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석 칼럼] 한국에 들어온 이슬람

강혜진 기자  eileen@chtoday.co.kr   |  
▲유해석 선교사.
▲유해석 선교사.

지난 3월 1일부터 9일까지 중동(中東) 4개국을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박근혜 대통령은 3월 12일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석하여 “지난 주 순방을 통해 열사(熱砂)의 땅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았다”면서 제 2의 중동 붐을 예고하였다. 같은 날 ‘제 2의 중동 붐’에 대한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보도자료가 나왔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한국에 무슬림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하여 기도처소(Musalla)를 보완하고, 주요 관광지에 이슬람 기도처소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둘째,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전환을 위하여 여행업계 등을 대상으로 한 세미나(6월) 및 교육(4회)을 실시하고 이슬람에 관한 3부작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 셋째, 의료관광객 확대를 위하여 노력한다. 넷째, 이슬람 음식인 할랄음식을 상품화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3월 12일 한국식품연구원은 할랄식품사업단을 발족했고, 4월 10일 정책 브리핑을 통하여 농수산식품부는 할랄식품의 원료로부터 제조 생산 물류 등을 한곳에서 처리할 수 있는 할랄 식품 전용단지를 전북 익산에 50만 평 규모로 조성할 예정이라고 발표하였다.

제1차 중동붐이 한국이 근로자들이 중동에 가서 외화를 벌어들인 것이라면 제2차 중동붐은 무슬림 관광객을 유치하고, 이슬람 기도처소를 늘리고 각 병원마다 무슬림을 위한 시설을 강화하고, 할랄음식을 위한 타운을 조성하는 등 한국에서의 이슬람 붐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에서 이슬람은 전통적으로 우리에게 생소한 종교이다. 한국에게 이처럼 이슬람이 생소했던 이유는 지리적 위치와 획일적인 문화 때문일 것이다. 이슬람이 발흥했던 아라비아 반도는 지금도 한국에서 항공편으로 약10시간 정도가 소요될 정도의 먼 거리이다. 그렇기에 과거 아라비아 반도에서 한국까지 이슬람이 영향을 미치기에는 교통편이 발달되지 않아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획일적인 한국 정서에 외래 종교나 문화가 비집고 들어설 틈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지금까지는 한국에서 이슬람을 찾아보기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유럽에서 그랬듯이 한국에서 이슬람은 중요한 종교로 자리잡아가게 될 것이다.

▲최근 이슬람에 팔린, 영국의 한 교회 건물. ⓒFIM국제선교회 제공
▲최근 이슬람에 팔린, 영국의 한 교회 건물. ⓒFIM국제선교회 제공

뿐만아니라 한국과 이슬람의 관계는 한국의 고대 문헌 등에서 교류했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역사에서 이슬람 종교를 가지고 있었던 아랍인들을 만나게 된 문헌의 기록은 신라 시대부터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 세력이 미미하였고, 그 당시 무슬림들은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한국에 왔다기보다는 교역이 더 큰 목적이었겠지만, 한국과의 접촉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1. 신라시대와 이슬람

한국과 중세 아랍인과의 접촉은 아랍 고전의 여러 문헌들에서 소개되고 있는데, 최초로 아랍 사회에서 한국이 언급된 나라는 ‘신라’였다. 아랍어에서 신라를 뜻하는 이름은 ‘al-Shila’인데, ‘al’은 관사로 사용되기 때문에 ‘Sila’라는 음역은 ‘신라’라고 올바르게 사용되었다. 중세 아랍인들의 문헌에는 신라의 모습이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몇 가지만 소개한다면 다음과 같다.

9세기 중엽에 술라이만(al-Sulaiman)이라는 아랍상인이 살았는데, 그는 ‘중국과 인도의 소식(Akhbar al-Sin wal-Hind, A.D. 851)'에서 신라의 지정학적 위치를 중국의 동쪽 바다에 자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서 신라의 존재가 이미 아랍인들에게 알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술라이만이 밝힌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해안에 신라라는 섬들이 있다. 그곳의 주민들은 피부가 희다 그들은 중국 황제에게 선물을 보내고 있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늘은 그들에게 비를 내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우리 동료들 가운데 아무도 그곳에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 관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들은 또한 흰 매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페르시아 우편 관리인이었던 이븐 후르다드비(Ibn Khurdadbid)는 자신의 저서 ‘도로들 및 왕국들 안내서’에서 신라를 묘사하고 있는데, 그는 신라의 지정학적 위치뿐만 아니라 신라에는 이슬람교도들이 거주하고 있다고도 밝혔다. 그리고 그들은 신라의 아름다움에 빠져서 영구히 정착하고 싶어 한다고 밝혔다. 

“중국의 맨 끝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금이 풍부하다. 이슬람이 이 나라에 상륙하면 그곳의 아름다움에 끌려서 영구히 정착하고 떠나려 하지 않는다.”

이처럼 중세의 아랍인들에게 있어서 신라는 매우 아름다우며, 금이 많은 나라로 인식되어 있었다. 또한 아랍인들은 신라에 오면 정착하여 떠나기를 싫어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중세의 기록들을 통해서 우리는 신라시대에 이미 아랍 사회가 한국과 접촉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가하면 신라의 대덕고승인 혜초는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아랍에 갔던 인물이었다. 인도와 페르시아, 아랍, 중앙아시아에 관한 견문록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작성하였다. 혜초는 아랍국에 대해서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그가 방문할 당시 아랍 제국은 칼리프 시대(632-661) 후인 우마이야왕조(661-750)시대였다. 우마이야왕조 시대에는 수도를 메디나에서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로 옮겼는데, 혜초가 묘사한 소불림국(小佛臨國)은 당시 이슬람 제국의 수도였던 다마스커스를 의미한다. 아랍과 신라 사이에 문명의 접촉과 교류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고려시대와 이슬람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신라시대 때보다 아랍과의 교류가 보다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고려 시대 때에는 원제국을 통하여 아랍문명이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으며, 처음으로 움마(Ummah, 이슬람공동체)가 부분적으로 형성되었다.

고려사의 기록을 통해서 고려사회 내에 무슬림 상인들이 무역을 주목적으로 일시에 백 명 이상의 인원으로 구성된 대규모 사절단의 형태로 방한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들이 이미 고려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교역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고려와 아랍간의 교류는 한반도와 중국을 잇는 해상항로를 통해 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성(姓) 중에도 고려시대 때 시작된 성이 있다. 장순룡(張舜龍)은 1274년 고려 충렬왕의 몽골비(妃)인 제국공주의 종관으로 고려에 왔는데 그는 투르크계 위그르 출신의 무슬림으로서 한국에 귀화한 최초의 무슬림이었다. 민보(閔甫)라는 인물도 고려 사회 안에 귀화한 무슬림이었다. 설손(偰遜)은 무슬림으로서 원나라의 황제에게 경전을 가르치는 학자였는데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고려에 와서 귀화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왕의 재정적 지원을 받고 고려 사회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무슬림들은 주로 개성과 그 주변에 거주했었는데 이는 고려 시대에 거주했던 무슬림들이 조정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 사회 내에서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생활방식들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고려의 조정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3. 조선시대와 이슬람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고려시대에 이어서 이슬람과의 교류가 계속 되어졌다. 조선시대에는 무슬림들의 종교 행위가 보장되었으며, 이슬람의 과학기술과 공예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이슬람과의 문명의 교류에 관련한 서술이 잘 나타나 있다.

조정에서는 회회인들을 호의적으로 대하고 있었으며, 조선 사회 내에서 가족을 이루고 살도록 하였다. 또한 무슬림 상인뿐 아니라 무슬림 종교 지도자를 거주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이슬람 종교의식을 보장하고 있다는 것을 내포하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지도자가 거주하였을 정도로 이슬람은 조선시대에 정착될 수 있었다. 조정은 이슬람 종교 지도자인 회회 사문들의  생활을 지원을 함으로서, 이들의 복지와 생계를 도왔다. 회회 사문들의 존재는 조선시대 사회 안에 무슬림들이 움마를 이루고 살았다는 것이고, 조정이 이슬람의 종교를 호의적으로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유한 이슬람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는 것이다. 고려시대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에도 무슬림들이 귀화했었으며, 이들은 조정의 중요한 행사에 참석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거주하였던 무슬림들은 주로 조정과 상류층 사회와의 교류를 담당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조정 행사에 공식적으로 참석하였을 정도로 이들의 위치는 중요했다. 그러나 이들은 소수였으며 조정과 주로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이 대중 속에 정착되지 못했고 결국 자생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지배층 중심의 성격은 민중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급변하는 대내외적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4. 19세기 투르크계 무슬림들의 이주

1915~1920년 사이에 제 1차 세계대전과 볼세비키 혁명을 계기로 투르크계 무슬림들이 국내에 이주하기 시작하였고, 1920~1940년 중반까지 200~250여명의 투르크인들이 한반도 전역으로 이주하여 이슬람공동체를 이루었다. 국내에 거주했던 투르크계 무슬림들은 주로 의류 도·소매업을 중심으로 포목점과 양복점을 경영하였는데, 상업과 국제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면서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들은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목포, 대전, 평양, 신의주, 청진, 홍남 등 전국에 걸쳐 이슬람공동체를 이루면서 종교적·문화적 활동을 지속해 갔다. 이들은 서울, 부산, 대구 등지에 이슬람 마을(Mahall-i Islamiyeg)이라는 공동체를 형성하였으며, 서울 시내의 중심가에는 이슬람 학교(Mekteb-i Islam)을 통하여 무슬림 자녀들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이에 일제 치하를 겪은 우리 민족은 나라의 아픔을 끌어안고 같이 해결하려고 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경제적인 부만을 얻고자 하였던 투르크인들에게 부정적인 시각을 갖기도 하였다. 결국 투르크 무슬림들은 한국에 이슬람을 적극적으로 포교하지 못했고, 한국의 공동체 형성에 특별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5. 6․25 전쟁 이후

1950년 한국전쟁 다시 유엔군 소속으로 터키의 군인들이 한국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참전한 병력의 규모는 미국 다음으로 여단 규모의 병력을 파병하였다. 당시 압둘가푸르 (Adulgafur)라는 터키 제6여단 사령부의 군 이맘(Imam)은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선교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압둘라 ‘김유도’와 우마르 ‘김진규’ 등이 개종하였고, 이들은 1세대 한국인 무슬림들로 형성되었다. 이후 김유도와 김진규는 1955년 9월 15일 ‘한국이슬람협회’를 결성함으로서 적극적인 이슬람 선교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슬람 선교 활동은 교육에도 이르렀는데, 한국 전쟁 당시 후방에서는 ‘앙카라 학교’를 건립하여 전쟁고아의 양육과 교육활동을 하였고, 1956년 4월에는 ‘청진학원’을 설립함으로서 중등교육과 이슬람 교리교육을 무료로 실시하기도 하였다. 1956년 주베이르 코치(Zubeyr Koch)가 2대 이맘으로 부임하면서 입교자는 ‘208명’에 이르게 되었고, 1959년 이슬람협회 지도자였던 김진규는 서정길과 함께 이슬람 국가를 순방하면서 한국 이슬람의 실정을 알리고 후원을 요청하였으며 1960년에는 한국 무슬림으로는 최초의 성지 순례자들이 되기도 하였다.

1970년 9월에 한국정부는 용산구 한남동의 1,500평의 땅을 이슬람 중앙성원 건립용 부지로 기증하였고, 이후 이슬람 국가들의 재정적 후원으로 1976년 5월 21일 이슬람 성원의 개원식이 있었다. 이때부터 한국 이슬람은 증가하기 시작하였는데, 1960~1970년대에는 한국 기업들의 중동 국가 진출을 계기로 3,700명이었던 이슬람 인구가 약 두 배로 증가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현대에 들어서 이슬람은 활발하게 선교활동을 하고 있으며, 그 결과 한국 내에 무슬림들이 성장해갔다.

유해석 선교사
FIM국제선교회 대표
‘우리 곁에 다가온 이슬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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