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교의 역사와 신학
경교(景敎, Luminous Religion)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Nestorius, ?-약 451)를 중심으로 시작된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ism)가 중국 대륙에 와서 토착화된 것을 지칭한다. 네스토리우스는 출생이 분분명하나, 안디옥에서 교육을 받고 근처에서 수도 생활을 했으며 여기서 장로가 된 사람이다. 그는 주후 428년 당시 안디옥학파의 대표적 신학자였던 데오도레(Theodore of Mopsuestia) 밑에서 수학하며 유명한 설교가로 알려지고, 당시 동로마 황제였던 데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에 임명되었다. 즉 그의 신학은 안디옥학파의 기독론적 전통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열심 있는 신앙과 경건한 삶으로 ‘제2의 크리소스톰’이라는 명성을 얻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단 논쟁에 휘말리게 된 것은 알렉산드리아학파와 안디옥학파 사이의 해묵은 감정싸움에서 비롯된 감이 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있었던 기독론 논쟁에서 안디옥파에 속한 네스토리우스 밑에 있던 아나스타시우스는 다른 파(派)에서 온 자들이 마리아를 “하나님을 낳은 어머니(Theotokos)”라고 표현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 논쟁에 조금 늦게 도착하여 뛰어든 네스토리우스는 아나스타시우스를 따라 마리아를 “사람을 낳은 자(Anthropotokos)” 또는 “그리스도를 낳은 자(Christotokos)”로 부르는 것을 선호하였다.
사실 논쟁의 중심에 있던 이들 중 어느 쪽도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미세한 설명과 해석의 차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그렇게 된 것은 신학적 논쟁 이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어떤 사람이 알렉산드리아의 총주교였던 키릴을 황제에게 고소한 일에 대해 네스토리우스가 그 처리를 맡게 되었을 때에 양측이 감정싸움을 벌이게 된 데서 기인한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키릴은 로마 교구의 지원까지 받으며 안디옥 출신으로 동방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었던 네스토리우스와 신학 서신 논쟁을 벌여, 키릴의 12개 조의 서신 공격(anademas)과 네스토리우스의 반박 답변(counter anademas)을 거치며 서로 심각한 감정의 골이 생기고 만다. 결국 로마 교구의 도움을 받은 키릴은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안디옥의 요한(네스토리우스 측)이 육로로 도착하기 전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고 말았던 것이다.
동방의 감독들은 에베소 공의회 이후에도 변함없이 네스토리우스의 대주교직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451년 칼케돈 공의회는 유티케스의 단성론을 정죄하여, 키릴이 아니라 오히려 네스토리우스의 기독론에 근접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마르틴 루터도 네스토리안주의가 정통 기독교 교리와 큰 차이가 없다고 보았다.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한 공의회의 판단이 옳았는가에 대해서는 20세기에 와서도 논쟁이 재현된다. 1910년, 구원에 있어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강력하게 주장한 네스토리우스의 책 『헤라클레이데스의 시장』(Bazaar)이 발견되어 시리아어로 번역되어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쟁은 네스토리우스는 네스토리우스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주장(J. F. Bethune-Baker)과 네스토리우스가 정죄받은 것이 옳다는 주장(F. Nau)으로 여전히 갈라졌다.
경교의 동방 선교와 한반도 전파
네스토리우스는 면직 파문되었으나, 그를 따르는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은 선교적 열심이 강해 이집트·시리아·팔레스틴·아라비아 및 인도까지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들 네스토리우스파가 당 태종 때인 7세기 중국 대륙에서 경교(景敎)로 불렸다. 교회는 페르시아에서 온 교회라는 의미로 파사사(波斯寺)라 불렸고, 당 현종(玄宗) 때에는 대진사(大秦寺)라 개칭하여 각지로 그 세력을 뻗어갔다. 당 멸망 후 핍박 시기를 거쳐 몽골 원나라 치하(治下)에서는 야리가온(也里可溫, Arkaun)으로 불리며 그 신앙이 허락되어 신자와 교회가 증가하였다.
한반도 초기 기독교 전래에 대해 침묵하던 국내 주요 교회사학자들도, 경교 전래에 대해서는 그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국내 교회사가 중 한국의 고대 기독교 전래를 최초로 다룬 인물 중 한 사람인 이장식 박사는 <아시아기독교사>에서 당대(唐代) 기독교 전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묘사하기는 하나, 경교의 한반도 전래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자제하고 있다. 민경배 박사도 <한국기독교회사>에서 근대 이전 기독교와의 접촉을 다루면서 당을 통하여 접촉된 경교의 영향을 다루고 있다. 김양선 목사는 신교(新敎)가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 경교(景敎)가 신라와 고려조에 전래되었다고 단정하였다.
경교는 635년 중국에 전래된 이래 845년 외래 종교에 대한 대박해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약 200여 년간 당(唐) 전토의 유력한 종교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당과 밀접하게 교류하던 신라는 당 수도 장안(長安)에서 유행하던 것이라면 수입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당연히 경교도 유입됐을 거라고 보았다. 당의 수도 장안에 알로펜(Alopen, 阿羅本) 일행이 도착한 이듬해인 선덕여왕 4년, 당의 사신이 신라에 도착한 기록이 있다. 이후 수많은 신라 사신들과 상인들과 유학생들이 당에 드나들었으니, 신라 사람들이 경교를 몰랐을 리가 전혀 없다.
특별히 627년 당 태종이 즉위하고 635년 공식적으로 경교 선교사가 당나라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이미 당나라에는 장안을 중심으로 외국에서 온 경교 신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당 태종은 바로 644년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양만춘 장군이 이끄는 병사들과 안시성에서 교전을 벌여, 눈에 화살을 맞고 패한 인물이다. 그리고 당시 백제는 한때 단순히 한반도 서쪽 국가가 아닌, 중국 정사 중 하나인 양서(『梁書』)에 기록된 대로 '22개 담로'를 중심으로 중국 땅과 현 일본까지 그 영역을 지니고 있던, 반도 일부-대륙 일부-해양을 아우르는 글로벌 국가였다. 한반도에서는 이렇게 중국 대륙과 일본에까지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밀접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도무지 무슨 뜻인지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일본서기 신대(神代)에 일본의 출발이 비로소 '담로에서부터였다'는 암호가 슬쩍 기록된 것은, 훗날 누군가가 일본 기원의 진실을 밝혀 주기를 기다리는 저자의 결정적 암호처럼 느껴진다. 이 백제가 660년 멸망했을 당시 많은 피난민이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그 중에 기독교인이 많았다는 富山昌德의 기록(『日本史 중의 佛敎와 景敎』, 東京大出版會, 1969, 46-47)은 의미심장하다. 이미 삼국에 경교가 광범위하게 전파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 고대 기록인 《續日本書記》 〈성무천황기〉에도 783년 당나라 사람 황보(皇甫)가 경교 선교사 밀리스(Millis)를 동반하여 천황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다. 김양선 목사는 고든(E. A. Gordon)의 저서를 인용하여 통일신라시대 능묘의 십이지상(十二支像)이나 페르시아 무인상, 경주 석굴암 전실(前室) 양벽에 부조되어 있는 팔부신장(八部神將) 중 두 상을 페르시아 무인상으로 보았고, 석굴 내벽에 부조되어 있는 십일면관음상(十一面觀音像), 십나한상(十羅漢像), 범천(梵天) 및 제석천상(帝釋天像) 등의 의문(衣紋)과 발에 신은 샌들, 손에 든 유리잔 등을 모두 경교의 영향으로 서술하였다. 1955년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경교식 십자가도, 불교에 흡수된 기독교 유물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경교는 마리아 숭배를 반대하였으며 십자가 이외 형상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일부 변질되었다고 보아야겠다. 사실 다보탑을 비롯한 불국사 전체가 한반도 불교사에 있어 다른 유적과 구분되는 전무후무한 독특한 양식을 지니는 것은, 실제적 설계자가 불교 이외 어떤 영향을 받은 인물이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신학적 평가
비록 국내 문헌에 경교 전래에 대한 구체적 내용들이 등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러 정황 증거로 보아 어떤 식으로든 한반도 안에 경교 전파는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따라서 가야 기독교 국가설이나 도마 한반도 선교설에 비해, 경교적 흔적을 한반도에서 찾는 작업은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한반도 경교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살리지 못하고 소멸된 것이 분명하다. 즉 국가적 압박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지 그 근거를 뚜렷하게 찾을 수는 없으나, 한반도에 전래된 경교는 한반도의 신앙적 풍토 아래서 복음의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스스로 소멸되었거나 불교나 민속종교 등과 더불어 융합되면서 토착화의 길을 걸어간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www.kictnet.net)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퍼온 것이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