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는 인간의 본질적 문제입니다. 이런 사실을 간파한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4대 비극에서 모두 죄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인공으로 삼은 맥베스의 입을 빌려 "아라비아 향수를 모두 동원한다 해도, 이 손에 묻은 죄를 말끔히 씻을 수 없다"고 독백했습니다.
나라모라는 심리학자는 인간의 심리적인 모든 문제의 99%는 바로 죄에 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미국에서 사회적으로 유명하고 존경받는 사람 12명에게 "도망가라! 모든 것이 폭로되었다"라는 협박성 메일을 보냈더니, 24시간이 지나기 전에 모두 국외로 도망을 쳤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처럼 인생은 누구를 막론하고 죄의 문제 속에서 살고 있고, 죄의 늪에서 자유하지 못합니다. 다만 어떤 사람들은 죄가 드러나 유죄 판결을 받았고, 어떤 사람들은 죄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기에 유죄 판결을 받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롬 3:23)고 선언합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이발을 하고 또 목욕도 합니다. 깔끔한 몸과 마음으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행위로는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 도사리고 있는 죄와 양심의 문제를 도무지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생 누구나 경험하는 깊은 고민입니다. 단번에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얼마나 좋을까요?
마틴 루터는 수사였지만 죄의 문제에서 자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로 심각하게 고통하다가 로마를 방문했습니다. 산타 스칼라(Santa Scala)의 스물여덟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면 모든 죄를 사함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계단을 올라가려고 그 먼 길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큰 기대를 품은 채 드디어 무릎을 꿇고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갔습니다. 그 계단은 일찍이 예수님께서 총독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올라가셨던, 총독의 관저에 있었던 스물여덟 개의 대리석 계단입니다. 신앙심이 깊었던,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 여사는 아들의 왕권을 이용하여 예루살렘에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그 돌계단들을 모두 옮겨 왔습니다.
지금은 그 돌계단들을 요한 성당 맞은편에 설치하였고 닳지 않도록 나무로 덧씌워 놓았습니다. 덧씌워 놓은 나무 틈 사이로 보이는 계단은 하얀색 대리석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순례객들은 너도나도 그곳을 무릎 꿇고 올라갑니다. 나름대로 죄를 자백하면서 말입니다. 아마 마틴 루터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설에 의하면 그 계단을 올라가던 중 서너 계단을 남겨 두고,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이 섬광처럼 마음을 환하게 비추었다고 합니다.
루터는 이런 행위로 죄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주를 믿음으로, 그를 짓누르던 죄의식에서 비로소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4세기 말경 밀라노에 있던 어거스틴이 경험한 은혜요, 18세기 영국의 요한 웨슬레가 경험한 은혜입니다. 우리는 자꾸 타락한 본성의 요구에 미혹되어, 무엇인가 행함으로 죄의식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종교들이 탄생했고, 구원을 위해 행함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어떤 행함을 통해서도 죄에서 자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그분을 구주로 믿을 때, 우리를 옥죄고 있는 죄의 문제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우리는 2016년의 첫 달을 살아가고 있는데, 이달에 죄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죄의 문제를 해결하게 될 때 진정한 삶의 터닝 포인트는 이루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