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우 목사의 로마 이야기

▲한평우 목사(로마한인교회).
▲한평우 목사(로마한인교회).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은 백지 한 장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 그 이유는 어떤 것에 대하여 인지할 때, 지혜롭게 행동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관심은 전부터 있었으나 이런 일 저런 일로 미루다가, 아내와 함께 드디어 집을 나섰다. 성경에 기록된 삼관(행 28:15)을 찾아 보기 위해서였다. 이미 그곳에 다녀 온 집사님에게 상세한 설명을 들었던 터다. 수 년 전부터 그곳을 찾아 보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제야 실행을 하게 되니, 삶이란 항상 그 무엇에 쫓겨 떠밀려 가는 것 같다.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을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전도를 받고도 차일피일 교회 가기를 미루다가 기회를 잃어 버리는 경우가 빈번하다. 성경에 나오는 총독 벨릭스처럼…….

삼관은 로마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도 바울은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고 싶어했는데, 그것은 로마에 복음을 전하려는 의도였다. 그래서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항해하던 중 풍랑을 만나 큰 고통을 당하다가, 겨우 구조되어 멜리데에 하선할 수 있었다. 거기서 얼마 동안 지낸 후에 다시 로마로 항해하여 나폴리 근교의 보디올 항구에 하선했다. 그리고 기다리던 형제들의 초청을 받아 한 주간을 보낸 후(행 28:14), 아피아 도로를 따라 로마로 갔다. 보디올(현 Pozzuoli)에서 로마까지는 200Km가 넘는다. 그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여러 날이 걸렸을 것이다.

▲삼관의 터. ⓒ한평우 목사
▲삼관의 터. ⓒ한평우 목사

드디어 바울은 로마를 50여Km 남겨 둔 곳까지 당도했는데, 그곳에는 삼관이 있었다. 삼관이란 여행객들을 위해 아피아 가도에 지은 세 개의 펜션을 의미한다. 그런데 로마 교우들은 사도 바울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환영하려고 삼관까지 마중을 나가 기다렸다. 만난 적이 없었던 바울이지만, 이미 로마 교인들은 서신을 통해 그의 됨됨이를 알고 있었다. 로마서를 통해 바울의 복음에 대한 탁월한 해석과 선교에 대한 열정은, 로마 교인들을 감동케 하고도 남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먼 곳까지 마중 나와 준 그들의 환영을 통해, 바울은 큰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되었다. “그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저자와 삼관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저희를 보고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행 28:15).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아 아피아 길 바로 옆에 있는 호텔(Foro Appio Mansio hotel)에 들어갔더니, 내부가 로마 시대의 유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래서 혹 여기가 삼관인가 하여 물어 보았더니, 현관에 있는 젊은 아가씨는 삼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이 길로 바울이 지나갔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뿐. 그래서 집사님께 전화를 했더니, 그 호텔에서 로마 방향으로 30여 미터만 가면, 오른편 길가에 비석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천천히 로마를 향해 걸어가면서 주변을 살펴 보았더니, 길가 오른편에 오래된 비석이 쓸쓸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글씨는 마모되어 읽을 수 없었지만, 이곳이 로마 교인들이 바울을 만난 장소라는 의미라고 한다. “만약 이곳이 베드로를 환영한 자리였다면 큰 교회를 세워 기리도록 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든다. 한 도시에 두 사람의 영웅은 필요하지 않은 듯하다. 사도 바울을 환영하기 위해 50여 Km를 마중 나온 로마 교인들. 그들이 서로 확인한 후 반가움에 껴안고 양쪽 볼을 비벼대며 인사하던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그 호탕한 웃음소리는 메아리쳐 지금도 이 주변을 맴돌고 있는 듯하다.

이 길은 나폴리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남편을 둔 한국인 자매들의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15년 이상을 수백 번이나 지나 다니던, 바로 그 아피아(Appia) 길이었다. 나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지나 다녔는데 말이다. 안다는 것은 무의미한 공간적 장소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수단이 되는 것 같다. 

삼관 주변을 둘러 보았다. 이곳은 라티나(Latina)의 넓은 들녘으로, 로마시민들에게 온갖 싱싱한 채소를 공급하는 생산지다. 지금도 아피아 양쪽으로 넓은 들이 형성돼 있다. 들녘이 끝나는 곳은 산으로 둘려 있다. 2천년 전 바울도, 내가 지금 바라보는 산이나 푸르른 들녘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과연 바울은 이 지역을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결국 바울은 로마에서 순교를 당했다. 그가 부지런히 사역했던 선교의 여정이 이곳에서 마무리된 셈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또 한 사람의 족적이 편린으로 남아 있다. 중세의 위대한 가톨릭 신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다. 그는 교황의 명을 받아 프랑스의 주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 길을 가던 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방대한 지식을 지녔던 석학으로, 신학대전을 쓰던 중 하나님을 만났다. 그 광대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자신의 일천한 지식으로 하나님을 논한다는 것이 너무나 송구스러워서 붓을 꺾어 버렸다. 그래서 그의 신학대전은 미완성이 되고 말았다. 평소에 한없이 겸손했다던 토마스 아퀴나스!

한 사람의 남은 족적, 그 사람이 어떤 인물이냐에 따라 역사에 기록될 수도 있고 무심하게 흘려 보내게 될 수도 있다. 아마 이 길을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갔고, 앞으로도 계속 지나갈 것이다. 그런데 그 지나가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기록되기도 하고 삭제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내가 나를 보는 것과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바울을 환영했던 자리에 세워진, 2천 년 전에 존재했던 세 개의 펜션. 하나님의 위대한 종을 품었던 펜션의 터는 지금 빈 자리가 되어 우리 부부를 맞이한다. 너는 이 터 위에 어떤 집을 짓겠느냐고 질문하는 듯하다.

그곳에서 반질반질하게 닳은 검은 돌 하나를 집었다. 바울이 디뎠을지도 모르는 돌 조각이라고 여기며 말이다. 손에 있는 그 돌조각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는 과연 어떤 자국을 이 땅 위에 남기게 될까를…….

한평우 목사(로마한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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