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민국 칼럼] 어머니의 대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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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때가 되면 들기름에 달달 볶은 시래기나물이 먹고 싶어진다. 영락없는 대보름이다. 구정에 만든 찹쌀 부침이 아직 남아 있다. 약수를 받아다 담근 나박김치 한 사발을 들이키며 수시로 먹는 오곡 찰밥은 어머니의 그윽한 사랑이다.

닷새는 족히 먹어야 새 음식이 생각날 정도로, 대보름 토속 음식은 묘한 중독성을 지녔다. 그도 그럴 것이, 집에서 담근 국간장의 진한 향기와 들기름의 고소함으로 삶아 볶은 나물인지라, 긴 시간 숙성하지 않은 시중의 간장과 수입 깨로 짜낸 기름으로는 재현해 낼 수 없는 깊은 맛이다.

어머니의 대보름은 여름부터 시작된다. 지천으로 널린 호박, 가지를 썰어 그늘에 말리고, 가을이 되면 무청과 고사리를 말린다. 된장, 고추장, 간장을 달이고, 결 좋은 새우젓으로 담근 김장 김치를 꾹꾹 눌러 놓아야만 어머니의 겨울은 시작된다. 

어머니의 엄동설한은 자식들 입에 음식 들어가는 것을 보고 배부른, 그저 날씨만 조금 차가운 한 날에 불과하다. 겨울 지날 음식들을 넉넉히 준비해 두었기 때문이다. 동지에는 팥죽을 쑤고, 신년이면 떡을 썬다. 구정에는 갖가지 전을 부치고, 찹쌀 부침을 종일토록 굽는다. 식혜와 수정과를 끓여 식히고, 실백을 띄운다.

언제부터인지 어머니 곁에서 도라지를 다듬는 아버지의 손길도 예사롭지 않게 빨라졌다. 교통사고로 뇌수술을 두 번이나 한 어머니는 언어 장애를 안고 천만다행으로 생명을 건졌다. 동갑내기 부부인 어머니와 아버지는 금년에 팔순을 지났다. 고령인데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두 무릎에 인공 관절을 넣는 수술을 했다.

정월대보름이다. 올해는 보름달을 볼 수 없다는 일기예보다. 그럼에도 요 며칠 전부터 아무렇게나 썰어 볶은 시래기나물이 무척이나 먹고 싶어졌다. 인공 관절 수술을 한 어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재활 중이다. 

눈치를 알아차린 아내가 장바구니를 연다. "국산 들기름 한 병 샀네요. 시래기는 흙이 많아서 많이 빨아야 됩니다." 잔소리를 한다. 서너 끼니는 족히 먹을 수 있는 오곡밥 가득 담고, 시래기나물, 무나물, 호박나물, 가지나물, 취나물에 두부까지 큼직하게 부쳐 담아 보자기를 여미는 아내의 손길이 무척이나 정겹다. 

어머니가 지팡이를 짚은 채 삶아 볶은 고사리나물이 며느리가 만든 대보름 밥상을 맞이한다. 며느리의 대보름 음식은 어머니 손맛 못지 않게 깊은 맛이 난다. "힘드신데 이제 그만하세요." "아니다." 어머니는 내년 대보름 음식을 손수 한다고 고집을 피운다. "알았어요, 그러면 조금만 하세요." 대보름달이 뜨거나 말거나, 어머니가 대보름 음식을 만드는 것은 생존의 호흡이다.

/하민국 목사(검암 새로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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