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우 목사의 로마 이야기
로마에서 동쪽으로 뻗어 있는 아퀼라(Aquila) 고속도로를 따라 60여 Km를 가면 비코바로(Vicovaro) 톨게이트 안내판을 만난다. 그 톨게이트를 빠져나가 왼쪽 길을 따라 계속 직진하면 기원전의 마을 수비아꼬(Subiaco)라는 도시에 이른다. 현재 1만여 명이 살고 있는 깊은 계곡에 자리한 작은 도시로, 이곳은 1950-1960년대를 풍미했던 유명한 배우 롤로브르지다(Lollobrigida, 1927-)가 출생한 곳이기도 하다.
그 도시를 통과하여 계속 직진하면 왼편으로 Jenne 표지판을 만난다. 그 길을 따라 오르막길로 한참을 올라가다가, 차량 대여섯 대가 들어갈 수 있는 주차장을 만나게 된다. 그 주차장 맞은편이 네로(Nero)의 별장 터다. 그 별장을 지나 직진하다가 왼편으로 베네딕토수도원 표지판이 보이는데, 그 표지판을 따라 끝까지 가면 거대한 바위로 된 절벽에 잇대어 지은 웅장한 건축물을 만나게 된다. 그 건축물이 바로 서방에서 첫 번째 수도원 운동을 일으켰고 지금도 변함없이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베네딕토(Benedictus, 480-543)의 수도원이다. 세상은 이처럼 어디에나 거룩함과 속됨이 가까이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문을 겨우 통과하면(겸손한 자만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로 문이 좁고 낮게 만듦) 거대한 바위 절벽을 배경으로 세운 수도원 건물의 회랑을 지나게 되는데, 그 회랑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천 길 낭떠러지라서 현기증이 난다. 마치 하나님의 실존 앞에 선 인생처럼.
이곳은 서방교회의 대표적인 수도원이었기에,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o)를 포함해 경건한 삶을 지향했던 분들 가운데 이곳을 방문한 사람은 셀 수 없이 많다. 이분의 신앙을 본받기 위해 베네딕토란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역대 교황들 중에서도 그렇다. 이는 이분의 영성이 시대를 뛰어 넘어 얼마나 강력하게 역사하는가를 느끼게 한다. 그런데 이런 분에 대해 신학생으로 교회사를 공부할 때 잠깐 스쳐갈 뿐, 진지하게 탐구하는 이들은 없는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 우리의 진정한 영적 선배가 되는 분인데 말이다.
베네딕토는 중부 이탈리아의 노르차(Norcia)에서 출생했다. 노르차에는 그가 태어난 장소가 유적으로 있어, 많은 방문객들이 찾아 온다. 그곳은 현재 인구 5천여 명이 살고 있는 작은 동네지만, 영적 거성을 배태한 대단한 마을이다. 현재는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작은 마을들이 연합하여, 친환경 무공해 식품을 생산하는 일에 공조하는 슬로우 시티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상점들마다 마을 특산물인 치즈나 프로슈토(Prosciutto: 건조한 돼지고기)가 종류별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작은 동네에서 그처럼 전 기독교인들을 아우르는 위대한 사람이 탄생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 같다.
베네딕토는 귀족 출신으로 스무 살에 로마로 유학을 왔다. 로마는 1200년 동안 세계의 수도로서 자존심을 지녔던 도시였으나, 당시는 꿈을 철저히 잃어버리고 정신적 공황을 겪고 있었다. 476년에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그 찬란하고 장구했던 역사의 커튼을 내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로마인들이 추구할 수 있는 것은 쾌락에 탐닉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방탕에 자신을 방임하는 일이었다. 이런 풍조가 만연했던 때였다.
베네딕토는 큰 비전을 품고 유학을 왔지만, 꿈을 잃어버린 로마에서 방탕과 환락이 지배하는 모습에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는 교회대로 어거스틴이 세상을 떠난 이후 구심점을 잃고, 캄캄한 바다에 떠 있는 일엽편주와 같았다. 이런 상황을 읽은 그는 세상 공부를 접고 오직 진리를 구하고자, 성경을 들고 수비아꼬(Subiaco)의 깊은 계곡으로 찾아 들었다.
마침 그가 찾아간 바위 절벽 아래에는 비와 눈을 피할 수 있는 천연적인 은신처가 있었다. 그는 그 장소를 택하여 하나님을 향해 외로운 영적 도전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야곱이 얍복강 나루에서 목숨을 다해 하나님과 씨름했던 것처럼 말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는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무려 3년 동안을 그 바위 밑을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 이곳에서 버텨낼 것인가를 고민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은 무엇인가를 깨닫기 위한 길이었다. 그것은 육체적으로 죽는 길이었다. 그 이유는 우선 먹어야 하는데 먹을 것을 예비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에게도 이런 사실을 상의하거나 고백하지 않았다. 그저 홀로 결단하고 이 깊은 계곡까지 찾아온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로 작정하신 것을 본받으려는 행위였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결단, 그곳에 기적은 일어나도록 되어 있다.
저 아래엔 네로 황제의 별장이 그림처럼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 깊은 계곡의 맑은 물은 일찍이 클라디우스 황제가 로마 시민들을 위해 식수로 사용하게 한 아니에네(Aniene) 강물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런 것들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진리에 대한 목마름만이 그를 압박했다.
혈기 방장한 젊은 나이에 견디기 어려운 것은 정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이곳에서 3년간 기도하는 동안 자신을 아주 고통스럽게 했던 존재를 형상화했는데, 그것은 꼬리가 달린 교활한 짐승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는 사탄의 시험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길 수 있었다.
그가 수행하는 것을 안 로마의 친구가 이곳까지 매번 식사를 준비해 와서, 깊은 우물을 퍼내기 위해 두레박을 이용하는 것처럼 긴 줄이 달린 바구니를 이용하여 바위 꼭대기에서 달아 내렸다. 높이가 100여 미터나 되는데 말이다. 이세벨을 피하여 광야로 도망친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통해 먹을 것을 공급하신 것처럼 말이다. 이 사실을 17세기의 위대한 조각가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 1598-1680)는, 바위굴에 있는 베네딕토와 그에게 식사를 제공했던 바구니를 형상화했다.
주를 위해 죽으려는 자는 산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나는 살려고 바둥거리는지도 모른다. 죽으려 할 때는 단순하게 되지만 살려고 할 때는 많은 문제를 만나게 된다. 주님을 좇는다고 하면서도 항상 살려고 몸부림치고 고민하는 나의 모습에 경악할 때가 있다. 정말 천국을 믿는 자로서의 삶인가 싶기도 하고 말이다.
베네딕토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잃어버린 양을 찾던 목자가 우연히 바위 밑에서 수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목자는 베네딕토가 범상치 않은 존재임을 한눈에 알고 그를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영적으로 캄캄한 시대였기에, 진리에 목말라하던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모여들게 되었다. 그 수는 열두 명이었는데, 이들이 조직한 것이 베네딕토수도회였다.
그런데 그가 근처의 수도원 원장 자리에 오르자 인근 수도사들에게 큰 시기를 받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525년에 로마와 나폴리 중간에 위치한, 해발 520미터의 몬테 카지노(Monte Casino)로 갔다. 그곳은 지금까지 베네딕토수도회의 총본부로 사용되고 있다. 그곳에서 비로소 공동체를 위한 규칙을 제정해 엄격하게 지켜나갔다. 이는 복종(수도원장과 자신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기도, 공부, 노동, 정주(한 수도원에서 죽을 때까지 머물며 함께하는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끝까지 유지함) 등으로, 서방교회 수도의 전범이 되었다. “기도하고 노동하고 독서하라”(Ora et labora et lege), 이것은 이들의 규범(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막스 베버)이었다. 이 규범은 지금도 변함없이 지켜지고 있다. 주차하고 받은 표의 윗면에 기록되었다. “기도하고 일하십시오”(Ora et labora)라고.
그는 서방교회 영성의 중요한 횃불이 되어, 천오백 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서 영적 안내를 하고 있다. 한 젊은이가 진리에 대한 목마름으로 찾아간 깊은 골짜기, 그의 희생을 통하여 커다란 불이 붙었다. 그리고 그 불은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진리에 목마른 사람들에게 진정한 안내를 하고 있다.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의 대부인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도 어릴 때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아폴로 신을 섬기던, 영적으로 더렵혀진 산을 말끔하게 청소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터로 삼은 수도원. 해발 520미터의 정상에 버티고 서 있는 수도원을 힘들게 오르면서, 나는 수없이 자신을 향해 말했다. 진리를 위해 고난을 선택하는 것은 편안함을 포기하는 것이요,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말이다.
베네딕토는 귀족이었기에 하인과 함께 로마로 공부하러 왔다. 공부를 마치면 귀족들이 얻을 수 있는 좋은 자리가 기다리고 있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로망인 소위 ‘스펙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진리를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버렸다. 그랬을 때 그의 현실에는 차갑고 눅진한 바위 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용기 있게 그 자리를 지켜냈을 때, 그 여파는 대단했다. 1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영성은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고 있다.
저 아래로 나폴리와 로마 고속도로를 지치지 않고 지나가는 수많은 차량들을 고즈넉하게 바라보고 있는, 수도원 마당에 서 있는 베네딕토! 그는 무슨 메시지를 전하기 원할까? 나는 그 베네딕토의 형상을 보면서 주님께 간구했다. 주님, 우리에게 허락하소서! 어둠을 밝힐 수 있는, 베네딕토 같은 참된 영적 리더를! 16세기에 이곳을 방문했던 어느 시인은 이런 글을 남겼다.
Se cerchi la luce, Benedetto, perche' scegli la buia?
La grotta non offre la luce che cerchi.
continua pure nella tenebre a cercare la luce fulgente,
perche'solo in una notte fonda brillano le stelle.
빛을 찾았던 베네딕토여, 당신은 왜 빈 동굴을 선택했나요?
동굴은 당신이 찾던 빛을 제공하지 못하지만,
어둠 속에서도 빛을 계속 찾으십시오,
왜냐하면 캄캄한 어둠 속에서만 별은 빛나게 되니까.
한평우 목사(로마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