과도 가져올 수 있었기에, 길을 만드는 일은 일석이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을 만드는 일 때문에 그는 얼마나 많은 공격을 당했는지 모른다. 경부고속도로를 만들 때 쓸데없는 일을 한다고 트럭 앞에서 드러누웠던 사람들이 있었듯이. 그러나 미래를 볼 수 있는 리더를 통해, 인류는 얼마나 큰 빚을 지게 되는지 모른다.
그는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국토 남단인 카푸아(Capua)까지 군사도로를 만들었다. 폭 8m에 이르는, 인류가 만든 첫 번째 고속도로가 아닌지 모르겠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 길을 만들기 위해 우선 땅을 깊이 파고 배수구를 만들고 물이 잘 빠지도록 모래와 자갈을 깊이 깔고 그 위에 널찍한 돌(내가 대강 재어 보니 가로 30-40cm, 세로 20-30cm정도 되는 판판한 돌)을 깔아 포장했다. 특히 돌을 깔 때 빗물이 잘 빠지도록 길 중앙이 약간 돋아나게 만들었다고 한다. 아직도 마차 자국이 깊게 파인 길은, 줄자로 재어 보니 폭이 4-5m가 되었다. 마차 두 대가 비켜 갈 수 있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행인들을 위해 양쪽에 인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얼마나 길을 튼튼하게 만들었던지 지금도 그대로 사용될 정도다. 단지 돌로 된 포장을 아스팔트로 덮었다는 것 외에는 크게 달라진 점이 없을 정도로. 지금은 차량이 많아졌고 그래서 길은 넓혀야 하는데도, 기원전의 그 폭의 길을 자동차로 빠르게 갈 때는 간담이 서늘해지곤 한다. 기원전 312년경에는, 아니 자동차가 발명되고 대중적인 교통수단이 되기 전까지는 전혀 불편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차량이 많아졌는데도 불구하고 기원전에 만들어진 길의 폭인 4-5m를 고집하는 이유는 뭘까? 전통을 사랑하는 보수적인 성품 때문일까? 아니면 과거의 향수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서일까? 이 길을 자주 다니면서 좁은 길을 손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나는 구시렁거리기도 한다.
이 길을 확인하려고 뜨거운 여름 무려 세 시간 동안을 걸어 보았다. 때로는 인적이 없는 곳도 있었지만, 승리한 로마의 군단이 힘차게 행진하는 소리가 귓전으로 쟁쟁했다. 길 양쪽으로는 개인적으로 만들었을 수많은 무덤들이 폐허가 된 채로 길손을 맞이하고 있다. 마치도 늦잠을 자다가, 갑자기 방문한 시아버지를 맞이하기 위해 어쩔 줄 몰라하는 며느리의 민낯처럼 말이다.
작은 무덤에서부터 성채와 같은 무덤들. 죽어서도 무덤을 통해 가문의 영광을 표출하려고 몸부림쳤던 그들의 오만함이, 세월이 지나 슬픔을 머금은 듯 부끄러운 형상이다. 인간의 영광은 별것 아니라고 말해주는 듯, 무너져 내린 대리석 조각들은 처연한 표정이다. 남아 있는 묘지명을 보니 오비디우스, 그의 아내, 그리고 아들, 그 이름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자기만의 이름을 길손에게 알리려고 몸부림치는 것 같다. 그런 모습을 처연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소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
아직도 마차 바큇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그 옛 길. 어떤 사람은 마차를 타고, 어떤 사람은 말을 타고, 어떤 이는 걸어서 갔을 것이다. 이 길을, 저들은 나름대로 지나면서 자신의 자취를 남겨 놓았다. 그 자취는 포장으로 널찍하게 깔아놓은 돌들에 깊은 자국을 만들어 놓았다.
나는 이 길에서 스파르타쿠스의 분노로 이글거리는 자취를 보기도 했고, 여름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나폴리만의 카프리(Capri)섬에 있는 별장으로 달려가던 황제들의 마차 소리를 듣기도 했다. 또는 전쟁에서 승리한 시저가 열병식을 하기 위해 백마를 타고 군단의 환호를 받으며 요란스러운 말발굽 소리와 함께 지나가던 그 소리를 듣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죄수의 몸으로 뜨거운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이 길을 걸어갔던 사도 바울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그들의 걸음들은 이 길 위에 편린들로 어딘가에 남아 있다. 그 선명한 자국들을 쓰다듬어 본다. 그리고 그렇게 또렷하게 자국을 만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내 걸음도 이처럼 자국을 남기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자국을 남기고 있는 것일까? 또한 나는 어떤 길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