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민국 칼럼] 어느 여목사의 겨울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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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발이 흩날리던 그 해 겨울, 우수한 수능 성적을 놓고 입시 담당 선생과 부모는 입술이 마르도록 여학생을 설득했다. 학교의 명예를 위해, 가정의 기쁨을 위해, 여학생은 반드시 일류 대학에 진학해야만 했다.

그러나 오전 시간을 거의 다 허비하도록 여학생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진학 상담을 위해 순서를 기다리던 학부모들과 동료 학생들을 더 이상 기다리게 할 수 없었던 선생과 부모는, 결국 여학생의 단호한 의지 앞에 고개를 내저었다.

신학대 장학생이 된 여학생은, 하나님과의 깊은 소통을 기쁨으로 여기며 목회자의 꿈을 향해 아름다운 여로를 시작했다. 찬양 전도, 의료 봉사, 단기 해외선교 등 여러 가지 헌신을 경험하며, 동기들과의 우정을 공고히 하고 사역자의 기쁨을 한껏 누리면서 신학대학원까지 학업을 이어갔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던가. 신학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업 실패로, 집안은 하루아침에 거리로 나앉을 처지가 되었다. 자동차 부품 제조업을 하던 아버지는, 회사 공금을 횡령하고 도주한 경리 직원 때문에 회사가 발행한 어음과 당좌수표를 결제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다행히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당좌수표를 회수한 어머니의 노력으로, 여학생의 아버지는 두 달 만에 출소했다. 노점을 꾸린 어머니에게 인고의 시간은 첩첩산중이었다. 아버지는 도주한 경리 직원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 경리 직원이 해외로 도주했다는 풍문을 듣고부터, 아버지는 안주 없는 술로 시간을 보냈다.

도피하고 싶었다. 어디든지 가야만 했다. 하루아침에 빈곤층으로 변해 버린 낯선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해외선교 사역을 선택한 선배를 따를 명분으로 충분했다. 제법 규모가 큰 교회에서 시무하던 교육전도사 사역을 후임에게 맡기고, 여전도사는 성경에 손을 얹고 선배와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미용 기술과 기초적 의료 지식을 습득한 신혼부부는, 가난과 우상 숭배로 찌든 캄보디아로 떠났다. 소독약이 없어 결국 다리를 잘라야 하는 미개하고 우둔한 가난과 어깨동무하면서, 말라리아와 식중독으로 사경을 헤매면서 정착한 선교지에, 여전도사는 홀로 남겨졌다. 호수 위에 원두막처럼 얼기설기 엮은 판잣집에서, 아랫배를 움켜잡고 나뒹굴던 아이를 병원으로 후송하기 위해 새벽녘에 이불을 박차고 나간 남편은 사흘 만에 아이와 함께 익사체가 되어 돌아왔다.

햇볕 쨍쨍한 그날, 얄궂은 하늘이 미치도록 원망스러웠다.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과 지인들의 험담이 바람결에 들려 왔다. 대학 진학과 결혼, 선교 국가 선택까지 목젖이 상하도록 반대했던 부모와 지인들이 '그럴 줄 알았다'고 저마다 돌팔매질을 해댔다. 아무려면 어떠하랴. 호사하겠다고 오른 캄보디아 행이 아니었는데, 아무려면 어떠하랴.

남편을 화장(火葬)한 그날 저녁에도 아이들은 과자 부스러기를 얻어먹기 위해 교회 마당을 서성거렸다. 귀국을 종용하는 어머니의 편지는 쌓여갔지만, 교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야학을 멈출 수는 없었다. 8만 원을 벌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생산직 일을 마치고 목회자의 꿈을 이루고자 하는 그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비록 두 명 뿐이었지만. 

어느새 여전도사는 남루한 캄보디아인이 되어 갔다. 더 이상 교회와 야학을 지속하기 힘든 상황이 도래할 무렵, W교단에서 캄보디아 신학생들에게 숙식은 물론 약간의 생활비까지 지원하며 초청하겠다는 소식을 알려 왔다. 

자동차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선교사에게 아이들을 보살펴 달라는 청원을 간곡히 하고, 여인은 귀국길에 올랐다. 7년 만에 돌아온 고향이었다. 공항에서 만난 어머니는 넋을 놓고 통곡했다. 그날따라 여전도사의 머리칼은 유난히 흩어져 있었다. 

아늑하다고 느껴야 할 부모의 집이 낯설고 평안치 못했다. 아버지를 알코올 치료 병원에 입원시킬 여유가 없는 어머니는, 어느새 노인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출소를 위해 빌린 돈 때문에 어지간히 시달렸다. 며칠을 낯선 법원 서류와 씨름한 끝에, 부모는 파산 선고를 받았다. 

벌써부터 캄보디아가 그립다. 아련한 숲 냄새가 다가온다. 도피처로 선택한 나라, 캄보디아는 어느새 여전도사의 나라가 되어 있었다. 캄보디아에서 온 청년들은 신학대학교에 잘 적응했다. 그들은 반드시 참된 목회자가 되어 캄보디아 복음화를 위해 크게 쓰임을 받아야 한다. 남편에게 그들은 하늘 상급이 분명하니까.

북새통을 이룬 연말연시를 지날 무렵, 유년부에서부터 여전도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친 원로목사는 재혼을 권했다. 암으로 아내와 사별한 지 사 년이 넘었다는 상대는, 오디오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는 건실한 안수집사라고 했다. 하나 있는 아들은 열두 살인데 착하다고 덧붙였다.

여전도사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원로목사가 주례를 자청했다. 더 이상 아이는 낳지 말자고, 전기 기술이 있으면 캄보디아를 살릴 수 있다고, 다양한 미래를 상의하면서 여목사는 성경책에 다시 손을 올렸다. 재혼한 남편은 이듬해 오디오 사업을 정리했다. 아들은 중국의 외국어 학교에 입학시켰다. 캄보디아에 제법 번듯한 콘크리트 건물을 마련했다. 고마웠다.  

소독약, 소화제, 해열제 등등 기초 의약품도 제법 넉넉히 마련되었다. 아이들에게 영어 성경을 가르치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미용 봉사를 했다. 남편은 각종 전기 제품을 고쳐 주고, 오지에 전기를 공급하는 작은 관급 공사를 입찰받으며 제법 비싼 아들의 유학비를 뒷받침했다.

3년 만에 현지인 아홉 명을 한국 신학대학원에 입학시켰다. 캄보디아 우스갯소리까지 익숙해질 무렵, 남편은 실성한 사람이 되어 집으로 들어섰다. 아들이 중국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비보를 넋두리처럼 내뱉었다. 

중국으로 간 남편은 일주일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더 이상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었다. 아들이 다니던 학교를 찾아갔다. 남편은 아들을 살려내지 못한 의사를 폭행한 혐의로 중국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실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 명년이면 어느새 육십이다. 남편은 출소했는데 소식이 없다. 아들의 나라를 찾아갔을까.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여목사는 고개를 내저었다. 공금을 횡령한 경리 직원을 찾아 나섰던 아버지처럼, 미친 듯이 남편을 찾아다녔지만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것이 창조하신 이의 섭리가 아닐런가. 캄보디아 교회와 야학은 후임 선교사가 잘 이끌어간다. 그러면 됐다. 여목사는 영구 귀국길에 올랐다. 아버지의 주검에 눈물 대신 쓴웃음이 흐른다. 본향이 그립다. 천국이 한없이 그립고도 그립다. 세상에 무슨 허영이나 미련이 있으랴. 오늘이라도 하늘 길이 열렸으면 좋겠다.

눈이 내린다. 옥탑방 바람이 코끝을 헤집는다. 어머니가 새우처럼 누워 떤다. 억대의 교회 헌금을 횡령한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은 유명 목사가 TV 뉴스의 헤드라인이다. 여목사는 오늘도 노방전도를 위해 움츠러든 몸을 일으킨다.

사랑하는 온 가족이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생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광장에 함박눈이 쌓인다.

/하민국 목사(검암 새로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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