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0일부터 26일까지 강원도 금강산에서는 실로 오랜만에 이산가족 상봉이 열렸었습니다. 2014년에 5년만에 이산가족상봉이 이뤄진지 1년 반 여만에 열린 이번 행사는 지뢰도발 및 포격으로 인해 남과 북이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도출된 결과로 어떻게 보면 가장 극적으로 성사된 이산가족 상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한국 전쟁이 마치고 서로의 생사도 모르고 지내오던 가족이 60여년이 흐른 지금 이산가족 상봉 대상자가 되어 가족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확인함은 물론, 지정된 장소에서 남과 북에 떨어져 살았던 가족들이 직접 만나는 행사입니다. 이번 만남에서는 97세 노모가 치매로 인해 72세 장남의 얼굴을 헤어질 때에 겨우 알아보고 나서 “같이 안 가?”라고 물었다는 이야기나 98세의 아버지가 65년만에 두 딸을 만나 떨리는 손으로 꽃신을 신겨줬다는 이야기 등 많은 이야기를 낳으며 2박 3일간의 두 차례 상봉 행사는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산가족상봉은 지난 1983년 국내의 한 방송사가 정전30주년을 맞아 전국에 흩어져 사는 일천만 이산가족들을 방송을 통해 생사를 확인하고 만남을 이어주자는 캠페인을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애초에 일회성 특별 방송으로 기획되었던 이 프로그램은 방송이 시작되자 마자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켜 처음 기획할 당시 95분으로 시작되었던 방송이 136일 45분 연속 방송이라는 기록을 경신하며 전국의 1만여명의 이산 가족을 연결시켜주는 성과를 나타냈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계기로 국내에 있는 이산가족 뿐만 아니라 북한에 있는 가족까지도 만나고 싶다는 열망이 실향민들 사이에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정부와 북측 관계자들은 이산가족 교류에 대해 논의를 하기 시작했으며 2년후인 1985년 9월 서울과 평양에서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교환 행사가 열리며 이산가족 상봉의 트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북한 쪽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이후의 상봉행사를 거부하면서 이산가족 상봉은 이어지지 못하다가 90년대 후반 들어 남북관계가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개발 등이 이어지면서 가까워짐에 따라, 이산가족 상봉도 논의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2000년 8월 15일 15년만에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개최된 이후 2007년까지 그 어느때보다 활발하게 이산가족들이 가족들을 만나는 장이 열렸습니다. 16차례의 상봉 행사와 4차례의 화상 상봉이 열리면서 이산가족 상봉은 정기적인 연례 행사로 굳어지는듯 했으나 북한의 핵실험이 우리나라 안전에 위협이 됨에 따라 남북관계도 다시 얼어붙어 이산가족 상봉 교류도 1년에 한번 정도로만 개최될 정도로 위축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이산 가족 상봉의 장을 정치적 이유나 군사적 이유로 미루거나 협상의 도구로 이용되어서는 안됩니다. 이산가족 대상자들의 고령화 됨에 따라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는 안타까운 일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산가족 상봉이 본격적으로 논의되던 1999년 이후 이산가족 신청자가 총 12만 9600여명인데 이중 절반에 가까운 6만 3천여명이 이미 사망한걸로 조사된것입니다. 15년 동안 하루에 약 12명꼴로 숨진 것이죠.
비지팅엔젤스코리아 용인수지지점의 장인숙 지점장(간호사)은 인터뷰를 통해 “수급자 어르신들 중에 북에 가족과 고향을 두고 오신 어르신들은 몸의 아픔과 더불어 실향의 아픔을 겪고 계시다. 그 어르신들을 만날 때면 늘 ‘고향의 봄’을 부르시는데 고향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볼때면 함께 마음이 짠해오곤 한다. 그 아픔 마음까지 치료하기 위해 요양보호사와 함께 최선을 다하는 재가요양사가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가족을 잃고 산다는 것, 고향을 가보지 못하고 산다는 건 말로만 들어도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런 상황으로 60여년을 지내온 실향민과 이산가족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힘드시겠습니까. 꿈에도 계속 아른거리는 그런 가족과 고향을 자유롭게 만나는일이 여전히 막혀있는 상황에서 한줄기 빛과 같은 이산가족 상봉 같은 행사를 더 자주 개최해 가족 잃고 사는 시니어들의 평생의 한(恨)을 풀어주는 우리 사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