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우 목사의 로마 이야기
나는 지금 진리를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항거했던, 거룩한 역사의 현장에 서 있다. 러셀은 “역사는 그에 관한 책을 읽기보다 그 현장을 방문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했다. 그런 면에서 구라파에 거주하는 것은 이점이 크다 싶다.
피렌체의 신요레(Piazza della Signore) 광장. 500년 전에 용기 있는 한 사람 사보나롤라(Savonarola, 1452-1498)가 피를 토하듯 설교했다는 이유로 화형을 당한 현장이다. 그가 온 힘을 다해 설교할 때, 피렌체시민의 절반 가까이가 열광했다고 한다. 보통 그가 설교할 때 3~4만 명이 모였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많은 피렌체시민의 마음을 감동에 젖게 하고 시원케 했는가를 상상할 수 있다.
또한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에 공감했지만, 사보나롤라 같은 용기는 없었음을 의미한다. 하고 싶은 말, 몸짓, 외침 등등 가슴에 타오르는 울분은 가득했지만, 용기가 없어 가슴앓이를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사람들이 많겠지만. 세상에는 언제나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들의 답답한 마음을 헤아려 다독거려 주고 권력을 손에 잡은 부패한 자들을 향해 외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법이다. 세상은 항상 부조리와 죄가 난무하는 현장, 그것이 세상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사보나롤라는 교황권이 강력한 시대에 진리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수도사였다. 그가 얼마나 뜨거운 가슴으로 설교를 했는지, 피렌체 시민들은 열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설교는 당시 사목들이 하는 설교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고, 회개에 열심을 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보나롤라, 그는 이탈리아 동부에 위치한 페라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그가 의사가 되기를 원했으나, 그는 어려서부터 영적 안목이 남달랐고 세상의 악을 보면서 고통을 느끼는 특별한 아이였다. 그는 결국 부모의 소원을 뒤로하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는 오로지 하나님께 합당한 종이 되기 위해 학문과 경건 생활에 전력을 다하는 길을 걸어갔다. 때로는 건강에 심각할 정도까지 지나치게 금식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도미니크수도원에서 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를 집중적으로 연구했고, 성경에 대한 사랑이 특별했다. 그는 헬라어와 히브리어에 능숙했고 성경 전체를 거의 외울 정도에 몰입했다. 그는 수도원에서 7년간의 신학 수업을 마친 후,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을 받아 여러 곳을 다니며 설교를 했다. 그는 당시 이탈리아의 불법과 영적 타락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던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런데 그를 눈여겨 보고 피렌체로 픽업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메디치이었다. 그는 피렌체에 있는 성 마르코 수도원으로 올 수 있었고, 후에 그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어느 날 기도 중에 하늘이 열리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그리고 음성을 들었는데, 세상으로 나가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는 그 때부터 오로지 세례 요한처럼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게 되었다. 결코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메시지는 이전에 들어 보지 못한 강력한 것이었다. 그의 설교의 주제는 “주님의 재림이 임박하였으니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심판의 칼이 피렌체에 임한다는 강력한 설교를 통해, 당시의 정치가·예술가·상인·신부들까지 회개의 대열에 참여했다.
그는 자신의 설교에 은혜받은 수많은 시민들의 지원을 받아 피렌체 도시를 바꾸려고 했다. 그래서 설교만 한 것이 아니라, 물러난 메디치 가문의 통치권을 이어받아 피렌체를 거룩한 도시로 만드는 일을 도모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허영의 소각>을 주선하여 각종 음란서적·그림, 사치품 등을 불태우도록 했는데, 르네상스의 위대한 화가 보티첼리 등도 그 대열에 합류하여 자신의 그림들을 불에 던지기도 했다. 사람들은 길을 걸을 때도 성경을 열심히 읽느라 서로 부딪히기 일쑤였다고 한다. 술집이나 사창가가 문을 닫았고, 도박과 경마, 춤이 금지되었고, 단식을 강요함으로 폐업하는 정육점이 점점 늘어났다. 이런 모든 조치들은 일대 변혁을 이루는 도전이었다.
변혁을 위해 강력한 설교가 이어졌고, 그의 설교는 결코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당시의 성역이었던 교황에 대해서도 가차 없이 부패하고 타락적인 면을 공격했다. 당시 알렉산더 6세(1452~1498)는 교황 중에서도 가장 부패한 교황이었다. 그는 정부와의 사이에 네 명의 자녀를 두었고, 그 외에도 여러 자녀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의 권모술수는 종교인이 아니라 세상의 왕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는 추기경 시절에 여러 교황들의 성직록을 맡아 엄청난 돈을 축적했고, 심지어는 그 돈으로 교황직도 매수할 정도였다.
희대의 부패한 교황과 탁월한 경건주의자의 대립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보나롤라는 교황 알렉산더 6세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강력한 도전을 했다. 경건을 목숨처럼 여기던 그는 당연히 교황의 삶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황은 피렌체의 강력한 지도자였던 사보나롤라에게 타협의 손길을 내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많은 돈과 추기경의 자리를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그 때 사보나롤라는 교황의 제의를 거절하면서 이런 유명한 말을 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추기경의 빨간 모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허락하신 죽음, 곧 주님을 위해 나의 몸을 온전히 번제로 드리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이 흘리신 붉은 피로 물든 거룩한 모자를 쓰고 싶습니다.”
당시는 권력층들이 어린 자녀들을 추기경으로 임직시키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십 대에 이미 추기경으로 임명되는 일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교황인 레오 10세도 13살에 추기경이 되었다. 성직이 돈으로 매매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추기경이 되는 일은 출세의 지름길이었기에, 누구나 그 길을 가고 싶어했다. 이런 일들에 대하여 사보나롤라는 잘못되었다고, 타는 목마름으로 외쳤던 것이다.
그런데 시간에 지남에 따라 그를 반대하는 무리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피곤한 개혁자의 길을 걸어가기보다, 권력에 빌붙어 안락한 삶을 도모하고자 하는 무리들은 예나 지금이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모함과 시기, 또한 그를 따르던 피렌체시민들의 돌아섬으로, 사보나롤라는 더 이상 강력한 지도자가 될 수 없었다. 교황은 이런 움직임을 알고, 피렌체 수도사들을 동원하여 사보나롤라를 갖가지 죄목으로 고발하도록 했다.
마침내 1497년 교황은 그를 이단자로 파문하고,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그의 영혼과 육체를 분리해야 한다는 의미로, 화형에 처한 후에 그 재를 아르논강에 뿌리도록 했고, 그는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사형대 앞으로 끌려 와야 했다. 그는 결국 1498년 5월 23일에 두 동료와 함께 화형을 당했다. 그가 화형을 당하기 직전, 주교는 그의 수사 옷을 벗기며 선포했다.
“나는 그대를 전투적 교회(지상교회)와 승리적 교회(천상교회)에서 분리하노라!” 그때 사보나롤라는 대답했다. “나는 이제 전투적 교회를 떠나지만, 나를 승리적 교회에서 분리시킬 수 있는 권한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어제까지도 그에게 열광했던 수많은 피렌체시민들은 그를 바라보며 외쳤다. “선지자여! 너의 권세를 보이고 기적을 행해 보라!”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사람들의 본성의 악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일찍이 피렌체에서 순교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일찍이 그는 이곳에서 8년 동안 설교할 것과 그 설교 사역 때문에 죽게 될 것을 알았다. 고로 마음으로 죽음을 준비했기에, 두려워하지 않고 담담하게 수용할 수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날 위해 많은 고통을 당하신 주님, 그 주님을 위해 내가 기꺼이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보나롤라는 화형당한 후 그의 뼈들은 추려져 아르논강에 뿌려졌다. 피렌체를 관통하는 아르논강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사보나롤라의 신체 일부를 황송한 마음으로 받았다. 부활의 날까지 고이 모셔 두기 위해…
사보나롤라를 화형당한 장소를 바닥에 돌판으로 표시해 두었다. 그 뜨거운 화염이 사보나롤라를 휘감을 때, 그를 바라보는 군중들의 복수심에 불타는 이글거리는 눈초리를 느끼게 될 것 같다. 그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환호하고 탄성을 발했던 군중들이었는데, 야수처럼 변하고 말았다. 이것이 세상의 흐름이고, 군중의 모습이다. 사보나롤라를 회유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동원했던 교황. 그의 입을 막기 위해 추기경을 하사하겠다는 제의에 “나는 빨간 모자보다 주님의 빨간 피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고 소리를 높였던 그가 오늘 그리워진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놀라운 용기, 그 용기는 사라지지 않고, 19년 후에 수사였던 마틴 루터가 일어나게 했다. 그래서 용기 있게 개혁을 기치를 들게 했다.
사보나롤라가 화형당한 바로 그 자리에서 나는 서 있다.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은 한 점에서 태어나고 한 점으로 세상을 떠난다. 용기 있던 그가 마흔 여섯 살에 진리를 외치다 떠난 바로 그 자리! 그 자리는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 시대, 또 다른 사보나롤라를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한평우 목사(로마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