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니엘신학교 총장 최덕성 박사님이 오는 23일 열리는 제1차 아나뱁티스트(재세례파) 신학 학술발표회 'What's Anabaptist? Why Anabaptist?'와 관련해 기고를 보내왔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최근 출간된 최 박사님의 <위대한 이단자들: 종교개혁 500주년에 만나다>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최 박사님은 "반론 제기를 얼마든지 환영한다"고 했습니다. -편집자 주
◈칼빈의 재세례파 논박
순교는 목숨을 담보한 피의 증언이다. 자기의 믿음에 대한 확언(確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순교자들은 목숨을 걸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성경적 신앙'을 지켰다. 피의 희생, 순교는 일면 고귀하다. 그러나 모든 피의 증언이 값진 것은 아니다.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의 '왼쪽 날개'라 불리는 좌파종교개혁-재세례파가 이 경우에 해당한다.
마틴 루터와 울리히 츠빙글리가 주도한 유럽의 종교개혁운동은, 변질된 기독교를 성경에 충실하게 개혁하려는 의도로 진행되었다. 성경이 허락하는 합리성과 현실성을 고려하여, 희생을 줄이면서도 교회개혁을 성공시키는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합리성이 결여된 급진적 개혁을 따르지 않고,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교회와 국가 간 관계의 긍정적 가치와 권위를 인정했다. 기독인은 국가에 복종해야 하며, 그 조직 안에서 여러 다양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한편 재세례파는 개혁파의 교회개혁운동이 미흡하며 신학적으로 소심하다고 생각하고, 근원적인 변화를 추구했다. 재세례파 운동의 핵심은 재세례가 아니다. 예수 신앙이 정치 권력과 대립적일 때 정상적인 모습을 유지한다는 발상이다. 구약시대, 신약시대, 제1세기 교회를 보라. 모두 국가와 교회가 대결 구도 속에 있었고 박해를 받지 않았는가. 이 대립 구도 회복 과정을 거쳐야 기독교 본래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재세례파 운동의 목표였다. 재세례파의 이 관점은,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개종과 기독교의 로마 제국 종교화로 말미암아 순수한 신앙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재세례파는 성경적 교회 모델을 회복하려 노력하고, 신약성경을 신행의 권위로 인정하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교회와 정부 간 관계의 고리를 끊고, 유아세례를 반대하며, 자유교회 전통을 지키려 했다. 시의회의 교회 간섭, 특히 영적 사안들에 대한 사법적 결정권 행사를 거부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미신에 대한 저항, 자본주의적이며 세속적인 풍조 거부, 세상과 구별되려는 거룩성과 분리 의식, 신행일치 정신, 평화주의와 비폭력주의는 기독교의 본질과 특성을 드러내는 교회사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재세례파가 이단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재세례파는 새롭게 출범하는 프로테스탄트 공동체 주변에서 자신들의 길을 모색하면서도 루터, 츠빙글리, 칼빈과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웠다. 칼빈은 재세례파를 직접 경험했고,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칼빈을 괴롭힌 이단자 세르베투스는 재세례파 인물이었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에 체류하는 동안 재세례파 추종자 한 명을 회심시켰으며, 그의 미망인과 결혼했다.
칼빈은 재세례파가 종교개혁의 원리인 '오직 성경'의 우산 안에 있음을 인정하고, 성경을 최종 권위로 받아들이는 점을 긍정적으로 여겼다. 그러나 '오직 성경'을 그릇되게 이해하고, 성령을 앞세우지만 실상 '다른 영'을 거쳐 성경을 해석함을 확인했다. "의도적으로 매번 닭에서 나귀로 비약한다. 횡설수설한다. 여러 가지 문제를 뒤섞는다. 종종 터무니없는, 야만적 어법을 사용한다. 잘리고 동강난 성경 구절들을 인용한다. 순서대로 입장을 정리하지 않고 거침없이 말함으로써 마치 큰 위엄이 있는 것처럼 믿도록 한다"고 말했다.
칼빈은 진리와 자유를 위해 로마가톨릭교회와의 분리를 마다하지 않았지만, 분리주의 교회관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분리주의 정신을 가지고 독자적인 길을 걸으며 교회와 국가의 질서를 위협하는 재세례파에 동조하지 않았다. 개혁파 종교개혁자들은 무질서를 환영하지 않았다. 책임 없는 자유를 추구하지 않았다. 교회와 사회 질서 유지의 책임을 거부하는 이원론적 발상을 가진 재세례파를 향하여 그들이 그리스도께서도 비난하지 않는 것을 비난한다고 지적했다.
재세례파와 칼빈이 공유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 성만찬의 화체설 부정, 권징의 중요성 강조, 세상과 거리를 유지하라는 가르침, 정치 권력에 한계를 두는 점이었다. 그러나 국가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에 큰 차이가 있었다. 칼빈은 재세례파 안에 다양한 견해가 있음은 알았다. 칼빈이 접한 재세례파 구성원들은 극단주의자들이었다. 특히 멜키오르 호프만 중심의 혁명적 재세례파의 행동은 '돌연변이'에 해당했다.
칼빈은 츠빙글리의 재세례파에 관한 글이 나온 지 17년 뒤에 재세례파의 오류를 지적하는 '재세례파 논박(1544)'을 썼다. <기독교강요>에서도 재세례파를 비판한다. 칼빈은 재세례파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재세례파 안에는 여러 그룹들이 있다. 칼빈은 재세례파가 공통적으로 지닌 특징을 논박한 것으로 보인다. 칼빈의 '재세례파 논박'은 재세례파 신학의 함정과 오류들을 알려 준다. 재세례파적 망딸리떼(mentalité, 정신구조·사고방식)를 가진 현대 기독인이 지닌 특징을 이해하는 데 유익한 정보를 제공한다.
◈유아세례
재세례파 신조 '슐라이타임 신앙고백서(1527)' 제1조는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성인세례를 주장한다. 신앙고백과 회개를 한 사람에게만 세례를 베풀어야 하며, 유아세례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교황주의자들이 날조한 것이라고 한다. 칼빈은 세례와 할례를 동일시한다. 구원의 공동체적 개념을 가지고 재세례파의 유아세례 주장을 통제하는 종교적 개인주의를 다음과 같이 논박한다.
유아세례의 기원은 사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항상 지켜 온 거룩한 규례이다. 사도 시대 이후 항상 시행되어 왔다. 세례는 제자 삼기의 부수적 활동으로 언급되어 있다(마 28:19; 막 16:16).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파송을 받아 복음을 전했다. 그들은 가르침에 대한 확증으로 세례를 첨가했다. 그렇다. 이방인, 이교자들을 기독인 되게 하려면 세례를 베풀기 전에 복음을 가르쳐야 한다. 믿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해야 한다.
개인이 신자로 받아들여질 때 그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약속은 그 자신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그의 자녀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나는 너와 네 자손 대대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고 했다. 기독인의 어린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들과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언약 때문에 세례를 받는다.
재세례파는 여기에서 실수한다. 비기독인이 세례를 받아야 할 경우, 세례를 받기 전에 교리를 배워야 한다. 교리는 하나님이 자신 뿐 아니라 그의 자녀의 구주이심에 대한 고백을 포함한다. 성경은 "믿고 세례를 받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이 가르침은 교회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 비기독인들에게 준 것이다. 어린이는 부모와 더불어 맺어진 하나님의 언약에 포함되어 교회의 식구가 되었다. 기독인의 자녀들에게 비기독인에 해당되는 성경 구절을 적용시킴은 잘못이다.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 새롭게 받아들여지는 이방인, 비기독인에게는 진리를 가르치고 나서 세례를 주어야 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태에서 나오기도 전에 교회에 속한 어린이에게는 다른 이치가 있다. 그들에게 베푸는 세례는 부모와 선조들이 받은 약속에 기초해 있다. "나는 네 후손들의 하나님이다"(창 17:7)라는 언약은 모든 기독인들에게 주어졌다. 그러므로 그들의 자녀들은 세례를 받을 특권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자녀들을 그들의 조상 때문에 자기에게 속한 자들로 인정한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후손이 은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이삭과 그 자손들은 어릴 때 할례를 받았다.
할례와 세례는 같은 맥락의 예식이다. 세례는 죄 사함의 약속과 함께 회개와 생활의 갱신을 수반한다. 할례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할례를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얻은 무상의 의를 확증하는 표로 이해한다(롬 4:11).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에 믿음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그 믿음을 확인하는 표로 할례를 받았다. 할례를 받지 않고도 믿음으로써 올바른 사람이라고 인정받은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
세례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신생과 영적 정결 예식이기 때문에 믿음이나 회개가 없는 어린아이들에게 베푸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다면, 동일한 원칙이 할례에도 적용될 수 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할례를 거행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하나님은 어린이 할례를 명했다. 믿음에 대한 지적 의식을 가지지 못한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할례를 시행하라고 했다. 이처럼 회개와 구원의 증거인 세례를 어린이에게 베푸는 것은 합당하다. 모순이 없다.
진리는 징표에 앞선다. 하나님은 유대인에게 자신이 그들의 자녀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 증거로 언약의 상징인 성례의 표를 주었다. 바울은 주 예수께서 사람이 되어 와서 하나님의 진실성을 드러내려고 할례를 받은 사람들의 종이 되었다고 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한 것을 이루셨다고 말한다(롬 15:8-9). 그가 사람이 되심은, 둘 사이에 있는 담을 허물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동일한 특권을 함께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엡 2:14).
하나님의 은총이 유대인의 자녀들보다 기독인의 자녀들에게 적게 베풀어지는가? 유아세례는 하나님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녀들을 자신의 교회 공동체에 받아들였음을 입증하는 징표이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의 간수, 경비원, 그 가족에게 세례를 베풀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행 16:31). 사도가 유아세례를 베풀었다는 언급이 없다는 것밖에는 유아세례를 비방하고 헐뜯을 근거가 없다.
성경에는 한 명의 여성도 사도의 손에서 빵과 포도주를 받았다는 기록이 없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성찬에 참여할 수 없는가?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자녀들을 자신의 교회의 가족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유아세례는 유효하고 또 적합하다.》
◈출교와 교회분리
재세례파는 출교제도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거나 합당하게 시행되지 않는 곳에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교회가 베푸는 성찬을 받는 것은 위법이라고 한다. 재세례파는 기존의 교회가 출교를 시행하지 않음을 구실 삼아 분리해 나갔다. 칼빈은 교회의 표지인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를 행하는 한 교회 분리는 정당하지 않다고 본다. 하나님의 교리가 순수하게 전파되고 있는 교회에서 스스로 분리되는 것은, 거룩성을 앞세운 고대교회의 이단 도나투스주의와 중세기 이단 카타리파와 같은 행위이다. 교회를 보존하려면 출교 권징을 시행해야 한다. 출교는 선하고 거룩하며 교회에 유용한 제도다.
출교를 엄격히 시행하지 않는 교회를 참 교회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명확한 출교 규례를 가지고 있지 않음은 교회의 허물이지만, 그 교회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몸이다. 고린도교회는 이 점에 결핍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영예를 얻었다. 도덕적 타락과 교리적 오류와 혼란과 무질서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 공동체를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고전 1:2; 고후 1:11)"라고 일컫는다. 혼란과 무질서로 점철된 갈라디아교회도 "그리스도의 교회(갈 1:2)"로 인정을 받았다. 재세례파가 하나님보다 더 가혹한 판단을 내림은, 분별력이 결핍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교회의 순결을 갈망한다. 그러나 완벽하게 순수한 교회는 찾아 보기 어렵다.
교회 안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다. 바울은 예수께서 교회를 깨끗하게 하시고 티와 흠이 없게 하려고 피를 흘렸다고 한다(엡 5:26). 그러나 말씀은 교회에 아무런 오점이 없고 완벽하게 깨끗함을 뜻하지 않는다. 교회 구성원은 완전하지 않다. 주님은 은총으로 우리의 죄를 제거하고, 또 날마다 우리를 거룩한 피로 씻는다. 교회 안에는 선한 무리 속에 사악한 위선자들이 있다. 방탕하고 수치스러운 일들이 출교를 당할 만큼 선명하게 밝혀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잡초들을 모두 뽑아내면 동시에 좋은 씨, 알곡을 잃어버릴까 두렵다. 세상 끝까지 잡초들을 놓아 둘 필요가 있다(마 13:25, 29). 주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시험하려고 교회 안에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섞여 있는 가련한 상태를 보고 계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미신적이지 않은 순전한 예배를 드리고, 성례를 집행하는 곳에 교회가 있다. 권징은 필요하다. 선한 통치 조직이 없으면 교회는 손상된다. 교회라는 토대 위에 교리가 존재한다. 좋은 씨는 가시덤불 아래에도 놓여 있다. 사악한 사람들 사이에 많은 착하고 거룩한 사람들이 있다. 재세례파는 이러한 교회의 현실에 동의하지 않는다. 졸지에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에게 모욕을 주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재세례파는 출교가 시행되지 않거나 흠이 있는 교회에서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악인들을 배제하지 않는 성례와 성도의 교제는 기독인들을 더럽힌다고 한다. 성찬이 악인과 부당한 자들의 참여로 더렵혀지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그렇게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경우에도 자신을 성찬에서 제외시키고 교제를 거부함은 적법하지 않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배하고 말씀을 들으며 성찬에 참여하는 일을 지속해야 한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여 온전한 자는 한 명도 없다고 탄식했다(사 1:1-6). 선지자들은 그 못된 백성들과 어울리기를 포기했던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제사를 드리며 율법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순전한 교회나 제단이나 성전을 따로 세웠던가?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타락한 백성들과 함께 제사를 올리려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셨다.
하나님이 제정한 성례에 사악한 사람들이 참여해도, 기독인 자신이 깨끗하고 청결한 양심을 가지면 오염되지 않는다. 바울은 양심의 거리낌 없이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함께 있었다. 오염될 것이 두려워 무리에서 자신을 분리시켰는가? 그렇지 않다. 고린도교회의 악덕을 꾸짖으면서도 정결을 이유로 타인과 교제하지 말라고 권하지 않는다. 오히려 분리를 나무라고, 고치라고 한다(고전 5:1 이하, 갈 5:4 이하). 바울은 성찬에 관한 가르침에서 "자신을 살피라(고전 11:28)"고 한다. '이웃의 잘못을 살피라'고 명하지 않는다. 성찬 전에 타인의 허물을 조사하라고 하지 않았다. 각자 자기를 살펴보라고 한다. 바울은 수치스러운 사람들과 먹지도 마시지도 말라(고전 5:11)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씀은 개인의 사귐에 관한 것이지 공적인 교제를 뜻함이 아니다.
재세례파는 고의로 범하는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우연히 죄를 범한 사람은 두 번의 훈계를 받은 뒤에 공개적으로 징벌을 받거나 출교되어야 한다고 한다. 무지로 죄를 범한 사람을 거부하고, 고의로 범죄한 자에 대해서는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는 망상이며, 신성모독이다. 불쌍한 영혼들을 절망으로 내던지는 발상이다. 고범죄를 자랑할 자는 거의 없다. 용서의 권한은 하나님께 있다. 형제를 죽이려고 공모한, 야곱의 아들들, 사람 앞에서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 방탕하게 생활한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교정된다는 조건 하에서 회개가 요구되었다(살후 3:11, 15).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방탕과 타락을 알았지만, 그 교회를 폐쇄하라고 하지 않고 교정하라는 충고를 멈추지 않았다. 재세례파는 로마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교회 양편에게서 이단으로 정죄되어, 많은 희생자들과 순교자들을 낳았다.
재세례파는 무심코 지은 죄만 용서받는다고 주장한다. 이 말에는 치명적인 독이 들어 있다. 교회 분리는 마귀의 일이다. 사소한 과오도 용납하지 않으려 함은 지나친 극단주의이다. 거룩성을 이유로 교회를 분리해 나간 도나투스주의자들과 순수성을 이유로 물의를 일으킨 카타리파 이단은 몽상가들이었다. 그들은 흠 없는 교회라는 환상 속에 살았다. 타인의 불완전함이 자신들을 오염되게 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떨어져 나갔다. 천사보다 더 거룩한 모습을 가지려고 교회를 떠나고 분리시킴은 마귀의 짓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4권 1장의 첫 19개 항에서 신자들이 교회와 더불어 가져야 하는 일치를 언급한다. 칼빈은 교회를 떠나는 것이 잘못인 여덟 가지 경우를 열거한다. 재세례파를 염두에 둔 지적이다. ① 교리에 사소한 차이가 있다고 하여 믿음의 일치를 깨뜨리거나 교회를 이탈한다. ② 교회 안에 불상사가 있다고 하여 이탈한다. ③ 교회 안에 도덕적인 결함이 많다고 하여 이탈한다. ④ 교회가 의무를 게을리한다고 하여 떠난다. ⑤ 교회가 불완전하다고 하여 분리한다. ⑥ 교회가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부패했다고 하여 이탈한다. ⑦ 교회 안에 불경건하고 방종한 생활이 널리 퍼져 있다고 하여 떠난다. ⑧ 교회 구성원 소수 또는 다수가 죄를 범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들에게서 분리한다. 칼빈에게 교회의 표지는 말씀과 성례이며, 이 표지들을 가진 교회를 떠나는 자들은 배반자·배교자이다.
◈공무원과 위정자
재세례파는 모든 무력 사용이 마귀의 짓이라고 주장한다. 세상 권력의 남용을 거부하다, 그것의 필요성까지 부정한다. 위정자는 사악한 자들의 폭력을 억제하고 막아내는, 하나님의 사역자이다. 죄를 징벌하는 검을 가지고 있다. 보호 목적으로 검을 사용하도록 허용함은 불법이 아니다.
재세례파는 국방에 필요한 것들을 거부한다. 군수품, 요새, 무기, 군주, 상관을 비난한다. 군대의 질서에 복종하지 못하게 한다. 백부장 고넬료가 세례를 받은 뒤(행 10:47 이하), 여전히 무기를 들고 자기의 사명을 감당했다. 국토 방위 목적으로 군주가 권한을 사용함과 무기를 휴대함은 정죄의 대상이 아니다. 탐욕과 악한 호기심을 가지고 전쟁을 일으키는 군주는 책망을 받아야 한다. 재세례파는 주께서도 비판하지 않는 것을 비판한다. 하나님이 허락한 것을 비난한다. 이는 하나님의 권위를 유린함과 다르지 않다.
재세례파는 위정자나 공무원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상 통치자의 지배권은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권력이 "그리스도 밖에 있다"고 한다. 기독교 곧 교회와 사법적 지위 곧 세속 권력자가 양립할 수 없는가? 하나를 선택하려고 다른 하나를 거절해야 하는가? 검의 기능, 곧 세속 권력자의 직무가 기독인의 소명에 모순되는가? 칼빈은 기독인들이 시민적인 의(justice civile)의 신분을 포기하지 않아야 하고, 그것을 교회 바깥 사안으로 단정하지도 않아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하나님은 국가 제도를 만드셨다. 뛰어난 종들과 예언자들을 세워 백성을 다스리게 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선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악한 자들을 처벌하도록 검을 통치자들의 손에 주었다고 한다(롬 13:1 이하). 재세례파도 하나님이 통치자를 세웠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기독인이 그들과 섞이는 것은 적법하지 않다는 꼬리를 단다. 전갈과 벌은 꼬리에 독을 지니고 있다.
재세례파의 위 주장은 "나는 이 일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아무도 선한 양심으로 그것을 할 수 없다. 누구든지 이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왜 인류의 공동 유익에 봉사하는 것이 적법하고 거룩하다고 하면서 그 소명들을 능가하는 군주 직무는 범주에서 배제하는가? 왜 재세례파는 기독인이 성경이 언급하지 않는 재단사나 구두장이가 될 수 있음은 부정하지 않으면서, 성경이 명백하게 언급하는 통치자나 사법적인 인물이 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군주들과 권세자들은 하나님의 일꾼들이다. 하나님께서 선한 자들과 순수한 자들을 보호하고 사악한 자들을 징벌하도록 그들을 세웠다. 바울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거룩하고 평화롭게 살도록 할 목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했다(딤전 2;2). 재세례파는 위정자들을 기독인 무리에서 제외시킨다. 개를 도살하는 자는 제외시키지 않으면서 위정자는 제외시키는 까닭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알기 원한다. 모든 사람 안에는 군주, 위정자, 공무원이 포함되어 있다. 위정자가 기독인으로 개종하면 그 직책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은 기만이다. 재세례파의 주장은 이원론적이다. 겨우 1온스의 두뇌를 가진 자라도 재세례파처럼 말하지 않을 것이다.
칼빈은 재세례파의 맹세 금지와 관련하여, 합법적인 맹세는 백성이 하나님께 드리는 일종의 영예(신 6:13, 10:20)라고 말한다. 예수께서 맹세하지 말라(마 5:34)고 한 말은, 맹세를 남용하고 경솔히 행하는 점을 고려한 가르침이다. 칼빈은 재세례파의 영혼수면설을 반박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관련하여, 인성을 부정하고 그의 몸이 유령이었다고 하며 영혼이 육체를 떠나면서부터 부활 때까지 살아 있지 않은 상태라고 하는 주장을 비판한다.
◈평가
순교 또는 '피의 증언'이라도 예수 복음과 성경의 가르침과 진리에 충실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칼빈은 말한다. "어떤 죽음도 그릇되고 왜곡된 진리나 그릇된 교리를 승인해 줄 만큼 값지지 않다." 하나님의 순교자가 있는가 하면 사탄의 순교자도 있다. 악한 교리 논쟁을 정당화하려는 노력이나 그릇된 신념으로 죽임을 당함은, 불필요하거나 미친 고집의 결과이다. 우리는 재세례파 구성원들의 억울한 희생에 동정한다. 그러나 피로 증언하고자 했던 그들의 주장 모두가 옳은 것은 아니다.
재세례파가 기독교 역사에 이바지한 것은 정치와 종교,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다.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 이후 국가와 교회가 하나로 결속되었다. 정치와 종교는 서로의 영역을 구분하지 못한 채 뒤섞였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교권과 제권이 대립하고 야합하면서 갈등을 빚어 왔다. 국가는 기독인들에게 특권을 부여했다. 복지 행정의 일부를 교회에 맡겼다. 교회의 감독들에게 사법권을 부여했다. 성직자들의 세금과 공무를 면제해 주었다. 정치와 종교를 구분하지 않았다.
기독교의 세력은 황제의 정책 덕분에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교회는 황제도 어찌할 수 없는 거대 권력으로 등장했다. 교회는 정치와 손잡고 권력의 맛에 길들었다. 스스로 권력을 키웠다. 권력 투쟁이라는 주제어를 빼고서는 이 시대의 교회를 이해할 수 없다. 종교는 정치에 손을 내밀었고, 정치는 종교를 통치 기반으로 활용했다. 황제는 수시로 교회공의회를 소집하고, 당연한 듯이 성직을 임명했다. 정치 권력에 휘둘린 교회는 황제의 성직 임명을 허용해 왔다. 유아세례는 국가 통치자와 교회 통치자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시민 예식 기능도 가진 것으로 변질되었다. 정치와 교회의 관계, 제권과 교권의 영역에 설정에 대한 재세례파의 도전은, 정교분리 원칙 중심의 교회론 발전을 재촉했다.
재세례파는 성경을 신행의 최종, 최고, 절대 권위로 인정하고 '오직 성경' 원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 점은 종교개혁자들의 정신과 일치했다. 재세례파가 공동체 의식이 강하고, 권징을 시행하며,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고, 관행적이고 형식적인 교회생활을 거부하며, 책임 있는 신앙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높이 평가된다.
재세례파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예수신앙 공동체는 부패한 세상과 분리하여 존재해야 하는가, 아니면 세상 속에서 세상의 부패를 막는 소금이어야 하는가? 교회는 구성원들의 영생을 위해 친 포도원의 울타리인가, 아니면 현존하는 세상의 부패를 막는 누룩인가? 교회는 기독인들만으로 구성된 피난공동체인가, 아니면 복음 증언과 봉사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구원선인가?
재세례파는 전자들을 택했다. 세상 속에서 증언자, 어둠을 밝히는 빛, 세상의 부패를 막는 소금, 밀가루 서 말 속에서 전부를 부풀게 하는 누룩처럼 살려고 하지 않는다. 분리주의 성향, 배타성, 비합리적 사고, 비이성적 논리를 보였고, 기독교가 속해 있는 사회와 문화를 선도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재세례파 후예들은 오늘날에도 대체로 세상의 외진 곳에서 사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오늘날의 프로테스탄트교회는 재세례파를 이단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재세례파의 망딸리떼는 항상 경계의 대상이다. 합리성이 결여된 '순진한 문자주의'는 이단성을 지니고 있다. 주요 이단들을 보라. 성경을 앞세운다. 그러나 실제는 성경과 거리가 먼 특징을 지니고 있다. 신앙의 순수성을 앞세운 논리 비약과 완곡한 진리 왜곡은 기독교 자체를 위태롭게 한다. 성경적 신학 정립에 혼란을 준다.
재세례파 기질을 가진 기독인들은 배타적이며 과격하다. 문자주의 경향을 보인다. 비이성적이다. 논리적 함정에 빠진다. 합리성과 역사성이 결여되어 있다. 비평적 사고를 훈련하는 신학교육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목사를 안수한다. 그렇게 목사가 된 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안주하고 건전·타당성이 결여된 비합리적 주장을 절대화한다. 거칠고, 조잡하고, 저질스럽고, 무식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교회를 어지럽히고 파당을 짓는다. 성경에 충실한 것 같지만 전체 성경에 대한 통합적·합리적인 이해(tota scriptura)가 결여되어 있다. 전체 교회에 피해를 주고, 이단이라는 누명을 쓴다.
이 글은 기독교사상연구원 제2차 학술회에서 발표한 것이다. 최덕성의 <위대한 이단자들: 종교개혁 500주년에 만나다(2015)>의 제13장 '재세례파'에 담겨 출간되었다. 자세한 논의와 주석 그리고 참고문헌 등은 위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참고로 언급하고 싶다. 재세례파의 세례 방식은 침례가 아니었다. 취리히 재세례파 지도자는 한 잔의 물을 가지고 여러 사람들에게 '재세례'를 행했다. '재침례'를 행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어 '뱁티조' 또는 '뱁티스마'는 우슬초로 피를 적셔 뿌리거나, 염색하거나, 발목 깊이의 물에 들어가는 행위를 일컫는 용어다. 침례교 신자들이 이해하는 침례는 잠수 예식, 곧 잠례(潛禮)를 의미한다. '뱁티스마' 또는 '뱁티조'는 한국말로 '잠례'를 의미하지 않는다. 잠례 또는 침례가 아니라 적셔서 씻는 형태를 의미하는 우리말 '세례'로 번역함이 바람직하다.
/최덕성
글쓴이 최덕성은 신학자이다. 현재 브니엘신학교 총장(2013-)이며, 교의학 석좌교수이다. 고신대학교-고려신학대학원-교수(1989-2009), 하버드대학교 객원교수(1997-1998)였다.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 <빛나는 논지 신나는 논문쓰기>, <에큐메니칼 운동과 다원주의>, <정통신학과 경건>, <신학충돌>, <교황신드롬>, , <위대한 이단자들> 등 약 20권을 저술했다. 미국 예일대학교(STM), 에모리대학교(Ph.D.)를 졸업했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신학자대상'(2001)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