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비난한다
이슬람에서의 예수님은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이지 구세주는 아니다. 이슬람에서는 예수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님은 신성이 없고 인간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 따라서 예수님은 구세주가 아니다.” 예수님은 많은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때문이 아니라, 그의 가르침 때문이다. 예수님은 살아 있을 때 결코 자신이 구세주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그런 신화는 예수님이 죽은 이후에 교회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를 비롯하여 많은 성경구절이 예수님이 구세주 되심을 알려주고 있다(요일 4:14; 마 7:21-22, 8:2, 9:28, 12:8, 14:28, 30, 15:22, 17:15, 28:6; 막 2:28, 7:28, 9:24; 눅 2:11, 5:8, 7:31, 11:1-19, 19:10, 22:31, 24:34; 요 3:17, 4:42, 6:23, 8:11, 9:36, 11:2-3, 12:47, 13:6, 14:5, 20:13, 20:28, 21:7).
2. 기독교의 원죄를 비난한다
이슬람에서는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백지처럼 원죄가 없이 태어난다고 가르친다. 아담이 최초의 죄인으로서(꾸란 2:35)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남으로써 이미 죄값을 치렀기 때문에 더 이상 죄가 없다는 것이다. 이슬람에서 에덴동산은 이 지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있었는데, 아담이 지구상으로 옮김으로써 죄의 대가를 이미 치었기 때문에 아담의 죄가 그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 인간은 타락 이전에는 죄를 몰랐다. 그리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 속에 있었다. 그러나 타락 후에 아담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피했으며, 벗은 몸이 창피하여 가리려고 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여, 수고하는 고통스러운 삶을 시작했다. 그리고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에게 적용된다.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1)라고 고백했다. 사도 바울은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5-17)라는 말씀을 통하여 원죄를 분명하게 선언한다.
이슬람에서는 죄의 본질에 대하여 침묵하고, 죄의 기원·결과 또는 치유에 대하여 아무런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죄에는 소죄와 대죄가 있다고 가르친다. “소죄를 범하더라도 당신을 신앙의 사회에서 배제하지 않을 것이다. 대죄를 범하지 않으면 알라는 당신의 악한 행동을 용서하고 당신이 천국에 들어가도록 허락한다”(꾸란 4:31) 이슬람에서 가르치는 소죄는 학자에 따라 내용이 다르다. 어쨌든 소죄는 단순한 부주의이기에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본다. 거짓말, 사기, 분노, 탐욕과 같은 것을 가벼운 범죄로 본다. 그렇다면 이슬람에서 가장 악하고 용서받지 못한 대죄는 무엇일까? 첫째는 유일신 알라를 모독하는 것이며, 둘째는 무함마드가 받은 계시를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이다.
3.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위하여 죽었다는 것을 비난한다
이슬람에서는 각각 자신의 죄에 대하여 책임이 있으며, 어느 누구도 알라 앞에서 죄를 대신할 수 없다. 심지어 꾸란에서 죄가 하나도 없다고 기록된 예수님마저 남을 위하여 죄를 대신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들은 인간의 선행과 이슬람의 가르침을 통하여 자신을 구원하려고 애쓴다. 이슬람은 행위를 통하여 구원에 이르는 종교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것을 부정한다.
모든 죄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구약과 신약의 공통적인 메시지는 죄를 씻기 위한 제사의 필요성이다. 죄를 범한 인간은 자신의 몸을 나뭇잎으로 가렸지만, 하나님께서는 동물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셨다. 이것이 피 제사의 원형을 보여주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하지만 신약에서 하나님은 동물의 피가 우리의 죄를 없애주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하지 못함이라”(히 10:4)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그를 믿는 자들만이 용서받을 수 있다.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 9:15)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것만이 인간을 위한 유일한 희망인 것이다.
4. 기독교의 교파 분열을 비난한다
필자는 1992년에 이집트에서 사역하다가 이집트 정보부원들에게 납치된 적이 있었다. 그 후에 정보부에서 심문을 받았다. 좁은 방 안에서 정보부원들 4명은 번갈아 가며서 “당신은 기독교의 어느 교파 소속이며 어느 교파에서 파송되었소?”라고 소리쳤었다. 무슬림들은 기독교하면 으레 많은 교파로 분열되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슬람에서는 기독교가 많은 종파로 분열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교파들이 다른 나라와 다른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루터에 의한 개혁은 독일에서 시작되어 루터교가 되었고, 칼빈사상은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영국에서 존 웨슬리에 의하여 감리교가 시작되었고, 미국에서 부흥이 일어나 침례교가 많아졌고, 20세기 초반의 부흥으로 오순절 계통의 교회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사실 교파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계속해서 역사하고 있다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증거이다. 오히려 교리의 차이는 그 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욱 풍성한 지식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기독교의 교파들을 살펴 보면 이단이 아닌 이상 믿음의 중심 교리들과 사역, 그리고 구원관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교파를 위하여 헌신하지 않는다. 진정한 교회는 예수님 안에서 믿음을 통해 구원받고 성령을 통해 새 삶을 개인적으로 경험한 자들을 통해 세워져간다. 교파는 또 다른 형제들이고 교회의 지체들이다.
그리고 이슬람에서는 기독교 종파의 분열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슬람의 종파 분열과 서로 다른 교리 간의 불협화음은 더욱 심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중동 분쟁의 핵심인 IS(이슬람국가)는, 시아파로 변해가는 중동에 수니파가 공격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IS를 ‘수니파 무장단체’라고 부른다. 엄격한 의미에서 중동 분쟁은 시아파와 수니파 사이의 종파전쟁인 것이다. 심지어 이슬람의 교파는 핵심적인 교리 부분에서도 아주 다르다. 예를 들어서 시아파는 숨어 있던 이맘이 나타나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는 데 반해, 수니파는 절대 이를 인정하지 아니한다. 시아파는 꾸란이 창조되었다고 믿지만, 수니파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외에도 수니와 시아를 나누는 교리 차이는 수없이 많다. 이슬람에서는 기독교 교파들 사이에서보다 더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서로 인정하지 않는 교파가 무려 100-200개나 된다.
5. 기독교인들이 돼지고기 먹는 것을 비난한다
구약시대에 돼지고기는 율법으로 금지된 음식이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기도와 감사를 통하여 먹는 것이 허용되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4-5)
꾸란은 예수님이 과거에 금지된 것을 허용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꾸란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내 이전에 율법(구약)이 있었음을 확증하고 너희에게 금지되었던 몇 가지를 허용하기 위하여 내가 너희에게 왔으며 너희 주님으로부터 예증을 너희에게 가져왔으니 알라를 두려워하고 나에게 순종할 것이니라”(꾸란 3:50)라고 하셨다.
필자는 이에 대하여 두 가지 조언을 하고 싶다. 첫째, 무슬림 앞에서 돼지고기를 먹지도 주지도 말아야 한다. 둘째, 무슬림에게 성경의 신약과 구약이 말하고 있는 것을 객관적으로 알려주어야 한다.
비록 이슬람에서 주장하는 내용들이 못마땅하게 여겨지고, 이슬람에서 기독교를 비난하고 반대하는 내용을 납득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사랑과 존경을 가지고 무슬림들을 대해야 한다. 또한 용기를 가지고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해야 한다. 무슬림의 이야기가 모독처럼 들릴 때, 감정을 통제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무슬림들은 기독교인인 우리가 자신들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느낄 때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대적은 무슬림이 아니라 이슬람의 영이라는 사실이다. 복음만이 그들을 자유케 하는 열쇠이다. 그리고 가능한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아야 하겠지만, 부득이 해야만 한다면 지혜롭게 하는 것이 좋다. 그들의 부정적인 면까지 대화로서 풀어갈 수 있다면, 어떤 무슬림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이 사울을 변화시켜 바울이 되게 하셨던 것처럼, 잃어버린 무슬림 영혼들 또한 헌신된 기독교인이 되게 하실 수 있다.
유해석 선교사
FIM국제선교회 대표
‘우리 곁에 다가온 이슬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