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마키아벨리(Niccolo Macchiavelli, 1469-1527)가 쓴 '군주론'처럼 찬반 의견이 분분했던 책도 없을 듯싶다. 그는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한 자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피렌체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 거주하는 교우가 마키아벨리의 생가를 구경시켜 주었다. 그것은 내게 즐거움이었다. 역사적 유명 인사의 집을 방문하면 그의 체취를 잠시나마 느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피렌체에서 서쪽으로 14Km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 가루초(Garucho)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오늘날 그가 살았던 집 주소는 Via Guiciardini 18번지다. 집 주위로 포도밭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농촌이다. 특히 피렌체는 옛 로마 시대부터 좋은 포도주가 생산되는 곳이었기에, 지금도 사방으로 잘 가꾸어진 포도밭을 쉽게 볼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이곳 어딘가에 네로 황제의 포도밭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그의 글에서 밝히고 있다.
그가 태어난 집은 좁은 시골길에 잇대어 지은 이층집이었다. 정부에서는 관리하지 않고 있는지, 이 집은 허술한 모습으로 방문자를 맞이했다. 다만 문 위에 "마키아벨리가 태어나 살았던 집"이라는 간략한 간판이 붙어 있을 뿐. 그리고 집 건너에는 마키아벨리가 생전에 사용했을 중세풍의 우물이 무거운 나무판자로 입구가 덮인 채로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또한 거기서 2-30여 미터를 가면 오솔길이 얼마쯤 뻗어 있다. 아마도 마키아벨리가 생전에 글을 쓰다가 막히면 이 길을 천천히 걸었겠다 싶다.
마키아벨리는 스물아홉 살에 피렌체 공화국 서기로 등원하여 마흔네 살에 그 자리에서 나왔다. 공화정이 무너짐으로 추방당한 메디치 가문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해임되자 고향집인 이곳으로 돌아왔다. 복직할 날을 소망하면서. 그리고 이곳에서 군주론을 집필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그를 유명하게 만든 군주론은 메디치 가문이 다시 권력을 잡지 못했다면 빛을 볼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일은 역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신곡이 태어난 것도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가 추방의 고통을 당했기 때문이었고, 천로역정도 존 버니언(John Bunyan1628-1688)이 감옥에서 12년 동안 수감생활 중에 썼던 것이다. 고통을 긍정적으로 승화할 때 위대한 역사는 창출된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공화국의 서기직을 좋아했다. 그 직에 있으면서 외교 사절로 다른 나라에 많이 방문했고, 또 피렌체에 방문하는 외교 사절도 맞이했다. 화려한 직책이었던 것 같다. 본래 그런 직은 상대방에게 기가 죽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소망했던 복직이 잠깐 동안 이루어졌으나 반(反)메디치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그는 그 후에 이곳으로 내려와 수많은 역사를 연구하면서 군주론을 썼다.
당시 이탈리아는 도시국가로 갈가리 찢겨 있었고, 한없이 무력하기만 했다. 프랑스와 스페인은 안방 드나들듯 이탈리아에 쳐들어와 도시를 점령하여 다스리곤 했다. 과거 로마는 전 유럽과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다스렸던 강대국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조국은 힘을 잃고 무력한 도시국가로 갈가리 찢겨 있었다. 그는 위대한 조국 건설에 온 마음과 정신을 쏟고 싶었기에 심혈을 기울여 이 책을 썼다.
그는 책에서 군주는 선하기만 해서는 안 되고, 때로는 악하기도 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군주는 경솔하게 남을 믿거나 경거망동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했다. 그는 조국, 영광, 힘(Virtu)에 대한 일관된 이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외세에게서 완전 독립과 자치권을 갖는 통일된 조국을 꿈꾸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력한 국가가 필요했고, 이를 건설하는 것은 전제군주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조국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아야 하고, 목적을 향해 때로는 무자비한 지도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국을 위해서는 종교도 도덕도 초월해야 한다. 그러나 선정을 위해서는 국민의 마음을 항상 파악해야 하고, 이를 이용 또는 만족시킬 수 있는 총명함을 지녀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강인한 정신력과 군대가 절대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했다. 군대 없이 외침을 방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강력한 군주를 한니발과 스콜피온의 예를 통해 설명했다. 한니발은 수많은 인종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이국 로마에서 전쟁을 일으켰지만, 전세가 유리할 때나 불리할 때나 그 군대 내에서는 내분이나 모반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었다. 그것은 한니발의 비인도적 잔인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를 물리쳤던 로마의 명장 스콜피온은 부하들에게 지나친 온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부하 병사들이 스페인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그는 원로원에게서 로마 군대를 부패케 하는 장본인이라고 불명예스러운 탄핵을 받아야 했다. 고로 군주는 사랑보다는 두려움을 받는 것이 유리하다고 보았다. 은혜를 입을 때에는 목숨·재산·자식 등 모든 것을 바치지만, 위험이 닥치게 되면 그들은 금방 등을 돌리게 된다. 더 나아가서 인간은 두려워하는 자보다 애정을 느끼는 자를 훨씬 쉽게 배반한다고 여겼다.
이 책은 가톨릭교회 측에게서 강력한 반발을 샀다. 당시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교황권이 위협을 받고 있었고, 전 유럽이 종교적 갈등으로 흔들리고 있었기에, 군주의 힘을 미화한 마키아벨리의 글을 가톨릭 측은 좌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런 과격한 문구들 때문에, 교황 옹호파인 예수회가 중심이 되어 군주론을 소각하고 금서 목록에 포함시켜 탄압을 가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법학자 이노젠틸레는 마키아벨리즘에 대해 나쁜 인식을 주는 의미로 이론을 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가 오늘날까지 유지되어 오는 것은, 내부적으로 강력한 지도력 때문이 아니겠나 싶다. 지도자의 말에 복종하지 않는 이를 즉시 파면하는 강력함 말이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도 때로는 필요한 듯싶다. 치열한 분쟁으로 교인들은 흩어지고 소송비가 2백억 넘게 들었다는 한 교회 장로님의 이야기를 듣고 놀랐기 때문이다.
군주론을 보면서 우리의 역사를 회고해 보았다. 우리도 1970년대 지도자가 경부고속도로를 만들 때 반대가 극심했고, 야당 지도자는 포크레인 앞에 드러눕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의 지도자는 이런 수많은 반대 앞에 포기하지 않고 용기 있게 밀어붙였고, 그 일이 경제 발전의 초석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군주는 재정을 비축하여 국력을 튼튼하게 만들고, 강인한 군대를 예비하고, 강한 국가라는 목표를 가지고 나라를 평안하게 해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의 말은 오늘날에도 적용된다. 그런 의미에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오늘날의 정치나 교회 지도자들도 깊이 음미해볼 사상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