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에는 5현제의 마지막인 아우렐리우스 이후 쇠락의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물리학의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하면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일인 듯하다.
아버지에게서 제위를 물려받은 콤모두스는 역량 미달이었다. 그런데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이유로 그는 세계 최고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있었다. 5현제 중 마지막이었던 스토아주의 철학자 아우렐리우스의 결정적인 실책은, 어리석은 아들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준 것과 기독교도를 탄압한 일이라고 한다. 이런 일들이야말로 세상 지혜의 한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콤모두스는 결국 제위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몇 년 후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후 명망 있는 장군 출신 집정관 페르티낙스가 황제에 올랐다. 그는 군비 지출이 지나친 것을 깨닫고 그것을 즉시 손보려다가, 반발한 군부에 의해 암살을 당했다. 그 후 황제가 다섯 번이나 바뀌는 정치적 대혼란이 일어났다.
이때 혜성처럼 나타나 정치적 안정을 도모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로마 제국의 20번째 황제로 등극한 세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191-211)였다. 그는 특이하게도 북아프리카 출신이다. 보통 북아프리카 사람들 중에는 얼굴이 검은 베르베르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기독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어거스틴 역시 베르베르족이다.
세베루스는 현재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의 근교인 렙티스 마그나에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기원전 3세기에 해상 무역으로 위력을 떨쳤던 도시요, 한니발로 하여금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진격하여 로마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도록 했던 나라였다. 후에 그 나라는 로마에 편입되었지만.......
세베루스는 북아프리카의 문화를 따라 마술과 미신을 연구했고, 꿈 해석에 조예가 깊었고 점성술에 능했다. 그러기에 태생적으로 기독교와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첫 부인이 죽은 후, 두 번째 부인을 점성술을 좇아 얻었다. 그녀는 에메사(Emesa, 시리아의 안디옥교회 부근) 출신으로, 태양신인 바알을 섬기는 엘가발 사원의 대제사장의 딸이었다. 그녀는 세베루스와 결혼하여 두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를 낳았다. 그녀는 영특했다고 하니, 얼마나 교묘하게 왕을 조종했을지 상상이 간다. 그녀는 황제에게 "로마의 전통적 종교를 일으켜, 국가를 위협하는 불순한 세력을 무력화시키라"고 자주 권했다.
당시 로마 제국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다. 북쪽에서는 게르만의 위협이 끊이지 않았고, 거기다가 세베루스는 군대의 지지로 황제가 되었기에 군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군대의 봉급을 파격적으로 인상함으로 일시적 지지를 받았지만, 그것은 국가를 통치하는 자에게 큰 올무가 되는 일처리였다. 한 번 단맛을 경험한 군대는 항상 그런 방법을 요구하기 마련이고, 그에 비해 국가의 재정은 넉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탈리아인과 원로원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방인이었고 배경을 내세울 게 없는 무명의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열등의식으로 인해 그는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원로 41명 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과 하인들까지 죽였으니, 얼마나 보복에 대한 불안 가운데 나날을 보냈을까 싶다. 스탈린이 무자비하게 주변 사람들을 숙청한 후 보복이 두려워 자신의 잠자리를 최측근에게까지 알려 주지 않았던 일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과연 그런 삶이 진정 훌륭한 삶이었을까.
그런 세베루스가 미신에 더욱 자신을 의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그는 황후의 조언을 듣고 로마 전 지역에 태양신 바알을 섬기도록 명령했다. 태양신을 지존으로 세운 후 다른 모든 신들을 그 산하에 두어 종교적 통합을 도모했다. 그것은 친정에서부터 태양신을 섬겨온 황후의 계략이었다. 마치 이세벨이 친정에서 바알을 수입하여 아합 왕으로 하여금 섬기게 했던 것처럼. 이런 역사를 통해 아내의 바른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황제는 종교인들을 힘으로 제압했고,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혹독하게 탄압했다. 황제는 두 종교를 말살하기 위해 그들에게 더 이상 신자를 끌어들일 수 없다는 법령을 공포했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 신앙에 열심이었던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에서의 탄압은 더욱 극심했다.
초대교회를 연구한 프렌드 교수는 히폴리투스(Hippolytus, 170-236)의 기록을 인용해 "로마·알렉산드리아·카르타고·고린도·안디옥 등지에서 화형·참수형·태형 등의 박해가 일어났고, 이는 그 후에 일어나게 될 전 로마 제국에서의 공적 박해의 전조였다"고 했다.
그들은 정한 날(주일)을 기다려 예배 장소로 들어가 사람들을 체포했고, 기독교인들에게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도록 명령했다. 이를 거부한 이들을 재판관 앞으로 데려가 황제의 칙령을 범했다고 정죄한 후에 가차 없이 처형했다. 이들은 기독교인들을 죽여서 짐승들에게 던져 주기도 했다. 여인들에게 욕을 보였고, 심지어 성도의 무덤들을 파헤치기도 했다.
이때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Origenes)의 아버지 레오디데스와 여러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다. 페루페투스의 순교를 기록한 터툴리안은 203년 기독교의 많은 초신자들이 교사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고 했다. 또한 26세의 자매 페루페투스가 혹독한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순교당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기독교 역사상 위대한 지도자였던 안디옥의 클레멘트가 순교를 당했고, 오리겐과 이레네오 역시 순교의 제물이 되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터툴리안은 의분이 일어나 기독교 변증문을 썼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에게도 정당한 재판을 받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관용을 베풀어 줄 것을 황제에게 간청하기도 했다.
황제는 60세가 넘은 나이에 갈레도니아(현재의 스코틀랜드)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거기서 죽었다. 그는 마지막에 의미심장한 유언을 했다.
"나는 원로원 의원도 역임했고 변호사도 해 봤다. 대대장이나 장군도, 집정관도 역임했다. 국가 요직을 두루 거쳤고 마지막으로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 나는 주어진 임무들을 충실하게 감당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이제 와서 돌아보니 모두가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인생은 헛될 뿐이다."
인생은 눈이 가려 자신이 추구하는 일이 제일 중요한 줄 안다. 그러나 죽음의 면전에서 뒤늦게 깨닫고 후회하게 된다. 그렇다면 당신은 진정 후회하지 않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