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우 목사의 로마 이야기
로마를 둘러싸고 있는 아우렐리아 성문을 나가 에우르(Eur) 방향으로 가면 바울의 순교한 장소를 만납니다. 이곳은 로마 시대에는 항구가 있던 오스티아(Ostia)로 가는 길목입니다. 그곳 입구에 세워져 있는 간판에는 이곳이 사도 바울이 순교한 트레 폰타나(Luogo dei martirio di S.Paolo le tre fontana)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는 성 안을 신성시하였기에 사형은 언제나 성 밖에서 시행하도록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죽이는 일은 유쾌하지 않기에 보통 음습한 곳, 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행하도록 합니다. 그곳은 지금은 세 분수(Tre fontana) 수도원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그 이유는 바울의 목을 쳤을 때 떨어진 목이 세 번 튀었고, 그 튀어 오른 자리마다 샘이 터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산 사람의 목을 잘랐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싶습니다.
그 수도원을 들어가 아치형 입구를 통과하여 약 30m를 직진하면 양편으로 교회가 있습니다. 왼편은 베르나르도 클레르보의 수도원이고, 오른편은 14개의 계단이 높게 설계된, ‘천국의 계단 교회’로 불리는 성당입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베르나르도 클레르보(Bernardo of Clairvaux, 1091-1153년, 찬송 85, 145, 262)가 오른편에 있는 교회의 지하실(바울의 갇혔던 곳)에서 기도하다가 수많은 영혼들이 계단을 통해 하늘로 올라가는 형상을 보았다고 하여 이런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클레르보는 12세기의 영적 거성으로, 개혁자들도 그를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천국의 계단 교회의 지하에는 1만 203명의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석판을 붙여 놓았습니다. 이 순교자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285-312) 황제 때 각 예하부대에서 차출된 그리스도인 군인들로, 황제의 목욕탕을 건축한 후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공간의 넓이는 5m*6m인데 그 안에 5m*2m의 두 방으로 나누었고, 각 방에는 작은 창문이 있으며, 그 앞에 작은 제단을 마련해 놓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공간이 사도 바울이 순교하기 전 머물렀던 장소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좁은 공간에서 바울은 자신의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후서를 쓴 것으로 보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조금 후에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오른편으로 정 중앙에 보이는 작은 교회당이 바로 사도 바울이 순교한 현장입니다. 그 교회당에 들어가면 오른편에는 베드로가 거꾸로 십자가에 달리는 장면이, 그러고 왼편에는 바울의 목이 베이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단 왼편에 쇠창살을 쳐 놓고 그 안에 돌기둥을 세워 놓았습니다. 그 돌기둥은 한쪽이 마모가 돼 있습니다. 수많은 기독교도들을 죽일 때 목을 그 돌기둥에 얹고 장검이나 도끼로 내려쳤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기둥에서 목이 잘렸던지, 돌기둥의 한편이 깎여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게 이 돌기둥에서 목이 잘렸습니다.
그런데 당시 그의 죽음을 슬퍼한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 싶습니다. 바울은 62년경에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왔다가 2년 동안 구금을 당했습니다. 그때 옥중서신을 썼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고소당한 것이 사소한 종교적인 문제였기에 방면되었습니다. 바울은 방면된 뒤 성도들을 둘러보기 위해 소아시아로 갔습니다.
그러던 중 AD 64년 7월 19일에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강한 동풍까지 불었기에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올라, 로마의 14개 구역 중에서 10개가 전소됐습니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화재였는데, 로마에서 가장 더울 때가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입니다. 가장 무더울 때 화재가 일어났고, 거기에 동풍까지 강하게 불었으니 그 피해는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
네로는 로마가 화재가 일어났을 때 그곳에서 100km 떨어진 고향 안지움(Anzium)의 별장에 있었습니다. 그는 화재에 대한 보고를 듣고 급히 현장으로 달려왔습니다.
화재는 늘상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당시 로마는 보통 5층 높이까지 집을 건축했는데, 나무로 설계하였기에 화재에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다는 말처럼 그 와중에 골 족 사령관 갈바(Galba)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급히 게르만 지역을 담당하던 루프스(Rufus)로 하여금 진압하도록 했습니다. 네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반란은 아프리카까지 번졌습니다.
그 당시 네로는 자신의 거대한 궁전 도무스 아우레아(Domus aurea)를 현재의 콜로세움 주변에 건축하던 중이었습니다. 거대한 궁전을 건축하는 데에는 넓은 땅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러나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이었기에, 넓은 땅을 마련하는 일은 만만치 않은 재정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화재로 인해 불타버린 집터 160에이커(195,840평)를 싸게 매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의 불타버린 집터에 새롭게 건축할 여력이 없었기에, 헐값에 집터를 양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네로는 예기치 못한 큰 행운을 거머쥐게 되었습니다. 그런 행운의 여신의 미소에 네로는 얼마나 손뼉을 치며 좋아했을까요.
그러나 지나친 행운은 나쁜 소문을 양산하는 동기가 될 수 있음을 네로는 간과했습니다. 네로가 토지를 확보하려고 일부러 방화를 저질렀다는 유언비어였습니다. 그런데 그 유언비어가 점점 눈덩이처럼 확대되어 민심이 흉흉하게 돌아가자, 네로는 긴장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누군가를 희생의 제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을 간파했습니다. 이는 정치가들이 흔히 취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당시 로마에 새롭게 부상하는 종교가 있었으니, 그리스도교라는 종파였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들에 관하여 ‘크리스투스’라고 언급했습니다. 이들은 정부의 신전 제사에 협조하지 않았고, 노예를 인정하지 않았고, 자신들끼리 뭉치는 모습을 보였기에, 미운털이 박히게 되었습니다. 네로는 이들에게 방화의 책임을 뒤집어 씌우기로 했습니다.
이런 연유로 당시 기독교의 지도자 바울은 1순위로 소아시아에서 체포되어 왔습니다. 갑자기 체포된 바울은 입은 옷 그대로 곧바로 로마로 압송됐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소아시아는 지금의 터키입니다. 비행기를 타도 서너 시간은 족히 걸리는 먼 거리입니다. 이천 년 전 소아시아에서 로마까지 오려면 빨라도 한 달 이상 걸려야 했습니다. 그 먼 길을 오다 보니 이미 계절이 바뀌었습니다.
바울이 갇혀 있던 로마의 감옥은 우기가 되어 을씨년스러웠고, 싸늘함이 옷깃을 여미게 했습니다. 특히 로마의 감옥은 대체적으로 지하에 있고 돌로 축조되었기 때문에 우기에는 냉기가 뼛속까지 사무쳤습니다. 고로 젊은 사람도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하물며 여름옷을 입은 늙은 바울은 견디기 심히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참다 못한 바울은 에베소에서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라”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디모데가 건강하지 못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바울입니다. 그리고 그는 에베소에서 로마까지는 너무 먼 길이라는 점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찾아 로마로 가지고 오라고 당부하는 바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특히 겉옷은 비싼 옷이 아닙니다. 밍크나 질감 좋은 가죽으로 만든 옷이 아닙니다. 단순히 담요 같은 것에 구멍을 뚫어 덮어 쓰는, 로마의 가난한 사람들이 입던 겨울옷입니다. 그런데 감옥에 갇혀 있는 있는 바울에게는 그런 옷조차 없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옥중에 있는 바울에게 누구 하나 방한복을 넣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죄수로 로마에 올 때는 약 50km나 떨어진 삼관까지 마중을 나왔던 로마 교인들이었습니다. 삼관은 현재 로마의 남쪽 치스떼리나 디 라티나(Cisterina di Latina)라는 지역으로, 로마에서 보통 이틀 정도 걸어가야 당도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당시의 로마 교회 성도 중에는 사회적으로 쟁쟁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로마서 16장에서 바울이 안부를 전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스다구’는 로마의 황족이요,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이란, 헤롯의 손자 아그립바 1세와 형제관계에 있던 아리스도불로가 죽자, 글라디오 황제의 집으로 들어간 사람입니다. ‘나깃수의 권속’에게 문안하라고 했는데, 이 나깃수는 글라디오 황제의 비서가 된 사람으로, 주인 나깃수가 죽자 그를 섬기던 사람들은 네로 황제의 가계로 들어왔습니다. 그 외에도 당시 로마 교회에는 탁월한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로마 교회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을 받고 돌아온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자생적 교회입니다. 바울이 회심하기 전부터 존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울을 이미 알았고 그를 하나님의 귀한 종으로 여겼기에, 그가 로마에 올 때 열렬히 환영을 했던 것입니다. 이는 일찍이 겐그리아 교회의 여집사 뵈뵈 편에 받은 로마서를 통해 바울의 사도됨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재차 끌려와 투옥된 지금, 어느 누구도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물론 찾아왔다가는 함께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고, 바울에 대한 감시도 삼엄했습니다. 구금생활을 했던 지난번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잘못하다가는 같은 당으로 몰려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교인들은 두려움에 몸을 사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상황에서 “다 나를 버렸다”고 씁쓸하게 고백했습니다(딤후 4:16). 사랑하는 데마까지 신앙을 버리고 고향 데살로니가로 훌훌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철저히 홀로 된 바울. 전에는 바울을 만나기 위해 줄을 섰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 버렸습니다. 그를 가까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늙은 몸으로 깊은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동정하고 아파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영치금을 받기는커녕, 방한복 한 벌 입지 못하고 한기에 덜덜 떨고 있는 바울. 어쩌면 이것이 목회자가 걸어가야 할 마지막 길인지 모릅니다. 이런 길을 우리 주님도 공생애를 통해 경험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잡히셨을 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을 쳤습니다. 수제자 베드로조차 멀찍이 따라오다가 대제사장의 종이 그를 알아보고 “너도 예수의 함께 있었다”고 하자 저주하며 맹세하기까지 주님을 부인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목회자들이 이 땅에서 배반당하고, 살갑게 하던 교인들이 떠나는 것은 정상적인 일입니다.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보너스’를 받은 목회자입니다. 그런 대접에 지나치게 박수를 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정상적인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인이 떠난다고 실패의식을 갖는다든지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지극히 정상적인 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디모데는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요? 멀리 떨어진 에베소에서 목회하던 디모데는, 위대한 스승 바울의 마지막 편지를 받고 인간적으로 얼마나 깊은 울음을 울어야 했을까요? 속히 오라는 편지를 받은 디모데는, 당장 떠날 준비를 하고 드로아로 갔습니다. 고독한 스승 바울을 만나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에베소에서 드로아까지는 80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드로아는 호메로스가 노래한 트로이입니다. 요즘에는 자동차로 1시간 만에 갈 수 있지만, 2천 년 전에는 며칠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또한 디모데가 드로아 가보의 집으로 가서 스승이 맡겨 둔 ‘땀에 젖은 낡은 겉옷’을 가지고 로마까지 오는 데는 수많은 날들이 요구되었습니다. 수 일을 지나 나폴리 근교인 보디올(행 28:13, 현 Pozzuoli)에 하선한 뒤 아피아(Appia) 길을 따라 로마까지의 거리도 200km입니다. 그 길을 걸어가려면 일주일 정도 걸립니다. 스승의 땀내로 절어버린 겉옷을 품고, 로마를 향해 그 먼 길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소천받으신 어머님이 남겨 두신 옷을 가슴에 품어 본 일을 기억했습니다. 그 저고리를 품에 안고 어머님의 냄새를 오랫동안 맡아 보았었습니다. 아마도 디모데도 비슷한 행동을 취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전도 여행으로 땀이 밴, 믿음의 아버지의 옷입니다. 아시시에 가면 성 프란치스코가 입었던 누더기 옷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옷도 그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옷에 밴 스승의 체취는 디모데로 하여금 전도자의 길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랜 날들을 달려 디모데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는, 스승 바울은 이미 순교하고 꽤 많은 날들이 지난 때였을 것입니다.
네로는 당시 상황에서 바울이나 베드로로 하여금 변명할 기회를 줄 수 없었기에 며칠 내로 죽여야 했습니다. 당시 네로는 이십 대 후반이었으니 무슨 철이 있었겠습니까?
디모데는 스승이 남긴 옷을 품에 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을 것입니다. 스승이 가시는 마지막 길을 지켜드리지 못했다는 회한, 스승이 주님의 소명을 이루고 떠나기 얼마 전까지도 겨울이 오는 길목인 우기에 감옥에서 추위에 떨도록 방치했다는 자괴감으로 말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 험한 길, 순교의 자리로 오라고 당부합니다. 그곳은 두려운 자리이나, 목회자가 피해서는 안 되는 영광스러운 자리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어떤 길을 따르고 계신지요?
한평우 목사(로마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