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우 목사의 로마 이야기] 선교에 목숨을 걸었던 친첸도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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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우 목사(로마한인교회).

▲한평우 목사(로마한인교회).

역사는 한 사람의 삶을 다양하게 조명한다. 평범한 사람은 생략될 것이고, 선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아름답게 서술될 것이다. 유럽 목회자 세미나(EMI)를 마치고 친첸도르프의 사역지인 헤른후트(Herrnhut: 주님의 보호)를 방문했다. 책으로만 대했던 그분의 삶의 편린들을 느낄 수 있으리란 생각에 몹시 기대가 되었다.

먼저 모라비안들의 묘지를 찾았다.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모라비안들의 묘지가, 기도의 탑으로 올라가는 길 양쪽으로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 길은 마치 천국으로 올라가는 길처럼 아름답고 몽환적이었다. 무덤들은 왼편에는 남자들, 오른편에는 여자들로 구분되고, 가족묘는 없는 것이 특징이다. 유일한 가족묘는 기도의 탑으로 올라가는 길 중앙에 친첸도르프(Nikolaus Ludwig graf von Zinzendorf, 1700-1760) 가족의 것이 있을 뿐이다. 그것도 그의 제자들이 그 업적을 기리는 마음으로 만들었지 싶다.

▲친첸도르프의 무덤. ⓒ한평우 목사 제공

▲친첸도르프의 무덤. ⓒ한평우 목사 제공

그곳에서 부활의 때를 기다리며 깊은 잠 속에 빠져든 친첸도르프의 석관은 나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누구나 태어나면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고로 탄생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데, 대부분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다면 부활의 소망을 가진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

친첸도르프는 개신교적 신앙 때문에 오스트리아에서 망명한 귀족의 후손으로, 1700년 5월 26일에 드레스덴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지 6주 만에 내각 의원이었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4살 때 어머니는 재혼하였다. 고로 친첸도르프는, 경건주의 리더 스패너의 열렬한 후원자였던 할머니에게 철저한 신앙 지도를 받으면서 성장했다. 우리는 여기서 주일학교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친첸도르프는 어릴 때부터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아이였다. 그는 일기장에 "나에게는 단 한 가지 열망밖에 없다. 예수님, 오직 그분뿐이다"라고 기록할 정도였다.

그는 이미 15살 때 작은 기도 모임을 만들었고,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그는 좀 더 구체적인 활동을 위해 열심 있는 소년들과 '겨자씨선교회'를 만들어, 기독교적 형제애를 가지고 온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로 서약했다.

▲현존하는 모라비안교회. 장식이 전혀 없다. ⓒ한평우 목사 제공

▲현존하는 모라비안교회. 장식이 전혀 없다. ⓒ한평우 목사 제공

그는 부모의 요구대로 비텐베르크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드레스덴의 관리가 되어, 앞날이 보장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기쁨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뒤셀도르프를 방문하여 미술전시회를 관람하다가, 스타인벡이란 화가가 그린 그림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그 그림은 바로 고난받는 예수님의 모습이었다. 머리에는 굵은 가시관을 쓰고, 양손과 양발과 옆구리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그림으로, 밑에는 "나는 너를 위해 몸 버려 피 흘렸는데,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느냐?"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그는 그 그림 앞에서 큰 충격을 받고, 전시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무릎을 꿇고 있었다. 흐르는 눈물은 그의 볼을 적시었다. 이때가 1719년, 그의 나이 19살 때 일어난 거룩한 사건이었다. 그 경험을 통해 그의 가슴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타오르게 되었다.

그는 아내가 될 사람도 자신과 뜻을 같이할 사람, 즉 예수님을 위해 자신과 재산, 그리고 장래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시대처럼 예쁘고 스타일이 좋은 사람을 신붓감 1순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22세에 이상이 같은, 자신보다 7살이나 연상이었던 드로시 로이스와 결혼하였다. 결과적으로 생각할 때 그는 60세에 죽었으니, 사역할 수 있는 시간이 38년 남은 셈이었다.

그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놀라운 만남을 섭리하셨다. 즉 체코에서 신앙의 자유를 위해 피난 온 모리비안들과의 만남이었다. 14세기 말 요한 후스에 의해 시작된 모라비안교회는, 체코에서 비약적인 부흥을 이루어 한때는 개신교인들이 국민의 90%에 이를 정도였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예수회를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 운동이 강력하게 일어났다.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고, 개신교인들이 패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형이나 추방을 당했다. 그 후 남은 자들은 은둔 생활을 하면서 "감추인 씨앗"으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다가 독일 동부로 이주하였고, 거기서 친첸도르프 백작을 만나게 되었다.

▲친첸도르프의 집. 입구 양편에 성경구절이 있다. 친첸도르프는 자신의 집을 피난 온 모라비안들에게 내어 줬다. ⓒ한평우 목사 제공

▲친첸도르프의 집. 입구 양편에 성경구절이 있다. 친첸도르프는 자신의 집을 피난 온 모라비안들에게 내어 줬다. ⓒ한평우 목사 제공

친첸도르프는 부모에게서 받은 재산으로 땅을 사서 이들을 거주하게 했다. 그리고 그곳을 헤른후트라 명명했다. 그의 꿈은 슈페너와 프랑케의 경건주의 운동의 본산인 할레대학과 같은 시설을 만들어 선교본부로 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집을 내놓아 종교적 자유를 위해 피난 온 이들의 안식처로 삼도록 하였고, 종교적 공동체를 세워 경건한 삶을 추구하도록 도모했다.

그는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모든 공직(드레스덴의 왕실 법률고문)에서 은퇴하고 종교적 지도자로 온전히 헌신하였다. 각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던 모라비안들이 그를 중심으로 뭉쳤고, 매일 24시간 릴레이 기도를 100년 동안이나 지속하였다. 그 기도는 조국과 독일, 그리고 온 세계를 위한 것이었다. 또한 말씀 암송과 묵상, 예배와 성경공부 강조, 죄의 고백과 성도 상호 간 책임 등을 지속적으로 실천하였다. 겨우 300여 명의 공동체였음에도 불구하고, 온 세계에 많은 자비량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1930년대까지 무려 3,000명의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모라비안교회는 재적 500명에 출석 250명이라고 한다.

교회당 안에 들어가니 판자로 된 바닥과 장식이 전혀 없는 예배당, 작은 탁자가 강대상을 대신하는 민낯의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이런 모습은 지금도 친첸도르프의 사상을 충실히 지키려는 모습 같아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이들로 인해 큰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수없이 일어났다. 특히 감리교를 창시한 요한 웨슬레는 미국에 선교사로 갔다가 열매 없이 배를 타고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는데,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찬송하는 모라비안들을 통해 큰 감화를 받게 되었다. 그 후 웨슬레는 영국으로 돌아와, 모리비안들의 예배에 참여하여 회심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헤른후트를 방문하여 친첸도르프와 영적 교제를 나누었다. 한 역사가는 "요한 웨슬레가 놀라운 부흥 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라비안들을 통해 받은 감화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는 선교에 중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시기였다. 고로 친첸도르프는 자신의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인해 작센 지역에서 추방을 당하기도 했고 비난을 다반사로 당하였으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했기 때문이다.

▲100년 동안 릴레이 기도를 했던 기도의 탑. ⓒ한평우 목사 제공

▲100년 동안 릴레이 기도를 했던 기도의 탑. ⓒ한평우 목사 제공

그의 성 같이 큰 집 입구 양편에는 이런 성경구절이 쓰여 있다. 오른편에는 고린도후서 5장 1-2절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다"는 구절, 왼편에는 스가랴 9장 12절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는 구절이다. 그는 천국만을 간절하게 앙망하며 나그네 여정을 살았다는 의미이리라.

윌리엄 덴커는 모라비안 선교운동에 대해 "저들이 세운 중요한 공헌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선교사이며, 자신의 직업과 삶을 통해 신앙이 표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점에 있다"고 했다. 그런 삶은 일찍이 프랑스 위그노들의 삶이기도 했다.

우리의 종착역은 결국 작은 무덤이다. 그 분명한 곳을 향해 가는데, 그곳까지 어떻게 걸어가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개인적 과제다. 검은 이끼로 뒤덮여 있는, 250년이 지난 그의 석관 위에, 누군가 가져다 놓은 꽃이 묻는 것 같다. "당신은 어떤 길을 걸어가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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