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85-312) 황제는 로마에서 '기독교를 핍박한 10대 황제' 중에서도 가장 그 정도가 심했다. 그의 핍박은 가장 강렬했고 혹독했다. 고로 당시 기독교인들은 그를 "말세에 나타난다고 예고된 적그리스도가 아닐까"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오래 전 리퍼블리카광장(Piazza Repubblica) 인근에 있는 성당에 들어갔다가 한국인 수사 한 분을 만났다. 로마에서 한국인 수사를 만나니 참 반가웠다. 그의 설명을 들으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목욕장이 테르미니(Termini)역에서부터 미 대사관저 주변, 그리고 스페인 계단의 인근까지 포함된 대단히 넓은 공간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보통 테르미니역을 종착역이라는 의미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라틴어로 떼르메(Terme: 목욕장)라는 것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럴 정도로 그의 목욕장은 대단히 크고 화려했다. 그 목욕장의 남은 터 일부분을 교회당으로 개조하여, 로마의 특별한 명사들의 장례식을 집례한다. 몇 년 전 유명한 지휘자 시노폴리의 장례식도 그곳에서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의 국력이 약해져 가던 시기에, 크로아티아에서 비천한 노예로 태어났다. 그는 군대에 들어가 각고의 노력 끝에 황제의 친위대장이 되었고, 누메리아누스 황제가 니코메디아에서 살해되자 휘하 군인들의 추대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 밑바닥에서 권력의 정상까지 올라간 사람으로, 황제가 된 후 국내의 혼란을 수습하고 사방의 적들을 물리침으로 로마의 경계선을 안정시킨 탁월한 지도자였다. 덕분에 참으로 오랜만에 로마의 평화가 이루질 수 있었다.
그는 대제국 로마를 혼자서 통치하기에 벅차다고 느껴, 두 명의 황제와 네 명의 부제를 임명하여 분할 통치했다. 그래서 동방에서는 자신이 정제가 되고 갈레리우스를 부제에 임명했으며, 서방에서는 막시미아누스를 정제, 콘스탄틴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를 부제로 세웠다. 이처럼 두 정제와 네 부제가 통치하였기에, 훨씬 안정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페르시아의 낫세르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도나우 방어선의 3개 군단과 기병대까지 참전시켜 격퇴시켰다. 또 휴전을 맺어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관할하고, 페르시아가 더 이상 확장 정책을 쓰지 못하도록 꽁꽁 묶어 놓았다.
그의 종교 정책을 보면 초기에는 기독교를 탄압하지 않았다. 고로 부인 프리스가와 딸 발레리아와 대부분의 내시들과 궁녀들이 기독교인이었어도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기독교를 핍박하기 시작한 것은 부제요 사위인 갈레리우스의 충고 때문이었다. 갈레리우스는 황제의 심복이면서 사위였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 로몰라는 독일 여사제로 기독교를 핍박하도록 간청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까지 충동해 핍박에 나서도록 유도했다.
결국 황제는 303년에 기독교 탄압 칙령을 발표하고, 잔혹한 핍박을 시작했다. AD 303-304년에 네 차례나 칙령을 내렸고, 한 달 사이에 1만 7천 명을 희생시키기도 했다. 특히 303년 2월 23일에는 니코메디아에 새로 건축한 교회를 파괴하도록 했고, 교회의 보물을 압수했다. 2월 23일은 로마의 신 테르미누스(Terminalia)를 위한 축제일이었기에, 그날에 기독교인들을 전멸시키기로 계획했다. 그는 다음 날인 24일에 칙령을 내려, 제국 내에 있는 모든 성경과 예식서를 압수했고 예배를 위한 모임을 금지시켰다. 명령에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에게서는 공직을 박탈했고 그들을 범죄자로 선언했다.
또한 니코메디아에 있는 자신의 궁전에서 두 번이나 화재가 발생하자 그 원인을 기독교인들에게 전가하여, 로마의 신전에 희생제를 드리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모두 검거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자신의 아내와 딸도 있었다. 이 핍박으로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참수를 당했고, 그 와중에 로마 감독 마르셀리누스는 살기 위해 배교를 선택하기도 했다.
특히 304년 4월 30일에 선포된 네 번째 칙령에 의한 핍박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사자들에게 살육을 당한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인육을 먹던 맹수들이 더 이상 사람들을 찢어 죽이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핍박으로 세바스티안이 순교를 당했다. 그는 황제의 경비대장으로, 수감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비밀리에 도와 주었던 신앙인이었다. 그는 밀고를 당하여 기독교인이라는 신분이 드러나게 되었고, 자신의 측근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황제는 마우레타니아 궁수들을 시켜 세바스티안을 나무에 묶어 놓고 활을 쏘도록 명령했다. 수많은 화살이 그에게 꽂혔고, 그는 버림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기적처럼 아내의 도움으로 구조되었고, 정성 어린 간호를 통해 회복되었다. 회복된 세바스티안은 황제가 다니던 길에서 기다렸다가, 황제를 향해 큰 소리로 경고했다. 무고한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을 멈추어야 한다고 말이다. 세바스티안이 죽었다고 여겼던 황제는 그가 나타나자 한동안 정신을 잃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뒤 곁에 있는 경호원들에게 그를 때려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는 경호원들에 의해 맞아 죽었고, 그 시체는 하수구에 버려졌는데 어느 여신자가 카타콤베에 안치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자신의 가문 여인인 수산나를 황제 갈레리우스와 결혼시키기 위해 강제 약혼을 시켰다. 그녀는 얼마 있으면 황제의 부인, 즉 황후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수산나는 자신이 신자임을 고백하고 결혼할 수 없다고 완강히 버팀으로 순교를 당했다. 저들은 하나같이 이 세상의 영광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무엇이 그녀에게 이런 믿음을 갖게 하였을까?
성 밖의 '세 분수 수도원'의 '천국의 계단 성당' 지하에 가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목욕장 공사에 징집되었던 기독교인들의 무덤이 있다. 각 지역에 산재했던 기독교인들을 잡아다가 노예처럼 일을 시킨 후 이곳에서 1만 203명을 죽였다. 그러나 그런 엄청난 핍박은 머지않아 등장할 콘스탄틴 황제로 하여금 신앙의 자유를 펼치게 하기 위한 전조가 아니었을까 싶다.
어둠이 더할수록 새벽은 가까이 온다는 말처럼, 영적 어둠이 온누리를 뒤덮고 있는 이 때 성도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싶다. 디오클라티아누스 황제를 끝으로, 교회는 목마르게 소원하던 신앙의 자유는 얻었지만 그 자유는 내부를 부패하게 하는 전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