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와 이슬람의 시작
A.D. 610년 무함마드가 40세가 되었을 때, 라마단(Ramadan) 기간에 가끔 하인이 날라다 주는 최소한의 양식만을 먹으며 타인과 떨어진 곳에서 고독과 적막을 즐겼다. 그러던 어느 날 동굴에서 잠이 들었을 때, 한 영이 나타나서 그에게 “읽으라”(Iqraa)고 말했다. 그는 깜짝 놀라서 “무엇을 읽으란 말입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그 영이 말하기를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읽어라. 그분은 한 방울의 정액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노라. 읽어라! 주님은 가장 은혜로운 분으로 연필로 쓰는 것을 가르쳐 주셨으니,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도 가르쳐 주셨느니라”(꾸란 96:1-5)고 했다. 무함마드는 그 구절을 따라 읽었다. 그는 자신에게 말한 것이 귀신이라고 생각해서 극도의 공포를 느꼈다. 또 다른 이슬람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두려워서 자살을 시도하려고 했는데, 그를 알라의 사도로 임명한다는 목소리가 들려서 그 시도를 멈추었다고 한다. 알라의 목소리가 그를 보호한 셈이다.
무함마드는 떨리는 심정으로 집에 와서 부인 카디자(Khadijah)에게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다. 남편을 안정시킨 카디자는 그의 사촌인 와라카 이븐 나우팔(Waraqa Ibn Nawfal)에게 달려갔다. 와라카에게 무함마드에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더니, 와라카는 “무함마드에게 나타난 영(靈)은 모세에게 나타났던 그 천사”라고 일러 주면서 “그가 이 민족을 위한 예언자임이 틀림없다”고 말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카디자는 무함마드에게 와라카가 했던 말을 전하였다. “당신은 곧 예언자직을 갖게 될 거예요” 그녀는 무함마드의 첫 추종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이슬람은 시작되었다.
무함마드가 ‘라마단 금식’을 이슬람 교리로 지정
12년이 지난 후, 무함마드는 추종자들을 이끌고 메카(Mecca)를 떠나서 메디나(Medina)로 이주하였다. 무함마드가 메디나에 도착한 날은 622년 6월 25일로, 이날을 이슬람의 원년이자 이슬람 달력이 시작되는 날로 삼았다. 그리고 메카의 쿠라이쉬 부족들과 전쟁을 시작하였다. 무함마드가 이끄는 이슬람 군대가 메디나에 도착하고 2년 9개월 지난 후에 바드르(Badr) 전투가 벌어졌다. 305명의 이슬람 군대가 950명의 메카 연합군을 무찌름으로서, 전세는 이슬람의 승리로 기울어졌다. 이 전투 후에 무함마드는 라마단 기간을 이슬람의 교리로 정하고, 모든 무슬림들에게 지키도록 하였다.
무슬림에게 ‘라마단’은 죄 소멸과 복 등의 의미를 갖는다
이슬람은 믿음과 행함으로 살다가 마지막 심판 날 구원의 여부가 결정된다. 이슬람의 믿음은 6가지인데, 알라에 대한 믿음, 천사에 대한 믿음, 경전에 대한 믿음, 선지자에 대한 믿음, 마지막 날에 대한 믿음, 숙명에 대한 믿음이다. 또 5가지의 행함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신앙고백(Shahadah), 기도(Salat), 구제(Zakat), 금식(Saum), 성지순례(Haji)다. 무슬림의 약 15%를 차지하고 있는 시아파에서는 여기에 지하드(Jihad)를 추가한다. 이러한 5가지 행함 가운데 금식(Saum)을 행하는 기간을 라마단이라고 부른다. 라마단은 이슬람력으로 매년 9번째 달에 해당하며, 이 달을 라마단 달이라고 부른다. 이슬람의 달력은 음력으로 여섯 개월은 29일, 다른 여섯 개월은 30일로 각각 구성되어 있어서 1년이 355일이다. 따라서 양력으로는 매년 약 10일 정도씩 라마단이 빨라진다. 금년에는 라마단 달이 6월 18일부터 7월 17일까지다.
라마단(Ramadan)이라는 단어는 ‘불에 탄다’는 의미인 ‘라미다’(Ramida)에서 파생되었는데, 이 시기에 금식함으로써 자신의 죄가 불에 타서 없어진다는 뜻이다. 무함마드 A. R. 테르카이트는 『이슬람의 단식과 성지순례』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라마단이 갖는 의미를 “라마단 달에 금식을 수행하는 무슬림들은 모든 과거사를 사면받게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기간은 이슬람 군대가 바드르 전투에서 승리한 위대한 달이며, 불우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달로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라마단 달에 금식하는 자는 알라에게 많은 보상을 받는다.
또한 이슬람에서는 라마단 달을 가장 위대하고 성스러운 달로 여긴다. 왜냐하면 꾸란이 하늘에서 무함마드에게 내려온 날이기 때문이다. “만백성을 위한 축복으로, 그리고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는 꾸란을 라마단 달에 계시하니라”(꾸란 2:185). 따라서 무슬림들은 라마단 달에 금식을 함으로써 알라를 경배한다. 그리고 모든 소원이 응답되는 달이기도 하다. 천국의 문이 열리는 달이기도 하며 지옥 문들이 닫히는 달이라고 무함마드는 언급하였다. “라마단 달이 시작되면 천국 문들이 열리고 지옥의 문들은 닫히며 사탄들은 사슬들로 묶이게 되노라.”(Al-Bukhari no.3103, Muslim no.1079) 따라서 무슬림들은 라마단 달을 기다리며 복을 받기를 소망한다.
무슬림들은 라마단을 통해 결속을 다지며 신앙이 깊어진다
금식은 라마단 기간인 한 달 동안 실행되며, 그 해의 아홉 번째 초승달이 나타날 때부터 시작한다. 보통 매일 해가 뜨기 전 새벽 4시부터 일몰 때까지인 오후 6시까지가 금식 시간이 된다. 금식이 끝나면 저녁 식사를 하고, 예배에 참석하며, 무슬림 공동체를 더욱 강력하게 결속시키는 시간을 갖는다. 금식하는 동안에는 그 어떠한 것도 먹는 것이 불가능하다. 침도 삼키지 않으며, 물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으며, 약물조차 복용하지 않는다. 또한 향수를 바르거나 사교를 하는 것도 금하며, 성관계도 하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을 모욕하더라도 모욕적으로 대꾸해서도 안 된다. 자기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용서해야 하며, 누군가 도움을 요청하면 반드시 도와주어야 한다.
또한 이 기간의 목적 중 하나는 꾸란 전체를 읽는 것이다. 만일 이 기간에 꾸란을 모두 읽으면 갑절의 복이 내린다고 그들은 믿는다. 그래서 무슬림들은 개인적인 욕구를 억제하고 열정을 불러일으켜, 꾸란에 대하여 탐구하고 알라를 더 깊이 알려고 한다.
이 기간에 이슬람은 종교적으로 더 큰 목적을 달성한다. 즉 전 세계의 모든 무슬림들이 같이 금식함으로써, 그들 각자는 서로에게 형제애를 느끼고 알라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라마단 달이 되면 이름 뿐인 무슬림들이 독실한 무슬림이 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 한 달 동안의 라마단이 끝나면 3일 동안 축제를 벌이는데, 이를 ‘이둘-피뜨르’(Edul-Fitr)라고 부른다. 이 축제 동안은 무슬림이 금식의 결과로 알라에게 위대한 보상을 받는 기간으로서, 다른 무슬림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며 축제를 벌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라마단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타종교의 행사로 인식하여 무관심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오히려 이슬람에 대하여 바로 알고, 무슬림의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기회가 되기 비란다.
첫째,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은 같은 신(神)인가?
국민일보의 조사에 의하면, 목회자들과 기독교인의 24.3%가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은 같은 신”이라고 답했다. 이슬람에서도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은 같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이 같은 신이라면, 이슬람을 믿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은 본질상 내재된 속성이 다르다.
꾸란의 알라는 자연신앙적인 신(神)이다. 정통 이슬람에서는 알라와 인간 사이에 인격적인 교제가 나타나지 않는다. 반면에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과 끊임없이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다. 꾸란의 알라는 모든 것을 에워싸고 있지만(꾸란 4:126),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하시며 성령을 통하여 인간에 내주(the indwelling God)하신다. 꾸란의 알라는 인간과의 관계가 주종관계이다. 반면에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과 부자관계이다.
꾸란의 알라는 삼위일체를 부인한다. “알라는 셋 중의 하나라 말하는 그들은 분명 불신자라 알라 한 분 외에는 신이 없거늘 만일 그들이 말하는 것을 단념치 않는다면 그들 불신자들에게는 고통스러운 벌이 가해지리라”(꾸란 5:73)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단일성을 믿는다(막 12:29, 고전 8:4-6, 약 2:19).
무엇보다도 꾸란의 알라는 아들이 없다고 주장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슬람에서는 신성모독에 해당한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만일 그것을 부정하면 적그리스도(요일 4:3)라고 단호하게 기록되었다. 따라서 꾸란의 알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를 부정한다. 또한 꾸란의 구원관과 성경의 구원관이 다르다. 따라서 이슬람의 알라는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
둘째, 라마단 기간에 무함마드에게 나타난 천사는 성경의 가브리엘인가?
이슬람에서 라마단을 성스러운 달로 여기는 것은, 라마단 달 27일에 천사 가브리엘이 무함마드에게 꾸란의 계시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꾸란 96장에 나타난, 계시에 대한 기록을 보면 무함마드는 가브리엘이 자기에게 계시를 주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13년 동안 계시를 받았을 때 가브리엘에게서 받았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는다. 가브리엘 천사라고 언급된 꾸란 구절은 두 곳(꾸란 2:97-98, 꾸란 66:4)인데, 모두 무함마드 생의 말기에 그 이름을 가브리엘이라고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무함마드는 누구에게서 계시를 받은 것인가?
무함마드는 첫 번째 계시 때 자신에게 찾아와 두려움을 가져다 준 ‘한 영’을 악령(惡靈)이라고 생각하였다. 『꾸란과 성령』에 의하면, 무함마드가 계시를 받을 때 나타난 ‘한 영(靈)’을 ‘진’(Jinn)으로 보고 있다. 진이란? 아라비안나이트의 ‘요술램프’에서 나온, 램프를 문지르면 나타나서 소원을 들어주는 도깨비 같은 존재이다. 이 ‘진’(Jinn)이라는 존재는 성경에는 없고 꾸란에만 나오는데, 중동과 아랍 지역에서 거의 모든 사람의 생활 속에 진의 존재와 그 역할을 두려워하고 있다. 이슬람에서는 무함마드에게 나타난 영이 성령(聖靈)이며, 이 성령을 가브리엘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셋째, 이슬람은 타종교인가 기독교 이단인가?
꾸란에 구약과 비슷한 내용이 약 60%, 신약과 비슷한 내용이 약 6-7% 기록되어 있다. 꾸란을 읽다 보면 성경의 내용과 같은 이름들이 많이 나오고, 똑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일까? 무함마드 당시에 중동은 비잔틴 기독교 제국이었다. 그래서 많은 이단들은 비잔틴 제국에서 살지 못하고 아라비아 반도로 피신했다. 따라서 무함마드는 이슬람 종교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단들의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에 대한 꾸란의 견해는 아라비아 지역에서 영향력이 컸던 ‘컬리리디아니즘’(Collyridianism)이란 종파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꾸란 속의 예수님에 대한 묘사는, 당시 아라비아 지방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본질상 ‘도케티즘’(Docetism)에 속한 많은 영지주의적 기독론의 영향을 받았다. 무함마드에게 영향을 끼쳤던 또 하나의 중요한 이단은 에비온(Ebionites)파였다. 무함마드 당시에 메카에는 약 200-300명의 에비온파 신자들이 살고 있었다. 무함마드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카디자도 에비온파의 신자였고, 무함마드에게 종교적으로 영향을 끼쳤던 와라까 빈 나우팔(waraqua bin naufal) 역시 에비온파의 사제이자 메카의 종교 지도자였다.
기독교인으로서 이슬람에 대하여 처음 연구하였던 사람은 다마스커스에서 살았던 요하네스(Johannes)였다. 그는 자신의 신학적 저술인 『지식의 근원』 “제2부 이단에 관하여”에서 이슬람을 이단으로 간주하였다. 그 이유는 “무함마드가 이단이었던 아리우스파 수도사에게서 정보를 받아서 이슬람이 시작되었으며, 비록 꾸란에서 예수님을 알라의 말씀이자 영으로 언급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否認)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1483-1546) 또한 이슬람을 이단으로 규정했으며, 기독교인들에게 이슬람이 얼마나 해로운 종교인지 알리고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 더욱 강건해지도록 하기 위해 1542년 꾸란의 라틴어 번역을 찬성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기독교의 반이슬람 논쟁자의 반열에 서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외국인의 유입과 한국인의 개종을 통해 이슬람이 밀물처럼 차 오르고 있다. 한국의 무슬림은 약 25만 명이고, 비공식적으로 40만 명을 헤아리고 있다. 오래 전 기독교의 그늘진 곳이 이슬람 발생의 태반(胎盤)의 역할을 했듯이, 오늘날도 기독교의 그늘진 곳이 온갖 이단들과 이슬람의 모태(母胎)가 된다. 세속화된 기독교로는 이슬람이라는 파도를 막을 수 없다. 이제 교회는 기독교의 본질과 개혁주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스만투르크의 술레이만 대제가 유럽을 공략하자 위기의식을 느끼고 이슬람을 연구했던 종교개혁자들은, 이슬람을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회개의 도구”로 보았다. 따라서 타락했던 중세 기독교를 향해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외쳤다. 한국에서 이슬람이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는 이 때에, 기독교인들은 다시 한 번 성경으로 돌아가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 꾸란을 연구하고 종교개혁을 가속화했던 마틴 루터의 말로 결론을 맺고자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슬람에 대항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자비로우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더 개선하자는 것이다.”
유해석 선교사
FIM국제선교회 대표
‘우리 곁에 다가온 이슬람’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