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민국 칼럼] 땅들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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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들이 기지개를 켠다. 새싹이 돋고 꽃망울이 터지는 봄의 전령 뒤에는 땅들의 관용과 인고가 숨어 있다. 땅들은 아름다운 헌신을 한다.

인생들은 대부분 땅들에 대한 고마움을 망각하고 살아간다. 환호의 순간과 성취의 기쁨, 때로는 환경에 대한 원망과 도저히 헤쳐 나갈 수 없는 한계 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는다. 하늘과는 매우 호전적인 소통을 한다. 별과 달을 노래하고 태양의 기운을 만끽한다. 

그러나 인생들은 땅들의 소리는 잘 듣지 않는다. 그렇게 외면을 당하면서도 땅들은 항상 인생들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처럼. 가장 존귀한 것들이 인생들을 위해 동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들은 가까운 존재의 소중함을 모르는 채 살아간다. 

땅들은 인생들의 죽음까지 동행해 주는, 의리로 똘똘 뭉친 친구들이다. 바다의 범람을 막아 주고, 모든 생명들에게 넓은 마당을 아낌없이 내어 주는 큰 마음의 소유자들이다. 짐승의 가죽처럼 단단하게 느껴지는 지표면의 모습만이 땅의 실체, 전부가 아니다.

땅들의 성품은 과묵하고 온화하며, 차림새는 언제나 수수하다. 온갖 금은보화를 다 가지고도 현란한 치장을 하지 않는다. 열기까지도 기꺼이 품어 주는 도량은 헤아릴 수 없이 깊다. 큰 나무들을 일으켜 세워 주고 격려하는 모습은, 덕망 높은 스승을 연상케 한다. 높은 산, 깊은 바다까지 다 품고 있는 광대함과, 큰 바위와 바닷물을 통째로 업고 있는 땅들은 실로 힘이 장사다. 

봄이다. 가만 귀 기울여 보면 땅들의 소리가 들린다. 자칫 방관하면 동사할 수 있는 초목들을 보호하며 겨울나기에 들어섰던 땅들의 나라가 분주해지고 있다. 생명들에게 운동과 휴식을 제공하고 채소를 생산해 주는 땅들의 광대한 움직임이 활기차다.

삭풍은 지나갔다. 땅들은 볼이 터질 듯 매서운 겨울바람을 이겨냈다. 온몸으로 지표면을 덮은 땅들의 희생으로, 깊은 땅들은 따뜻한 겨울을 보냈다. 동장군의 기세에 눌려 잔뜩 움츠리고 있던 땅들이, 기지개를 켜며 왁자지껄한 회의를 연일 반복하고 있다. 회의 주제는 봄에 대한 역할 분담이다.

함박눈을 녹여 먹으며 동면에 들어갔던, 겨울나기에 고단했던 땅들은 해마다 반복되는 한바탕 새싹 축제를 준비하고 있다. 송송 바늘구멍을 내고 미명의 새싹들을 지표면 위로 내보낼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땅들의 힘으로 지표면에 올라선 새싹들은, 머지않아 태양과 연합하여 아름다운 꽃망울을 터뜨리게 된다. 

인생들은 꽃들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낼 것이다. 꽃들이 박수갈채를 받을 때, 땅들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잠든 체하며 자신들의 공과를 자랑하지 않을 것이다. 땅들은 나서지 않는다. 봄 축제를 주관한 창조주의 명령만을 묵묵히 수행할 뿐이다. 

땅들은 항상 인생들의 곁에 있다. 땅들은 짓밟혀도 원수를 갚지 않는다. 오히려 짓밟은 이들의 갱생을 위해 제 몸까지 내어 준다. 낙심천만한 인생들이 고개를 처박고 탄식할 때, 땅들은 기꺼이 함께 울어 주었다. 인생들이 큰 대자로 누워 하늘에게 환호성을 보낼 때에도, 땅들은 질투하지 않고 인생들의 등 뒤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코끝을 파고드는 공기가 제법 간지럽다. 간간이 훈풍이 머문다. 땅들은 벌써부터 꽃피는 봄의 임무를 완성하고, 광활한 초록 숲의 향연을 준비하고 있다. 숲이 우거지면 새들이 둥지를 틀고, 인생들은 청량한 공기를 마시며 숲의 그늘에서 쉼을 얻을 것이다. 

인생은 쉼을 위한 여정이다. 필경은 천국 입성할 영혼의 쉼이다. 화장장 한 줌 흙으로 땅이 되는 여정 중에, 인생들은 많은 만남을 스쳐간다. 아름다운 자연들이 말하는 소리들을 외면하며 살아간다. 땅은 귀소 본능적 동경의 대상이 아니다. 땅은 곧 인생들의 발자취이다. 땅들은 인생들의 박제이고 헌 옷을 모아 잘 꾸민 박물관이다. 그래서 땅은 우리들이다.

인생들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별리의 시간이 도래한다. 영원한 작별의 날이 도래하기 전에 칠순·팔순 잔치를 열어 소중한 인생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듯, 어느 봄날 하루 한적한 산야를 걸으며 땅들의 소리를 다 들어 주고, 종일토록 바라보고, 꼭 한 마디 해 주고 싶다. 고맙다.

/하민국 목사(검암 새로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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